1181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6)
그 순간 현종의 뇌리에 과거 어느 한 시점이 떠올랐다.
- 화산에 입문하고 싶습니다.
아직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홀로 험한 산을 오른 소년을 처음 만났던 그때가.
그 당시 문파는 눈에 띄게 쇠락해 가고 있었고, 현종은 하루하루를 버텨 내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하지만 그 소년을 처음 본 순간, 현종은 오래도록 잊었던 희망이라는 두 글자를 떠올렸었다.
그래. 분명 그랬다.
더는 슬픔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더는 제자를 받지 않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고민하던 현종에게, 백천의 존재는 화산의 미래를 이어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었다.
그 희망이 지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러나거라!”
현상이 준엄하게 소리쳤다.
“지금 이 자리는 구파일방의 수장과 천우맹의 맹주께서 서로의 미래를 논하는 자리다. 참석을 허락받았다 해도 발언하는 것까지 허락받은 것은 아니다. 더는 무례를 범하지 말고 물러나거라!”
하지만 백천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지 않겠습니다.”
“백천아!”
“천우맹은 본디 언로를 막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니 제자 역시 중차대한 일을 앞두고 장문인께 몇 가지 여쭙는 게 자격 없는 일이 되지는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녀석이!”
“그리고 또한.”
백천이 현종을 보며 말했다.
“장문인께서 어떠한 의도로 일을 이리 진행하시는지는 알고 있으나, 덮어 두고 짐작하기보다는 묻고 답하여 그 의도를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 서로를 위해 더 나은 길이라 생각합니다. 제자의 생각이 짧았다면 이 자리가 끝난 뒤 합당한 벌을 내려 주십시오.”
“이놈이 그래도!”
현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는 순간, 현종이 손을 들어 만류한다.
“그만하거라.”
“장문인!”
“되었다.”
현종이 고개를 내저었지만, 언제 어느 때고 장문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현상조차도 이번만큼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그런 그를 물러나게 한 것은 현종의 다독임이었다.
“괜찮을 것이다.”
대답 없이 한숨을 쉰 현상이 결국 마지못해 다시 자리에 앉았다.
현종은 현상이 왜 이리도 격하게 반응하는지를 이해하기에 다독일 수 있었다. 자격을 따지고자 함이 아니다. 현종에 대한 무례를 논하고자 함이 아니다.
현상은, 이제 구파일방의 소속이 될 백천이 혹여나 법정의 심기를 거스르는 말을 하여 노여움을 살까 염려한 것이다.
“네 말도 틀리지 않구나.”
현종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법정에게 양해를 구했다.
“죄송합니다, 방장. 객을 앞에 두고 할 일은 아닌 것으로 압니다만…….”
“어찌 객이라 하십니까? 이제 화산과 소림은 한 식구나 다름이 없으니 괘념치 마십시오.”
“……감사합니다.”
법정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인 현종이 그제야 백천을 마주했다.
“말할 게 있다고 했느냐?”
“정확히는 여쭙고자 함입니다.”
“그래. 해 보거라.”
현종이 조금 편안해진 얼굴로 백천을 응시했다.
어쩌면 이게 나을지도 모른다. 훌륭히 대답해 이들을 이해시킬 수 있다면 좋은 일일 것이고, 대답이 궁색하여 이들의 노여움을 사게 된다면 그 역시 나쁠 게 없는 일이다. 그럼 책임을 질 이가 누구인지 조금 더 확실해질 테니까.
“그럼 제자, 화산의 대제자로서 다른 천우맹도들을 대신하여 여쭙고자 합니다.”
“으음.”
현종이 고개를 끄덕이자 백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장문인께서는 천우맹이 구파일방과 함께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하다.”
“그렇다면 제자, 감히 그 이유를 구하고자 합니다. 맹주님께서 결정하시면 맹도들은 그 결정에 따라야 합니다. 그러니 그 전에 어째서 그런 선택을 하셨는지 정도는 알 자격이 있지 않겠습니까.”
“어려운 질문이구나.”
현종이 백천과 그 뒤에 있는 모두를 한눈에 담았다. 복잡한 눈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는 이들을 말이다.
“방장께서 하신 말씀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틀리지 않았다는 것은 좋은 이유입니다. 하지만 완전한 이유는 될 수 없을 듯합니다.”
“그래. 그렇구나.”
현종이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이들을 구하는 것 역시 대의라는 말에 공감했기 때문이란다.”
“천우맹 역시 더 많은 이들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럴 것이다. 하지만 백천아. 그러기 위해서는 너무도 많은 피를 흘려야 하지 않느냐.”
잠깐 침음하던 현종이 말했다.
“천우맹이 세운 뜻을 관철해 내기 위해서는, 우리가 항상 앞장을 서야 하고, 항상 위험한 곳으로 달려가야 한다. 그렇게 이룰 수 있는 것이 무가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더없이 중요하고 소중할 것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흘려야 할 피의 대가가 작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리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 나도 그리 생각한단다. 그렇기에 나는 조금이라도 피를 덜 흘릴 방법을 찾으려 한 것뿐이다.”
“저희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면, 그 피의 대가를 우리가 책정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타인의 명을 따르게 된다면 그 대가를 스스로 정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기에 방장의 진의를 확인하고 또 확인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구파일방에 든다고 하여 방장의 명을 전적으로 따르기만 해야 하는 건 아니잖으냐?”
현종이 고개를 내저으며 덧붙였다.
“나는 지킬 것이다. 그리고 아낄 것이다. 그게 나의 소임이고, 나는 그것을 내 남은 삶을 통해 이뤄야 한단다.”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장문인께서는 그게 옳다고 여기십니까?”
현종이 끝없이 갈등했던 질문을, 백천이 꺼내 놓았다.
“……모르겠구나.”
현종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옳고 그름을 정하는 것은 너무도 힘겨운 일이다. 그러니 그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려는 것뿐이란다. 너희가 보기에는 답답하고 모자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백천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우리가 쥔 것을 지킴으로 인하여, 지키지 못하게 될 것들에 대해서는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우리가 흘리지 않은 피는, 다른 누군가의 피로 돌아옵니다. 대의와 협의를 배우고 그것을 관철하라 배운 저희가 그 피를 외면하고 스스로 보신해야 한다면, 지킨 것에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현종이 눈을 감았다.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이 이것이었다.
더 많은 이들을 살리기 위해서 죽어 가는 이들에게서 시선을 돌려야 한다. 그게 얼마나 모순적인 말인가? 방장을 따르겠다는 건 결국 그 모순을 따르겠단 말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눈을 떠 백천의 눈을 본 현종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마음만 먹으면 어떻게든 둘러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화산의 장문이다. 제자의 저런 눈빛을 앞에 두고 입에 발린 거짓말을 늘어놓고 싶지는 않았다.
“백천아.”
“예.”
“그 지켜야 할 이들만큼이나, 내게는 너희도 너무나 소중하다.”
“…….”
“너, 그리고 다른 아이들, 화산. 그리고 천우맹에 함께해 준 모든 이들…….”
현종의 목소리에선 깊은 회한이 묻어났다.“
그래. 내가 그리 말했단다. 내가 그리 가르쳤단다. 그 협의를 위해 목숨을 걸 줄 알아야 한다고. 하지만…… 미안하구나. 나는 너무도 못난 사람이라 내가 스스로 뱉은 말조차 지키지 못한다.”
“장문인…….”
“너희가 죽음으로 그 협의를 관철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잘했다고 칭찬해 줄 용기가 내겐 없구나. 그저 한 사람이라도 더 살아남아 훗날 더 많은 것을 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
“그러니 나를 욕하거라. 나를 원망하거라. 이건 전적으로 내가 못나 벌어진 일이란다.”
백천의 얼굴이 굳어졌다. 현종은 살짝 지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대답이 되었다면 이제 그만 물러나거라. 방장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않으냐.”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무엇이냐?”
“만약, 장문인께서 화산의 장문이 아니라 화산의 일개 제자에 불과했다면, 죽어 가는 이들에게서 시선을 돌리셨겠습니까?”
현종이 입을 다물었다. 대답하기 위해 몇번이고 입술을 뗐지만, 결국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였다.
백천은 이미 거기서 대답을 들었다는 듯 말했다.
“알겠습니다.”
“아니. 아니다. 백천아, 나는…….”
“그게 아닙니다, 장문인.”
현종의 두 눈에 순간 의아한 기색이 스쳤다. 아니라니?
“확실히 알았습니다. 장문인께서는 틀리지 않습니다.”
“…….”
“장문이란 자리는 결코 일개 제자와 같아서는 안 됩니다. 화산을 위해, 그리고 천우맹을 위해 장문인께서 내리신 결정은 틀리지 않습니다. 그건 누구라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백천아…….”
“그저 알았을 뿐입니다. 누구도 틀리지 않았음에도 내리는 결정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각자의 입장이 다르니까요.”
그 말을 이해한 몇몇이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백천이 어떤 의도로 이 대화를 이끌어 나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대화를 들은 이라면 누구도 현종을 비난하지 못하게 되리라.
현종이 회한에 찬 눈으로 먼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백천이 담담히 말했다.
“저는 장문인께서 화산의 장문이셔서 정말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고맙구나.”
씁쓸한 미소를 지은 현종이 그를 물리려 할 때였다. 백천이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장문인. 장문인께서 내리신 결정은 화산의 장문으로서 내리신 결정입니까? 아니면 천우맹의 맹주로서 내리신 결정입니까?”
“……둘 모두란다. 어느 하나 소홀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모두 대답이 되었습니다.”
백천이 현종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 순간 현종은 보았다. 불만을 어쩌지 못하던 이들의 얼굴에도, 내심 들끓는 감정을 어쩌지 못하던 이들의 얼굴에도 ‘체념’이라는 감정이 스치는 것을 말이다.
이 결정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는 못하더라도, 결국 인정은 한 것이다. 이 모습을 다름 아닌 저 백천이 만들어 주었다.
‘……백천아.’
어느새 백천이 이토록 성장했던가? 무거운 어둠만 짙었던 현종의 가슴에 순간 한 줄기 빛이 들어오는 듯했다.
‘그래, 이걸로 됐다.’
이 아이들을 지켜 나갈 수만 있다면 그는 못 할 것이 없다. 그러니 확신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때였다.
백천이 등을 올곧게 펴고 현종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러니…….”
“음?”
순간 백천의 그 모습이 현종의 눈엔 더없이 크게 보였다.
“천우맹의 대소사를 논하는 자리에 걸맞지는 않지만 시기를 논할 상황이 아니니만큼, 이대제자 백천, 화산의 대제자로서 장문인께 한 가지 청을 드리려 합니다.”
“……청이라니? 그게 무엇이더냐?”
“장문인.”
순간적으로 사위가 고요해졌다.
그저 상황을 지켜보던 이들조차도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리라는 걸 직감하고 숨을 죽였다. 그들의 시선은 오로지 현종과 마주 앉아 있는 백천의 너른 등에 고정되어 있었다.
“화산의 대제자 자격으로 감히 간청드립니다.”
모두의 주목 속에서도 백천은 그저 정명한 눈빛으로, 그리고 단 한 치의 흔들림조차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당당히 말했다.
“제자를 화산의 장문인으로 임명해 주십시오.”
그 목소리가 아슬아슬하던 고요를 깨며 천둥처럼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