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0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5)
이 방에 들어오면서, 현종이 저 말을 꺼낼 것을 생각지 못한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도 막상 예상하던 말이 현종의 입에서 흘러나오니, 모두가 하나같이 숨이 막혀 오는 듯한 느낌에 침음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한 일이지 않은가?
천우맹은 분명 그 의미가 남다른 곳이었다. 이들에게 천우맹은 지금껏 비를 피할 수 있는 처마이자, 삭풍을 막아 주는 벽이었으니까.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자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그 역할을 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천우맹보다 더 오랫동안 그 역할을 해 온 곳이 바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다.
그러니 사실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 소속이 되어 있는가가 아니라, 그 문파가 어떤 의지를 관철해 나가는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런 사실을 모두 알고 있음에도 현종의 말이 왜 이토록 시리게 다가오는지 참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법정의 얼굴은 속내를 짐작하기 어렵게 묘했다. 무거운 마음과 안도가 공존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맹주님…….”
“다만.”
법정이 말을 잇기 전에, 현종이 빠르게 먼저 입을 열었다. 법정이 모든 상황을 마무리 지어 버리게 두지 않겠다는 듯이.
“그 전에…… 확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현종의 무거운 시선을 마주하며 법정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지요.”
현종은 조금 가빠지려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차분히 말했다.
“방장께서는 이 모든 것이 그저 방장과 소림의 욕심은 아니며, 대의를 위한 일이라 하셨습니다.”
“예, 그러합니다.”
“그리고 방장의 대의란 하나라도 더 많은 이들을 살려 내기 위함이라 하셨습니다. 그 마음에는 변함이 없으십니까?”
법정이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맹주님.”
“그렇다면 앞으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더 나아가 천하의 정파들을 이끌어 나감에 있어서 그 뜻이 변치 않을 거란 약속을 해 주실 수 있습니까?”
“약속하겠습니다.”
대답이 너무도 빨리 나왔기 때문일까? 법정을 바라보는 현종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방장…….”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것이 아닙니다, 맹주님.”
법정은 현종의 그런 마음을 이미 짐작하고 있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생각하지 않고 내놓은 대답이 아닙니다. 생각할 필요가 없었을 뿐입니다. 그 각오를 이미 다지지 않았다면, 어찌 제가 이곳에 올 수 있었겠습니까?”
“…….”
“맹주님. 천우맹이 제게 손가락질한다면 저는 웃어넘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같은 구파에 소속된 이들이 제게 하는 손가락질은 너무도 아프고 쓰린 법입니다.”
그 마음을 짐작한다는 듯 현종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러니…… 어찌 제가 삿된 거짓을 입에 담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 망설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현종이 길게 숨을 내쉬고는 다시 입을 뗐다.“
그리고 방장께서 말씀하신, 천우맹에 속했던 문파들이 차별 없는 대우를 받으리란 말 역시 반드시 지켜져야 할 것입니다.”
“아미타불.”
법정이 이것 역시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딱 잘라 말했다.
“하나가 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둘로 남아 있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겠지요. 하지만 그보다 더 나쁜 것은 하나로 합쳐졌던 이들이 다시 갈라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상황을 기필코 막아 내는 것이 저의 역할이겠지요. 기껏 하나가 되었는데, 과거보다 못하다는 평을 받을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제가 어떻게 해야 구파가 다시 분열되지 않을 것인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겠습니다.”
현종은 눈을 꾹 내리감았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대답이다. 그렇기에 흠을 잡을 수가 없는 대답이었다. 그래, 흠을 잡을 수 없는.
현종의 입에서 작은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내가 흠을 잡고 있었구나.’
이미 마음속으로는 결론을 내렸건만, 이 순간까지도 결정을 무를 빌미를 찾고 있었던 모양이다.
‘욕심이구나, 욕심.’
현종은 저도 모르게 다른 이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모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들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무언가 가슴 한구석이 시큰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짙고 버거웠던 현종의 지난 삶에 비하면, 이들과 함께한 시간은 짧디짧았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리라.
하지만 그 시간이 짧다고 하여, 저 시선 하나하나에 담긴 무게가 가벼운 것은 아니다.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그른가? 이 순간에도 갈팡질팡하고 머릿속이 혼란했다.
현종은 자신이 그리 대단치 않음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 선택을 다른 이들에게 미룰 순 없다. 어느 쪽을 택하든,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 할 테니까.
‘무엇이 옳은지는 모르겠지만…….’
이 선택이 대가를 요구한다면, 그 오욕을 누군가가 짊어져야 한다면, 그 사람은 당연히 현종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선택이 잘못되었다 해도 다른 이들은 현종을 거름 삼아 나아갈 수 있을 테니.
그게 천우맹의 맹주라는 분에 넘치는 자리를 누려 온 현종이 져야 할 짐이다. 그게 그동안 믿어 준 이들에게 그가 보일 수 있는 최선이다.
“맹주님.”
그런 그의 내심을 짐작했는지 법정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를 미덥지 못하다고 여기시는 마음,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아닙니다, 방장. 미덥지 않은 게 아니라…….”
“저 역시 같은 상황이었다면 맹주님처럼 고민하고 망설였을 것입니다. 쉬이 할 수 있는 대답은 아니지요.”
“…….”
“하지만, 맹주님.”
법정의 시선이 그 어느 때보다 무겁고 어두웠다.
“장문이란 본디 그 모든 것을 짊어지는 이가 아니겠습니까.”
현종이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의 입장은 다르지만, 이 말만큼은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장문이란 이 무거움을 버텨 내는 이들이다. 문파가 작건, 크건, 누구 하나 빠질 것 없이.
잠시 뒤, 다시 눈을 뜬 현종의 표정은 이전보다 한결 편해져 있었다.
‘그저 내가 짊어지면 될 일.’
그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천우맹이 실리를 잃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명분과 주체를 상실하는 것이 아니다.
가능성을 잃는 것. 그리하여 미래를 잃는 것.천우맹을 이끄는 젊은 무인들이 그 작은 것들에 발목 잡혀 활짝 개화할 가능성을 잃어 가는 것만은 경계해야 한다.
‘본디 나는 겨울을 버티는 이가 아니었던가?’
봄인 줄 알았더니, 아직 봄이 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기다려야겠지. 언젠가 저 꽃들이 피어날 때를. 그곳이 천우맹이면 어떻고, 구파일방이면 어떻겠는가?
그저 저들을 위한 거름이 되어 그 시간을 기다리면 될 일이다.
현종의 시선이 청명에게로 향했다.
씻은 듯 표정이랄 게 없는 얼굴이다. 현종에게 어떤 부담도 주지 않으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현종은 알고 있다. 저 무표정한 겉모습 속에서 수많은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다는 것을.
‘청명아.’
현종은 때때로 저 표정이 사무쳤다.
저 굳게 다문 입매에 담긴 의지는 오직 하나. 장문인에 대한 존중. 그리고 화산의 미래에 대한 의지뿐이다. 청명이란 이는 지독할 정도로 화산만을 보고 사니까.
그래서 종종 현종은 묻고 싶었다.
‘그렇다면 네 손안에는 대체 무엇이 있더냐?’
현종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저 어깨에 실린 무거운 짐을 조금이나마 나눠 들어 주는 것뿐이다.
“방장.”
“예, 맹주님.”
“……저는 방장의 뜻을 믿겠습니다.”
법정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감정이 휘몰아쳤다. 승포 자락에 얹힌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저는 아직도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게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맹주님!”
법정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입니다. 아니, 제가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현종진인께서 천하를 위해 훌륭한 결단을 내렸다고 세상 모든 이들이 칭송할 수 있도록, 제가 하나 된 정파가 옳았음을 증명해 내겠습니다.”
“그저 그 말만은 지켜 주십시오. 이 모든 것은 더 많은 이들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말, 그 말만은 말입니다.”
“반드시 그리할 것입니다.”
현종이 무거운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자리는 길게 이어져 봐야 서로에게 상처만 남는다. 차라리 그가 독단적으로 결정을 하고, 원망을 받는 쪽이 낫다.
결심을 굳힌 현종이 열리지 않는 입술을 떼었다.
“저 현종은 천우맹의 맹주 된 자격으로…… 이 자리에서 선언…….”
“자, 잠시만요!”
그 순간, 내내 안절부절못하던 조걸이 비명처럼 소리쳤다.
“자, 장문인! 아니, 맹주님! 적어도 다른 이들의……!”
“입 닫아라.”
“사숙!”
조걸이 순간 확 타오르는 눈으로 백천을 돌아보았다.
“그 입 닫으라고 했다.”
“이……!”
일순 조걸의 눈에 노화가 치밀었다. 사형제에게 보여서는 안 될 적나라한 감정이 그 두 눈에 들끓고 있었다.
하지만 백천은 싸늘한 눈으로 그런 조걸을 찍어 눌렀다. 들끓는 조걸의 눈빛과 얼음장 같은 백천의 눈빛이 치열하게 충돌했다.
잠시의 침묵 뒤.
결국 기세에서 밀려 버린 조걸이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었다. 고개가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방 안의 분위기가 조금 더 무거워졌다.
모두가 차마 그 광경을 바라보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이 상황이 지금 천우맹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 같았으니까.
가슴은 그러지 말라고 외치건만, 이성이 그런 감정을 내리누른다. 그러니 이해될 수밖에 없었다. 참아 내지 못한 조걸도, 그런 조걸을 내리누른 백천도.이 광경은 모두에게 쓰라렸다. 심지어는 청명조차도 벽에 기대앉은 채 천장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시선을 돌린 것이다.
현종과 장로들조차 피해 내지 못한 그 고요한 격정 속에서 냉정한 이는 오직 백천뿐이었다. 덜덜 떨리는 조걸의 어깨를 말없이 바라보던 그는 법정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방장.”
“아닐세, 아닐세. 괘념치 말게나. 당연히 그럴 수 있는 일 아닌가.”
법정이 자상한 얼굴로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그는 조걸의 반응을 십분 이해했다. 그가 화산의 어린 제자였다면, 오히려 조걸보다 더 격하게 반발했을지도 모른다.
되레 그를 놀라게 한 것은 조걸의 반응이 아니라, 이런 상황에서도 무서울 정도의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는 백천이었다.
‘화산은 화산이구나.’
저 현종과 청명이 일군 밭에서 이런 이들이 자라나고 있는 것이다. 훗날, 먼 훗날 언젠가 이런 이가 장문이 된다면, 화산은 지금보다 더 무서운 문파가 되리라.
그때 백천이 숙였던 고개를 들고 법정을 똑바로 응시했다.
“다만.”
“음?”
“그럴 자리가 아님을 알지만, 조금 무례를 범해야 할 것 같습니다. 부디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무례라 했는가?”
법정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순간적으로 백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백천의 표정과 그 입에서 나온 말이 너무도 상반되어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백천은 별다른 부연 없이 현종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장문인.”
담담한 부름에, 현종의 입에서 탄식 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백천아.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니…….”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순간 현종의 표정이 굳어졌다. 백천의 목소리에 더없는 단호함이 어려 있음을 알아서였다.
백천. 화산의 대제자가 흔들림 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껏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