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9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4)
“어서 오십시오, 방장.”
법정이 가까이 다가오자 현종이 언제 얼굴을 굳혔냐는 듯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맞이했다.
“다시 뵙게 되어 더없이 반갑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별고 없으셨습니까?”
법정이 그런 현종에게 반장하며 빙그레 마주 웃었다.
“장문인께서 걱정해 주신 덕분에 무탈하게 보냈습니다. 혹여 무슨 일이 생길까 싶어 방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습니다.”
법정의 너스레에 현종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다른 이들이라면 모르겠지만, 화산 장로들의 눈에는 그 미소에 살짝 배어 있는 씁쓸함이 확연하게 보였다.
이런 자리에서 먼저 농을 건넨다는 건, 그만큼 여유가 있다는 뜻. 이미 주도권은 법정이 잡고 있다.
“안으로 드시지요.”
“예. 감사합니다, 장문인.”
당군악이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방장. 아직은 맹주님이라 지칭하시는 것이 옳을 듯싶습니다.”
법정이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려. 내 주책을 부렸소. 소승의 실책을 이해 부탁드립니다, 맹주님.”
“아니, 아닙니다. 호칭 같은 게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저는 천우맹의 맹주이지만, 또한 화산의 장문인이기도 하니 둘 다 틀린 말이 아니지요.”
고개를 내저은 현종이 안쪽을 향해 손짓하자 법정이 안내대로 발을 옮겼다.
확연하게 느껴진다. 이전 방문했을 때와는 그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이. 맞이하러 나온 이들이 그때보다 그를 조금 더 어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서로 묵은 감정이야 그때 더 깊었을 텐데도 말이다.
그 분위기가 법정의 마음을 조금은 들뜨게 했다.
단순히 그를 어려워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분위기에서 이미 대답을 들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거리감은 점차 좁혀 나가야겠지.’
그간 서로가 해 온 일이 있고, 쌓아 온 악감정이 있으니 입장이 달라졌다 해서 하루아침에 웃으며 지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는 법정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가 제대로 포용력을 보여 주지 못한다면 서로 합치지 않으니만 못한 게 되어 버릴 테니까.
그런 부담이 있음에도 법정은 웃을 수 있었다. 가장 큰 산을 넘었는데, 남은 자잘한 문제를 해결 못 하겠는가?
슬쩍 주변을 둘러본 법정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화산검협은 나오지 않았습니까?”
“아, 그게…….”
순간 현종이 얼굴을 붉혔다.
“죄송합니다. 그 아이가 몸이 조금 안 좋아서…….”
“맹주님. 저를 마중하러 나오지 않았다고 무례하다 탓하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그 사람이 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는 것인지가 조금 걸려서…….”
“아닙니다. 안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 그럼 됐습니다.”
그제야 법정이 다시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중은 나오지 않되 회의에는 참석한다는 건, 감정적으로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화산과 천우맹의 결정에는 따르겠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자네는 그런 사람이지.’
물론 그 화산검협이 버선발로 달려와 그를 맞이한다면 더없이 좋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법정은 알고 있다. 그건 그저 욕심일 뿐이라는 것을. 그 누구도 화산검협을 제 마음대로 휘두를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런 욕심을 부렸다가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될 터.
화산검협은 더없이 섬세하게 다뤄야 하는 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법정 그 자신도 완벽히 다룰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은 없었다.
보통 그런 이들을 양날의 검이라 지칭하지만, 법정이 보기에 화산검협은 양날의 검 같은 게 아니라 손잡이가 없는 검과 같았다. 누구라도 그 검을 손에 들기 위해서는 제 손가락이 잘려 나갈 각오를 해야 한다.
‘하지만 화산검협. 다행히도 내게는 그 손잡이가 있다네.’
법정의 시선이 앞서 걸어가는 현종의 등에 꽂혔다.
현종이야말로 누구도 쥘 수 없는 화산검협이라는 검을 그의 손에 안겨 줄 열쇠다. 그가 직접 청명을 휘두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현종만은 저 청명을 움직일 수 있다.
그리고 법정은 다름 아닌 그 현종을 움직일 수 있는 이였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는 그가 화산검협을 직접 움직이는 것과 그리다를 것 없지 않겠는가?
‘장문인. 장문인의 선택은 결코 틀리지 않았소이다. 내가 장문인의 입장이었다 하더라도 다른 방법이 없었을 거요. 그게 문주 된 이가 짊어질 수밖에 없는 무게 아니겠습니까?’
속으로 말을 건넨 법정이 눈을 감고 작게 불호를 외었다.
현종이라 해서 구파일방에 다시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는 일이 어찌 마음 편하겠는가?
하지만 현종에게 다른 선택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 문파의 장문인이 최우선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문파의 영화를 이룩하는 것도, 더 강한 세력을 구축하는 것도 아니다. 문파를 존속하고 이어 가는 것이다.
특히나 문파가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지며 현판을 내릴 상황까지 몰리는 광경을 두 눈으로 지켜본 현종에게는 더더욱 다른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 줄기 비애를 느낀 법정이 다시 한번 불호를 외었다.
“드시지요.”
“예, 맹주님.”
법정이 정갈한 동작으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널찍한 방 안에는 이미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방 안에 좌정한 이와 시선을 마주한 법정이 웃으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격조했네.”
“사흘 전에 봤잖아요?”
“사흘이면 긴 시간이지. 앞으로는 좀 더 자주 왕래해야 하지 않겠는가?”
“뭐 벌써 다 정해진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그러다가 얼굴 상하실 텐데?”
“그건 관련 없는 일이라네.”
“네?”
법정이 청명을 보며 빙그레 웃는다.
“설사 오늘 내가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한다 해도 지금처럼 서로 경원시하는 것은 좋지 못한 일 아니겠는가? 그러니 조금 더 자주 왕래하는 것이 옳겠지.”
청명의 입가가 실룩였다. 그 모습을 본 법정은 말려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렸다.
사소하게나마 말싸움에서 이겼기 때문에?
아니, 그런 게 아니다. 청명이 입을 다문 이유가, 다름 아닌 현종이기 때문이다. 논리에 진 것도 아닌데 현종이 들어선 것만으로도 입을 다문 것이다.
예전이었다면 화산검협이 인품 외에는 높이 평가할 게 없던 현종을 우대하는 모습을 보며 작게나마 질투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법정에게는 이 모습이 더없이 든든하고 좋아 보이기만 했다.
“말은 나중에 또 나눔세.”
“그러시죠.”
법정이 중앙에 좌정하려 하자 현종이 안쪽을 가리켰다.
“방장. 이쪽으로 오시지요.”
현종이 가리키는 상석을 슬쩍 바라본 법정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맹주님. 지금 제 자리는 이곳입니다.”
“하지만…….”
“그게 제 마음이 편하니 그리해 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현종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상석으로 향했다. 다른 이들도 방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찾아 앉았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방 안에 조용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법정은 그 침묵을 깨지 않고 우선 방 안에 들어온 이들의 면면을 살폈다.
일단 화산의 장문인과 장로들, 화산검협, 그리고 오검이라 지칭되는 이들과 혜연.
거기에 당가의 가주인 당군악과 소가주인 당패, 남궁세가의 소가주인 남궁도위와 새외의 두 궁주들. 그리고 녹림왕 임소병의 모습까지 보였다. 이 자리가 영 불편한지 문에 딱 붙어서 언제든지 나갈 태세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들이 천우맹의 중추로군.’
천우맹의 향방을 결정하는 자리에 참석한다는 것은 그 지위와 자격을 모두 갖춰야 가능한 일. 저 화산의 오검이나 소림의 혜연까지 함께한다는 건 조금 이상한 일이지만, 다른 이들이 인정했다면야 법정이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다.
아직 이곳은 천우맹이니까.
법정이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이제 마지막 걸음이다.’
시간으로 따지자면 급작스레 진행된 일이겠지만, 그건 겉으로 보아서만 그렇다. 법정이 고심해 온 시간까지 합친다면 결코 쉬이 온 자리가 아니라고 해야 옳았다.
그 길고 길었던 고뇌의 결과를 이 순간 대면하게 될 것이다.
“맹주님.”
법정이 입을 뗐다. 이들이 먼저 입을 열게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고, 이들을 이 분위기에 너무 오래 두는 것 역시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아야겠지만, 오늘만은 격식을 내려놓고 싶습니다. 저희가 처한 상황이 그리 느긋하지 않고, 무엇보다 제가 더는 견디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해합니다, 방장.”
“맹주님. 그리고 이곳에 계신 분들.”
법정이 조금 느릿하게 방 안에 있는 이들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우선은 감사를 표합니다. 이곳에 계신 분들이 있었기에, 소림과 구파의 힘만으로는 할 수 없었을 일들이 해결되었고, 구할 수 없었을 이들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
“그리고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옹졸하게 굴었던 것들에 대해 정식으로 사과를 드리고 싶습니다.”
법정이 고개를 숙이자 현종이 얼른 법정을 만류했다.
“이, 이러지 마십시오, 방장.”
“아닙니다. 맹주님.”
법정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 어떤 대답을 듣더라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대답을 듣기 전에 먼저 짚고 넘어가고 싶었습니다. 일이 여기까지 온 건 소림의 잘못이 구 할 이상입니다. 아니, 소림이 아니라 저의 잘못이지요.”
“방장…….”
“죄송합니다.”
법정이 다시 한번 깊게 고개를 숙였다.그를 포위하듯 둘러앉은 이들은 그 광경을 보며 하나같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방장의 사과를 정식으로 받는다는 것이야 참으로 좋은 일이지만, 지금의 상황이 저 사과를 온전히 기쁘게만 받지 못하게끔 했다.
고개를 든 법정이 더없이 준엄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천우맹이 추구하려 한 것은 구파 역시 잊지 않을 것입니다. 강호가 잃어 가고 있던 것을 다시 일깨워 준 사실 역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
“천우맹이 해 온 것을 논하자면 오늘 하루를 지새워도 부족하겠지만, 아시다시피 지금 천하가 처한 상황이 그리 여유롭지 않습니다. 하여…….”
모두 법정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는 소림의 방장으로서, 그리고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일전에 제가 드린 제안에 대한 대답을 얻으려 합니다.”
예상보다 조금 더 빠르게 법정의 입에서 이 말이 나왔다. 현종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아 버렸다.
“맹주님. 대답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법정은 현종, 그리고 청명의 표정을 동시에 살폈다. 이미 반쯤은 결과가 나와 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침이 바짝 마르고 속이 타들어 갔다. 이 대답이 얼마나 중요한지 천하의 누구보다 그가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현종을 재촉하지 않았다. 현종의 속도 그처럼, 어쩌면 그보다 더 타들어 가고 있을 테니까.
짧은 침묵. 하지만 당사자들에게는 억겁처럼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 흘렀고.
“일전에 말씀하신…….”
마침내 현종의 입이 열렸다.
“제안에 대한 대답을 드리겠습니다, 방장.”
법정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의 모든 신경이 현현종의 입술에 집중되었다.
“천우맹은…….”
현종의 입에서 탄식과도 같은, 하지만 결코 되돌릴 수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방장께서 하신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입니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청명의 두 눈이 굳게 닫혔다.
다시는 열리지 않을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