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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176화 (1,177/1,567)

1176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1)

청명이 웃음을 터뜨렸다.

“여하튼 동룡이 자신감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그만큼 강해지고서도 아직 부족하신 모양이지? 하기야 옛날 생각 하면…….”

“옛날이야기 하지 말라고 했다. 내가 분명히 말했다.”

“아이쿠! 예,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눈을 부라리는 백천의 반응에 청명이 과장되게 겁먹은 시늉을 하며 양손을 들어 올린다. 백천이 한숨을 푹 내쉬자 이내 웃음을 터뜨린 청명이 술을 들이켰다.

이윽고, 천천히 술병을 내린 그의 입술 새로 온기가 담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숙도…… 사형들도 다들 잘해 주고 있어.”

“…….”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이 이상 잘해 줄 수가 없지. 다들 지독하게도 버텼지.”

“알긴 아네.”

“좀 복잡하긴 해. 보고 있으면 한 번씩은 ‘어떻게 저렇게밖에 수련을 안 할 수 있지? 저게 사람 새끼들인가?’ 싶기도 하고.”

“…….”

“또 어떨 때는 ‘쟤들이 수련 말고는 하는 게 없구나. 진짜 노력한다.’ 싶기도 하고.”

“하나만 해라, 하나만. 하나로 정해.”

청명이 피식 웃었다.

“알고 있어. 다들 뼈가 으스러지도록 열심히 하고 있다는 거.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되려고 노력하는 중이라는 것도.”

솔직히 기특하다.

항상 모자라고 부족하다고 구박하지만, 청명은 알고 있다. 다들 얼마나 최선을 다해 자신을 돕고 있는지.

“그냥 우리가 감당해야 할 게 너무 큰 것뿐이지. 아무리 나눠 들어도 모두가 버거울 정도로.”

“그래도.”

“그게 힘이 되기도 하지.”

청명이 제 입을 주먹으로 꾹꾹 눌렀다. 마치 못 할 말을 했다는 것처럼. 그러다 코로 길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혼자 다 한 게 아냐. 나는 혼자 있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인간이거든.”

더할 나위 없는 진심이었다.

청명은 안다. 그가 무언가를 할 때는 언제나 누군가가 함께해 주었다는 것을.

화산의 선두에 설 때는 청문이 이끌고, 청진이 뒤를 받쳐 주었다. 가장 강대한 적들과 싸울 때는 당보가 그의 등을 지켜 주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청명은 그저 그런 강자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있었기에 청명은 매화검존이 될 수 있었다.

“사숙이랑, 사고, 사형들이 없었으면 여기까지 오진 못했을 거야. 물론 장문인과 장로님들, 다른 화산 사람들까지도.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말들이 흘러나온다.

어쩌면 내일 아침이 밝으면 이 말을 했던 시간을 영원히 지워 버리고 싶어질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냥 기분대로 말하고 싶었다.

“특히 사숙한테는 고마운 것도 많고.”

“그런 인간이 그래?”

“……취소할게. 내가 잠깐 정신이 나갔었다.”

작게 웃은 청명이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어쨌든 그러니까 괜히 쓸데없는 생각 할 것 없어. 사숙은 사숙이 해야 할 일을 완벽하게 해 주고 있으니까. 이 이상 바랄 게 없을 정도로.”

“어린 새끼가 주둥이만 살아서는.”

“나는 어른이지.”

“그래. 계속 지껄여 봐라.”

청명이 실실 웃으며 달을 올려다보았다.

어쩌면 그는 정말 영원히 어른이 될 수 없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하지만 그런 그도 어른이 되어야 할 때가 있다. 최소한 어른인 척은 해야 할 때가 있다.

더 어린 이들이 자신을 바라볼 때, 그 눈에 신뢰와 믿음이 담겨 있을 때. 그럴 때는 다 자라지 못한 어린아이도 어깨를 쫙 펴고 믿음직스러운 사람인 척을 해야 한다.

어쩌면 다들 그런 게 아닐까?

점점 자신을 두고 어른이라 믿는 이들이 많아지면,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음에도 어느 순간부터는 자연히 어른인 척을 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 아닐까?

청문이 있었다면, 청진이 있었다면, 혹여 당보 놈이라도 있었다면 청명은 여전히 철들지 않고 나이만 퍼먹은 화산의 미친놈으로 남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곳에는 청문도, 청진도, 당보도 없다.

청명에게 남은 것은 그저 그만을 바라보고 있는, 아직 완전해지지 못한 어린아이들. 언젠가는 그 재능을 날개처럼 펼치고 너무도 밝게 빛날 아이들이다.

그러니 어깨에 힘을 줘야 하지 않겠는가?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어깨라도 최대한 펴고 등을 꼿꼿하게 세워야 하지 않을까?

‘이런 기분이었네요, 사형.’

알 것 같다.

청문이 왜 그리 커 보였는지. 어떻게 그렇게도 흔들림 없어 보였는지.

아마도 청문을 그리 만든 것은 청문을 바라보는 청명의 시선이었었겠지. 청문이 청명을 이끌어 줄 때, 청명은 저도 모르게 청문의 등을 밀어 주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일방적인 관계란 없다. 일견 무의미해 보이는 것들조차 모두 하나하나 의미가 있다.

아무것도 아닌 이 대화가, 아무것도 아닌 이 농담들이 청명의 머리에 부옇게 어렸던 갑갑함을 걷어 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나도 조금 더 어른이 되어야지.’

청명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맺혔다.

“살다 보니 동룡이도 도움이 될 때가 있네.”

“……싸우자는 거지?”

“칭찬이야.”

“퍽이나 그러시겠다.”

백천이 씁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런 그를 보며 청명이 실소했다.

“걱정하지 마. 다 잘될 거니까.”

“…….”

“사패련이고, 마교 새끼들이고, 다 박살 내 버릴 거야. 그리고 언젠가는 화산을 천하제일 문파로 만드는 거지.”

청명이 한숨을 푹 내쉰다.

“물론 그 화산의 장문인이 사숙이나, 윤종 사형이 될 거란 건 속이 터지지만.”

“그럼 네가 처하든가!”

“……진짜?”

“아니. 취소한다. 제발 기억에서 지워 줘라. 부탁이다.”

기겁하며 정색하는 백천을 보며 청명이 낄낄 웃었다. 그러더니…….

“읏차!”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일어나?”

“생각이 명료해졌어.”

“응?”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왜 이런 고민을 하고 있었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야. 고마워, 사숙. 덕분이야.”

“……뭐래.”

백천이 황당한 얼굴로 청명을 바라본다.

“술도 아직 남았잖아.”

“아?”

청명이 제 손에 들린 술병을 입에 물더니 단숨에 허리를 뒤로 젖혔다. 안에 든 술이 콸콸 쏟아져 청명의 목을 타고 넘어갔다.

“저, 저……!”

“크으!”

단숨에 술병을 모조리 비운 청명이 빈 병을 짤짤 흔들고는 씨익 웃었다.

“이제 없는데?”

“……미친놈.”

“낄낄낄.”

간교하게 웃은 청명이 획 처마 아래로 뛰어내렸다.

“사숙도 쓸데없이 시간 끌지 말고 얼른 가서 자. 내일도 똑같이 수련할 거니까.”

“……사람이 걱정을 해 주는데도.”

“누가 누굴 걱정하는데? 사숙이 나를? 아이고, 황송해서 몸 둘 데를 모르겠네.”

“근데 이 새끼가?”

“덕분이네.”

청명이 몸을 획 돌렸다.

“내일 보자, 사숙.”

그리고 미련 없이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야, 이 새끼야! 내 말 아직 안 끝났다고…….”

백천이 불렀지만, 청명은 결국 돌아보지 않았다.

“저 새끼…….”

그 뒷모습만 멍하니 바라보던 백천이 결국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보았다.

구름에 가려진 달이 어슴푸레 빛을 뿜고 있었다.

“……술은 남겨 주고 가든가.”

허탈한 목소리가 밤하늘에 공허하게 퍼져 나갔다.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사흘간 장원의 일상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과한 수련에 시달리는 이들의 앓는 소리가 장원을 채워 나갔고, 그런 이들을 괴롭히는 이들의 목소리 역시 드높기만 했다.

겉으로는 그저 평온하기만 한 일상이 순식간에 흘러, 이윽고 법정과 약속한 날이 밝았다.

“고민들은 해 봤느냐?”

이른 아침부터 불러 모은 백천이 묻자 오검이 안색을 굳혔다.

“대답은 찾았고?”

윤종이 한숨을 푹 내쉬며 가장 먼저 말문을 열었다.

“사숙.”

“그래, 윤종아.”

“……고민이야 당연히 했습니다. 머리를 쥐어뜯을 정도로요.”

그 말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흘간 잠든 시간이 손에 꼽을 정도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지쳐 처소에 들어도 잠에 빠질 수가 없었다. 고민이 그들의 머리를 가득 채워 버렸기 때문이다.

윤종이 다른 이들을 슬쩍 돌아보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저는 솔직히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뭐가 옳고, 뭐가 그른지.”

백천은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그런 그의 말을 들어 주었다.

“저 혼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그러겠습니다. 제가 죽고 다른 이들을 구할 수 있다면, 설령 그게 훗날에 큰 손해가 되더라도 저는 기꺼이 그럴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몇몇이 동조하는 빛을 보였다.

“하지만…… 다른 이들을 구하기 위해 또 다른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건 할 수가 없습니다. 당장 조걸이 놈이 양민들을 구하기 위해 죽으러 간다고 하면 저는 보내 줄 자신이 없습니다.”

조걸이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애초에 옳고 그름을 따질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세상 누구도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못할 겁니다. 사숙,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 봤지만……. 죄송합니다. 저는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윤종이 만면에 송구한 빛을 띤 채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백천은 그를 탓하기는커녕 그저 담담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고생했구나.”

“……예.”

“다른 이들은?”

딱히 입을 여는 이가 없자, 백천의 시선이 자연히 유이설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유이설이 그답지 않게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그렇더냐?”

“어떤 일이 있더라도 선두에서 싸울 거예요. 그런데…… 사질들에게 그러라고는 말 못 해요.”

“그래.”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시선이 조걸에게로 옮겨 갔다.

조걸이 제 머리를 벅벅 긁적였다.

“사고랑 사형도 못 찾은 답을 제가 무슨 수로 찾겠습니까?”

“……기대도 안 했다.”

“예?”

“아니다. 그래서?”

“……솔직히 저는 그냥 제가 목숨만 걸 줄 알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목숨을 걸고 협의를 지키는 게 그러기 싫은 누군가에게는 목숨을 내던지라는 강요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말에 모두가 놀란 눈으로 조걸을 바라보았다. 그 반응에 오히려 놀란 조걸이 물었다.

“아, 아니, 왜 그럽니까? 제가 못 할 말을 한 것도 아니고?”

“……쟤도 생각이라는 걸 하는구나.”

“성장을 하네, 성장을.”

“이러면 언젠가는 사람도 되겠어.”

“이 양반들이!”

조걸이 발끈하자 백천이 피식 웃으며 그를 만류했다.

“그래, 고생했구나. 소소는?”

“사숙. 솔직히 저는 나가서 죽으라고는 못 해도, 같이 죽자고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

“네. 제가 혼자 살아남지만 않으면 되는 거잖아요.”

“그래. 그럼 소소는 그쪽이구나?”

“그런데…… 사숙, 사형들에게는 같이 죽어 달라고 할 수 있는데 나중에 제자들이 들어오면 못 그럴 것 같아요. 걔들은 살아야죠. 우리는 죽어도.”

그 말에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저도 모르겠어요. 지켜야 한다고만 생각했지, 모르는 누군가를 위해서 정말 지키고 싶은 이들이 희생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봤거든요. 그런데…… 제가 지키고 싶은 것과 화산이 지키고 싶은 게 다를 수 있더라고요…….”

당소소가 고개를 숙이자, 유이설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어루만져 주었다.

“혜연 스님께서는?”

“아미타불.”

혜연이 눈을 감고 불호를 외었다.

“시주. 부처께서는 세상 모든 곳에 불도를 전하여 중생들을 구하라 하셨소이다.”

“예. 그게 불가의 가르침이지요.”

“지키고자 하는 것의 우열을 나누는 것 역시 작은 인연에 대한 집착에 불과하지요. 더 많은 이들을 구하는 것이 맞습니다.”

백천이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혜연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게 된다면 제가 부처지, 어디 사람이겠습니까?”

“하기야.”

“……생각해 보면 저 양반은 중도 아니잖아.”

“파계승이지.”

혜연의 얼굴이 금세 새빨개졌다.

“제, 제가 언제 파계를 당했단 말입니까!”

“아니었어요?”

“다 그렇게 알던데요?”

“그, 그런…….”

혜연이 반장을 하고 연신 불호를 외어 대었다. 한숨을 내쉰 백천이 표정을 가다듬고 모두를 바라보았다.

“다들 진지하게 고민해 본 것 같아 다행이다. 고민해 보니 어떠했느냐? 답이 있을 것 같더냐?”

“아니요.”

“……솔직히 못 찾겠어요.”

“이건 애초에 답이 없습니다.”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건 답이 없는 문제다. 하지만 너희는 알아야 한다. 우리는 답이 없다 말해 버리면 그만이지만 장문인께서는, 그리고 청명이 놈은 그 없는 답을 어떻게든 찾아내야 한다.”

결정을 내리는 이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해 본 이들이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끄덕였다.

“그러니 오늘, 무슨 답을 듣더라도 결코 원망하거나 그 선택이 잘못되었다 힐난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예, 사숙.”

“그러겠습니다.”

“저희가 무슨 자격으로요.”

“그래.”

그걸로 됐다는 듯 백천이 몸을 돌렸다. 그의 눈빛이 여느 때보다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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