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5화. 대답도 못 해 주는 양반이. (5)
뜬금없는 말이었다. 적어도 청명의 입장에서는. 그러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백천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뭔 뻔한 소리를 하고 있어. 그럼 내가 사람이지.”
“아닌 것 같을 때가 있어서.”
“지금 욕하는 거지?”
백천이 피식 웃었다.
‘이상하게 들리기도 하겠지.’
서로가 알고 있으니까.
청명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인간으로서의 청명은 결점투성이다.
성격이 모났고, 외골수에,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너무 과해서 때때로 실수도 저지른다. 아는 것은 확실하게 알지만, 자신이 잘 모르는 분야에 관해서는 어처구니없을 만큼 무지하다. 누군가를 몰아붙일 때 사정을봐줄 줄 모르고, 제 생각과 어긋난 무언가를 인정하는 방법도 모른다.
그렇기에 청명은 백천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백천의 입장은 전혀 달랐다.
그런 문제가 있으니 청명은 완벽하지 않은 인간인가?백천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성격이 더럽지만, 그 성격 때문에 적을 만들지는 않는다. 모르는 것이 많지만, 그렇기에 자신이 잘할 수 없는 일들은 완벽하게 남에게 맡기고 전적으로 신뢰한다. 누군가를 과하게 몰아붙이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어느 누구도 그 때문에 포기하거나 돌아서지 않았다.
제 생각과 다른 것들을 인정하지 않지만, 결과적으로는 제 생각이 옳았음을 증명해 왔다.전혀 완벽하지 않지만, 결과적으로는 완벽하다. 그러니 결국 그 결과를 이끌어 내는 청명이라는 사람도 완벽한 게 아닐까? 세상이 말하는 완벽과는 그 형태가 다를지라도 말이다.
그렇기에 때로는 버거웠다. 저 완벽함을 좇는 게 말이다. 그런데…….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너도 사람이구나 하고.”
“실없기는.”
청명도 그 이상은 묻지 않았다. 백천은 청명이 내려놓은 술병을 잡아 다시 들이켰다. 청명이 어이없다는 듯 그 모습을 보다 물었다.
“뭐 날 잡았어? 평소에는 술도 잘 안 먹는 양반이.”
“그런 날도 있는 거지.”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던…….”
실없이 농담하던 청명이 뭔가 신경이 쓰였는지 말을 끊고 입을 닫았다. 눈가를 살짝 꿈틀거린 백천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걱정 마라. 너보다 오래 살 테니까.”
“……그럴지도.”
백천은 슬쩍 청명의 안색을 살폈다.
어쩌면 청명은 자신이 방금 무슨 대답을 했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냥 할 말이 없으니 적당히 아무 말이나 둘러대듯 던진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때야말로 사람의 본심이 나오는 법. 몇 해 전의 청명이었다면 절대 저 짧은 말로 대충 긍정하고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잊고 있었다. 아니, 무시하고 있었다는 말이 좀 더 맞을지도 모른다.
청명은 결코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아니, 설사 완벽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전능(全能)’하지는 않다. 그도 사람인 이상 한계는 있고, 결국에는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존재한다.
‘잊을 수밖에 없었지.’
이번에야말로 저놈 혼자서는 어쩔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할 때마다, 저 망할 놈은 번번이 그 예상이 틀렸음을 증명했으니까.
하지만 백천은 기억해야 했다.
많은 걸 감당할 수 있는 인간이라고 해서 버겁지 않은 것은 아님을. 단련한다고 힘겨움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칼에 많이 베여 봤다고 해서 칼에 베이는 아픔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치료해도 흉터는 남고, 고통에 신음했던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기억해야 했다. 다른 누구는 몰라도 백천만은 기억해야 했다.백천이 말이 없으니 청명이 물었다.
“안 물어봐?”
“뭘?”“그러려고 온 거 아냐?”
“그러니까 뭘?”
청명이 영 모르겠다는 눈으로 백천을 바라본다.
“그 망할 중대가리 새끼한테 내가 무슨 대답을 할지 물어보려고 한 거 아니냐고.”
“안 궁금해.”
“……응?”
“안 궁금하다고.”
백천이 심드렁하게 대답하고는 술을 들이켰다. 청명이 미간을 찌푸렸다.
“안 궁금하다고?”
백천이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말했다.
“기다리면 알아서 답이 나올 건데, 그거 먼저 듣는다고 뭐가 달라지냐?”
“아니, 설득하려고 할 수도 있잖아.”
“내가 설득하면 네가 들어?”
“안 듣지.”
“그런데 뭘 설득을 해?”
“그러네?”
청명이 깨달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더니 이내 더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왜 왔는데?”
“……참 웃기지 않아.”
“뭐가?”
“나는 네 사숙이고, 너는 내 사질이지. 우리는 한 문파에서 벌써 몇 해를 매일같이 얼굴을 보고 지낸 사이다.”
“……그게 왜?”
“그런데도 옆에 앉아서 같이 술을 마시는 데 굳이 용건과 이유가 필요하다는 게 말이야.”
청명은 미심쩍은 얼굴로 백천을 뚫어지게 보았다.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탐색이라도 하겠다는 듯. 내심으로는 한 번도 이런 말을 들은 적 없어서 당황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백천은 그저 심드렁했다.
“그냥 마시면 되는 거지, 무슨 이유가 필요하냐.”
그의 검지가 구름에 반쯤 가려진 달을 가리켰다.
“저기 봐라. 달도 예쁘네.”
“엄청 우중충한데?”
“그게 예쁜 거지.”
“……사숙. 저녁에 뭐 잘못 먹었어?”
백천이 나직이 웃었다.
이제껏 몰랐던. 아니, 어쩌면 굳이 느낄 필요 없었던 괴리가 그를 뒤흔들었다.
마지막으로 이놈과 사담을 나눈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그런 적이 있긴 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아니, 그럼 왜 왔냐고.”
“하…….”
백천이 귀찮다는 듯 얼굴을 살짝 일그러뜨렸다.
“나이도 어린 새끼가 혼자 달 보면서 청승이나 떨고 있길래 불쌍해서 와 줬다. 그래도 내가 형이니까.”
“……진짜 뭘 잘못 처먹었나? 그러다 맞으면 안 아프대?”
“어차피 안 그래도 때리잖아, 새끼야.”
“그건 그렇지.”
청명이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백천을 바라보다가 슬쩍 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
백천이 들고 있던 술병을 내밀었다.
불쑥 들이밀어진 병을 빤히 보던 청명이 느린 손길로 받아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가에 대고 기울였다.
잠시 달을 보던 백천이 입을 뗐다.
“그런데…….”
“안 물어본다며.”
“물어보는 거 아냐. 그냥 궁금해서.”
“근데 진짜 오늘 정신을 놓고 왔나. 우린 그런 걸 ‘물어본다’라고 한다고!”
백천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내젓고는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냐?”
“응?”
“이유는 알아. 대충 알지. 네가 뭘 겁내고 있는지. 그런데…… 그건 세상 모두가 감당해야 할 일이지, 너 혼자 아득바득대야 할 일은 아니잖아.”
“…….”
“네가 걱정하는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고 해도, 세상 누구도 너를 원망하지는 않을 거다. 그런데 너는 왜 그 모든 걸 당연히 네가 감당해야 하는 것처럼 굴고 있냐?”
그 질문이 청명이 피식 웃어 버렸다. 하지만 드리웠던 웃음기가 점점 얼굴에서 걷혀 갔다.
“……글쎄.”
당연히 그가 해야 하는 일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과거에도 청명은 최선을 다했다. 그 방법이 완전히 맞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그가 한 일들이 결과적으로 세상을 구했다는 것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왜 그는 백천의 말대로 무슨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이 모든 것들을 홀로 감당하려 하고 있는 걸까? 나는 할 만큼 했으니, 남은 것들은 너희가 알아서 하라고 드러누워 버려도 누구 하나 손가락질하지 않을 텐데.
심지어 청문이 지켜보고 있다고 해도 그를 힐난하지는 못할 텐데…….
“글쎄…….”
했던 말을 다시 한번 뇌까린 청명이 이내 궁색한 말을 주워섬겼다.
“나도 잘 모르겠어.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그러냐?”
“그냥, 음……. 그냥 그런 것 같아.”
백천이 청명의 옆얼굴을 말없이 응시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또 그 얼굴이다.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저 눈빛.
“할 사람이 없잖아. 내가 아니면.”
“…….”
“그냥 뭐……. 음.”
청명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사실 나는 뭐 대단히 책임감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누구를 끌고 가는 걸 즐기는 사람도 아니야. 그냥 나는 아무것도 안 하면서, 남 하는 짓에 딴죽이나 걸어 대는 그런 인간이거든? 그러다가 남는 시간에 술이나 퍼먹고.”
“쓰레기네.”
“…….”
잠깐 말문이 막혔던 청명이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이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과거의청명은 정말 그랬으니까. 마교가 발호하기 전 평화로웠던 세상에서, 청명은 화산에서 가장 하는 것 없이 굴러다니는 한량이었다.
그때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편안하고 즐거웠던 시절이기도 하고.
그런데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아무튼 뭐 내가 이러고 싶어서 이러고 있는 게 아냐.”
“그럼 안 하면 되잖아.”
“근데 그게 쉽질 않네.”
“왜?”
“아무도 없잖아.”
청명이 심드렁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나 아니면 할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 내가 안 하고 내팽개친다고 누가 대신 해 주는 것도 아니고, 누가 나만큼 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
“나도 못 하겠다고 손을 놓아 버리면 망할 게 뻔히 보이는데, 그걸 그냥 보고 있기도 쉽지 않고.”
“…….”
“그러다 보니 하나하나 하는 일이 늘어난 것뿐이야.”
시간이 조금 더 있다면, 어쩌면 지금도 가끔은 화산에서 즐겁기만 했을지도 모른다. 사형제들과 뒤엉켜 낄낄 웃어 대고, 서로 괴롭히고, 그렇게 시간과 함께 많은 것을 채워 나갔겠지.
그 시간이 부족해서 이리된 것을 누굴 원망하겠는가?
“그렇다고 뭐, 누가 대신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이건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인 거지.”
대신해 줘야 할 이들은 이미 이곳에 없으니까.
청명은 그리 생각했다.
어쩌면 과거 그가 나눠 들었어야 했던 것들을 나누어 짊어지지 못했기에, 지금 이 모든 것을 온전히 홀로 감당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고.
그렇다면 이 모든 것들은 그가 당연히 받아들이고 감내해야 한다고.
“그러니까 괜히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마. 할 만큼 해 보고도 안 된다 싶으면 나도 다 집어던져 버릴 거야. 아직은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안 드는 것뿐이고.”
주절대다 보니 뭔가 쓸데없는 이야기를 해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명은 괜히 머쓱하게 헛기침했다.
“쯧. 나도 영 맛이 갔네. 동룡이한테 이런 이야기나 하고 있고.”
“죽는다, 진짜.”
청명이 피식 웃고는 술을 다시 들이켰다. 평소처럼 꿀꺽꿀꺽 양껏 들이켜고 입가를 소매로 훔쳤다. 표정이 조금 더 밝아졌고, 목소리도 아까보단 조금쯤 높아졌다.
“걱정하지 마. 곧 괜찮아지니까.”
“응?”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때도 있는 거지. 그냥 이것저것 생각할 게 좀 많아서 그래.”
“…….”
“하루 정도 지나면 뭔가 보이겠지. 그럼 평소대로 돌아가는 것뿐이야. 나를 걱정하기에 백 년은 이르다, 동룡아.”
“지랄한다.”
백천이 피식 웃었다.
둘 사이에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지나치게 무겁지는 않은, 그저 고적한 침묵이.
달도, 밤하늘도, 구름도 아닌, 그 너머의 무언가를 멍하니 바라보던 백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아니, 우리가 조금 더 강했더라면. 그랬으면 네가 하는 고민이 조금은 줄어들었을까?”
서로를 바라보지 않는 두 사람 사이로, 그 조용한 목소리가 오래도록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