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4화. 대답도 못 해 주는 양반이. (4)
청명은 말없이 하늘에 뜬 달을 바라보았다.
무심하도록 하얗기만 한 달에 청문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익숙하고도 그리운 얼굴이 그를 보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웃기는…….”
청명이 입술을 삐죽였다.
“대답도 못 해 주는 양반이.”
못내 어쩔 수 없는 원망. 그리고 어쩔 수 없는 그리움.
이제 더는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럴 때는 어찌할 도리도 없이 저 얼굴을 떠올리게 되었다.
달과 겹친 청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청명이 살짝 높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니까.”
입술 새로 웃음이 피식 새어 나왔다.
“내가 나이가 몇인데, 그 대머리가 주절댄 말을 듣고 충격을 받겠어요. 뭐라 하든 귓등으로도 안 듣지. 내가 어디 입만 산 놈들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고.”
대수롭지 않게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조금 힘빠진 목소리로 뇌까렸다.
“그냥…….”
조금 망설이는 것처럼 뜸을 들인 그가 고개를 들었다. 구름과 달이 없는, 한없이 검은 밤하늘을 보았다.
“그 대머리가 한 말 때문이 아니라…… 내 상황을 다시 돌이켜 본 것뿐이에요. 될 수 있으면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다른 이들의 짐작과는 달리, 법정이 한 말 중에 청명을 가장 크게 흔든 것은 ‘자신은 가장 뒤에 있어야 한다.’라는 말이었다.
그 말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명도 바보가 아니다. 모든 것을 이끄는 이는 가장 안전한 곳에 있어야 한다. 그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다. 그렇기에 과거 마교와의 전쟁에서도 가급적 청문만은 절대 전장에 나서지 못하게 하지 않았던가?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의 청명은 화산 전체를 이끌 만한 도량이 되지 못했다. 청명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이미 청진을 잃은 상황에서 청문마저 잃는다면 화산은 구심점을 잃은 채로 제 전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래. 이끄는 이라는 건 그만큼 중요하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청명은 지금껏 최전선에 서 왔다. 그리고 무모할 정도의 싸움을 반복해 왔다. 가진 경험에 대한 확고한 자신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또한 청명은 알고 있다. 이전 삶에서부터 지금의 삶까지 이어진 ‘천운’이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님을 말이다.
지금과 같은 방식을 고수한다면 언젠가 법정의 말대로 화산의 제자들은 청명의 차게 식은 시신을 두 눈으로 목격하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뒤에 화산을 기다리는 건 아마파멸이겠지. 누구 하나 피해 갈 수 없는 완전한 파멸.
“내가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청명이 억지로 가벼운 척 헛웃음을 지었다.
파멸이라는 말을 떠올린 게 어처구니없다. 청명 하나가 노력해 봐야 몇 사람의 역할이나 할 수 있겠는가? 지금 화산의 애송이들이 온전히 성장하기만 하면, 청명 따위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그게 맞지.”
청명이 고개를 젖힌 채 힘없이 중얼거렸다.
정말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저 백천이 제대로 된 장문인이 되어서 과거 청문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다면, 저 윤종이 제대로 된 도인이 되어 화산에 부족했던 도(道)를 이끌어 줄 수 있다면.
조걸이 화산의 돌격대장이 되어 주고, 유이설이 화산이 추구할 검의 교본이 되고, 당소소가 화산의 제자들에게 엄한 스승이 되어 줄 수만 있다면.
그 외의 다른 제자들도 모두 제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면, 화산은 청문이 이끌던 당시보다 훨씬 더 강하고 대단한 문파가 될 것이다.
오랜 시간 저들을 지켜본 청명이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물론 항상 애송이라 무시하고 구박했지만, 저들은 정말 훌륭한 인재들이다. 예전의 청명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래. 분명…… 분명 그렇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더 안타깝다.
“야속하죠, 장문사형?”
청명이 허탈하게 웃었다.
“십 년만 더 있으면…… 정말 그렇게 만들 수 있는데. 내가 이끌어 주지 않아도, 저놈들이 알아서 거기까지 갈 수 있을 텐데.”
세상은 언제나 그래 왔듯, 그들에게 충분한 시간을 내어 주지 않는다.
청명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이 세상으로 돌아온 후부터 한시도 쉬지 않고 화산을 이끌어 왔다. 조금 더 높은 곳으로, 조금이라도 더 높은 곳으로.하지만 결국은 제때 닿지 못했다.
만약 십 년 뒤였다면, 청명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최전선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싸울 것이다. 그가 뒤에서 해야 할 역할을 해 줄 이들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래서는 안 된다. 지금 청명의 죽음은 화산 전체에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상실이 될 테니까.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서는 청명이 최전선에 서서는 안 된다.그래. 더 살리기 위해서는…….
“참 공교롭네.”
청명이 쓰게 웃었다. 질문은 그가 했다. 해남을 어찌할 것이냐고. 그건 법정에게 있어 대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이어야 했다.
하지만 법정이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질문은 오히려 청명에게 되돌아왔다.
소림이 해남을 통해 자신이 논하는 대의를 증명해야 하는 것처럼 청명 역시 이제는 자신이 말하는 협의가 무엇인지를 증명해야 할 것이다.
언젠가 청명은 반드시 직면할 것이다.
화산의 제자 하나를 구하기 위해선 다른 모든 제자를 희생시켜야 할지도 모르는 그런 상황에.
그럴 때 그는 어찌할 것인가?
극단적으로 말해, 함정에 빠진 백천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화산 전체를 마교의 본진에 돌격시키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면…… 대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오면 안 된다고 피를 토하며 소리치는 백천의 말을 무시하고 모두와 함께 목숨을 내던질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고막을 찢고, 눈을 찌르며 팔 하나를 끊어 내는 심정으로 몸을 돌릴 것인가.
“……사형.”
청명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댁도 참 대단한 양반이네. 어떻게 다가갔다 싶으면 또 멀어져 있고…….”
청문을 뛰어넘는다는 생각은 애초에 안 했다. 하지만 그래도 이제는 과거 그가 느끼고 고민했던 것들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고는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럴 때마다 새삼 알게 된다. 과거 청문이 어떤 것들을 헤쳐 나갔는지 말이다.
“화산의 검이라…….”
청명이 쿡쿡대며 웃었다.
정말 그럴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 검이란 생각하지 않고, 그저 휘두르면 되는 것이니까.
청명이 원하는 자리는 바로 그런 것이었다. 굳이 스스로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 그저 기분 내키는 대로 싸우고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자리.
그러나 그는 안다.
그는 화산의 검이 될 수 없다. 언젠가는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온전한 검이 될 수 없다. 화산의 누구도 그를 마음껏 휘둘러 주지 못할 테니까. 청명이라는 검을 제대로 들어 올리지도 못할 테니까.
그렇다면 스스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제 의지와 제 자아로 생각하고 선택해야 한다.
“장문사형.”
느리게 불러 본 청명이 나직이 소리 내어 웃었다.
“미안해요. 내가 그때, 주제도 모르고…….”
그가 청진을 구하러 가려 했을 때, 청문은 그를 막아섰다. 그때 청명은 감정을 숨기지 않고 있는 대로 청문에게 화를 쏟아 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그게 얼마나 주제넘은 짓이었는지.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이가, 그 선택에 대한 대가를 온전히 받아들여야 하는 이에게 감히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됐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사형.”
청명의 멍한 시선이 달로 향했다.
“선택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는데, 뭘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미루고 미뤘는데 결국에는 여기까지 오네요.”
화산의 제자들을 더 강하게 키워 내면, 어떻게든 적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강하게 만들면 그 부조리한 선택을 강요받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믿었다.
사형들에게 다가온 죽음을 직면하지 못한다고 화를 내 왔지만, 그 누구보다 그들이 직면한 죽음을 외면하고 있었던 건 다름 아닌 청명이었다.
죽음을 너무 많이 봐서, 그래서 뼈저리게 안다. 함께하던 이들의 갑작스러운 부재(不在)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그래서 선택할 자신이 없는 것이다.
법정처럼 더 많은 이를 살리는 것이 옳으니, 사사로운 감정일랑 접어 두고 버릴 것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고 말할 수 없고, 그렇다고 모두를 죽음 한복판으로 끌고 가서 한 사람을 구해 낸 후 훌륭했다 웃을 수도 없다.
정말 그런 상황을 맞닥뜨린다면, 청명은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저 손을 놓고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주저앉아 버리겠지.
그리고 그게 언젠가 화산을 파멸로 이끌 것이다. 청명의 주저가, 청명의 우유부단함이 화산을 더 이상 살아날 방도가 없는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 것이다.
“더 살다 보면 어른이 될 줄 알았거든요.”
이미 그는 충분할 정도로 살았다. 아니, 충분하다 못해 과하도록 살았다. 이미 끊어졌어야 할 목숨을 끈질기도록 연명해 왔다.
“그런데…… 애초에 어른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정해져 있나 봐요. 나는 그게 안 되는 인간이었고.”
이럴 때 청문이 곁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가 내릴 수 없는 선택을 내려 주고, 앞에서 짐을 져 주는 사람이 이곳에 있었다면. 하다못해 청문이 아니라 청진이라도 이곳에 있어 줬다면…….
“욕심이지.”
청명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없는 이들을 그리워해 봐야 달라질 건 없다. 그들이 그립다는 건 지금 청명이 그만큼이나 나약해져 있다는 증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청명은 슬쩍 제 손에 잡힌 술병을 내려다보았다. 그 안에 가득 찬, 한 방울도 줄어들지 않은 술을 빤히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잔은 가져왔어?”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청명은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나는 잔을 안 가져왔거든.”
저벅. 저벅.
익숙한 발소리와 함께 다가온 백천이 털썩 그의 옆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그러더니 청명의 손에 들린 술병을 낚아채듯 빼앗아 갔다.
“잔에 따라 마시지도 않는 놈이 새삼스럽게.”
백천이 술병을 기울여 술을 단숨에 벌컥벌컥 들이켰다. 청명은 말없이 그런 그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크.”
백천이 인상을 쓰며 술병을 내렸다.
“독하네.”
“그래야 술이지.”
청명이 백천이 도로 내민 술병을 건네받았다. 하지만 평소와는 달리 입에 대지 않고 그저 아래에 내려놓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조용히 보던 백천이 시선을 앞으로 던지며 입을 열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냐?”
“그냥.”
“그래?”
하늘에 뜬 달을 물끄러미 보던 백천이 천천히 입을 뗐다.“안심했다.”
“뭘?”
“너도…….”
흘러나온 백천의 목소리는 그저 담담했다. 하지만 어쩐지 알 수 없는 울림을 담고 있었다.
“너도 사람이구나.”
장강 위에 뜬 달이, 밀려온 파도에 이지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