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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173화 (1,174/1,567)

1173화. 대답도 못 해 주는 양반이. (3)

모두의 표정이 각기 달랐다.

조걸의 얼굴은 일그러졌고, 혜연은 살짝 하얘진 얼굴로 조용히 불호를 뇌까렸다.

당소소는 툭 치면 울 것 같은 표정이었고, 그 옆에 서 있는 유이설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눈빛만은 평소보다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가장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운 표정의 윤종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항상 이게 발목을 잡는구나.’

이럴 때마다 세상은 배운 대로만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협의를 숭상하라 배웠다. 정파에 몸을 담고 있는 모두가 그리 배울 것이다. 목숨을 내던져서라도 협의를 지키는 것이 검을 든 이가 당연히 걸어야 할 길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또 배운다. 목숨보다 사형제들을 아껴야 한다고.

그 말들은 하나하나 틀린 게 없다.

하지만…… 그들이 그토록 지키고자 하는 협의가 자신보다 더 아껴야 할 사형제들마저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내몬다면, 대체 무엇을 위해 협의를 지켜야 하는 것인가.

“……너무 극단적인 말씀이신데.”

조걸이 퉁명스레 내뱉자 백천이 고개를 저었다.

“너도 느끼고 있었잖느냐?”

“…….”

“솔직히 이런 생각을 해 보지 않은 이는 이곳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백천이 고개를 들었다. 이 순간만은 누구도 백천을 차마 마주 보지 못했다. 지은 죄도 없건만, 무언가 찝찝한 사람처럼 슬그머니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나도 때때로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껏 주저 없이 협의를 논할 수 있었던 것은 잃어 보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아니…… 사숙. 화산만큼 잃은 곳이 어디에 있다고요?”

“네가 잃었느냐?”

“예?”

“화산이 잃은 것들이 네가 가지고 있던 것들이냐?”

조걸이 그 말에 입을 닫았다. 그런 그를 빤히 보던 백천이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화산의 문도다. 그렇기에 화산이 겪은 일을 스스로 겪은 일처럼 생각하지. 하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잃은 것은 화산이었지, 우리가 아니다. 객관적으로 생각해 봐라. 우리가 화산에 입문하여 잃은 것이 있더냐?”

조걸이 고개를 푹 숙였다.

잃은 것?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애초에 그들이 입문할 당시부터 화산은 더 망할 구석이 없을 정도로 망해 있었고, 청명이 놈이 들어온 뒤부터는 말도 안 되는 기세로 발전해 왔다.

역설적으로 그들은 가장 많은 걸 잃은 문파에 입문했기에, 가장 많은 것을 얻은 이들이었다.

“맞아 보지 않은 이는 얻어맞는 아픔을 모른다. 칼에 베여 보지 않은 이는 그 가벼운 날붙이가 얼마나 두려운지 모른다. 그러니…… 잃어 본 적이 없는 우리가 잃은 이들의 고통을 완전히 알 리가 없지.

”백천이 피식 웃었다.“

우스운 일 아니더냐. 한 번도 칼에 베여 보지 않은 이가 나는 칼 따위는 무섭지 않다고,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베일 수 있다고 말한다면 너희는 뭐라 생각하겠느냐?”

조걸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말해 무엇 하겠는가? 칼에 베이는 아픔도 모르는 이가 허세를 떤다고 비웃어 댔겠지.“

그런 생각이 드는구나. 어쩌면 지금껏 우리가 당당하게 외쳐 온 것들이 어쩌면 칼에 베여 보지 않는 이들의 허세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잃어 보지 않았기에, 잃는 것도 감수하겠다고 소리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백천이 가만히 눈을 내리감았다. 그들은 언제나 목숨을 걸었다. 언제나 믿는 것을 위해 싸워 왔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나는 꽤 비겁한 인간이었던 모양이다.”

“사숙…….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항주로 갈 때, 내 마음에는 일말의 주저도 없었다. 확신만이 가득했지. 나는 그게 화산의 제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당연한 일 아닙니까. 그게 어떻게 비겁함이 됩니까?”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든단 말이다. 과연 그때 내 앞에 청명이가 없었다면…….”

“…….”“그놈 없이 우리만 항주로 향해야 했다면, 나는 정말 주저 없이 걸음을 뗄 수 있었을까? 너희는 그럴 수 있었을 것 같으냐?”

윤종이 고개를 내저었다.

“사숙. 그건 의미 없는 가정입니다. 협의란 불가능한 것에 당연히 도전하고 몸을 던져야 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그래?”

백천의 입꼬리가 살짝 뒤틀렸다.

“이길 수 있을 때는 이득과 손해를 따지지 않고 싸우는 것이 협의라 하더니, 이길 수 없을 때는 무모한 싸움을 하지 않는 것이 협의가 되는구나.”

“…….”

“다시 묻지. 너희는 정말 그놈 없이 항주로 갈 수 있었느냐? 그게 옳다고 믿으니, 제 목숨과 옆에 있는 사형제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협의를 실천하러 갈 수 있었을 것 같으냐?”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다소 긴 침묵이 지독하게 이어졌다.묵묵히 대답을 기다리던 백천이 무겁게 입을 뗐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외쳐 온 협의는 결국 잃어 보지 않은 자의 객기……. 아니, 잃을 리 없는 자의 비겁에 불과하겠지. 등 뒤에 아버지를 세운 세 살짜리 아이가 나는 열 살짜리 형의 불의에 참지 않는 당당한 남아라고 외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아미타불…….”

짧게 불호를 왼 혜연이 침중한 눈으로 백천을 바라보았다.

“백천 시주.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인정하자는 겁니다. 그리고 생각해 보자는 겁니다.”

“…….”

“지금 와 돌이켜 보면 우리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청명이 놈의 그늘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청명이 놈이 없는 곳에서 싸워 본 경험조차 없습니다.

”혜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새삼 알게 되었다. 지금껏 그들이 해 온 전투가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것이었는지.

“지난 몇 해 간 화산은 수많은 격전을 치렀고, 섬서의 작은 문파에서 천우맹의 수장 자리까지 올랐다.”

“…….”

“그런데 그 많은 것을 겪으면서 화산은 단 한 번도 전력을 둘로 나눠 본 적이 없다. 심지어 작은 별동대를 운용해 본 적도 없고, 한 전장 안에서 병진을 양쪽으로 나눠 본 적도 없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느냐?”

유이설이 입술을 잘근 깨문다. 그 표정을 본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놈은 우리가 제 눈 밖에서 싸우게 둔 적이 없다. 그 어떤 전장이든 화산의 모든 이들을 자신이 보호할 수 있는 영역 안에 두려고 했지.”

“…….”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을 것이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

모두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천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잘난 듯이 늘어놓았지만, 나라고 해서 무슨 뾰족한 답이 있는 건 아니다. 이건 우리 모두 생각해 봐야 할 문제겠지. 그리고 모든 것의 시작은 자기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부터가 아니더냐?”

“……맞습니다, 사숙.”

“협의를 지키는 것이 옳은가? 해남을 버리고라도 더 많은 이들을 구하는 것이 옳은가? 생면부지의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이 옳은가? 정말 나는 협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이 두렵지 않은가?”

백천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두서없이 나열했다. 굳이 정리할 필요가 없다. 하나로 정리해 답을 찾아야 하는 문제가 아니니까.

“모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우선시하는 것이 다르겠지. 하지만…… 그래. 이 답을 찾는 방법은 하나뿐인 것 같구나.”

백천의 목소리는 한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언젠가 우리가 전장의 한가운데에 섰을 때, 누군가는 반드시 사지로 가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반드시.”

“…….”

“그때 중요한 건 너희가 사지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는가가 아니다. 네 옆에 있는 동료가 사지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잡지 않고 보내 줄 수 있어야 너희가 지금껏 내세운 협의가 진실이 되는 거겠지.”

윤종의 어깨가 떨려 왔다. 저건 너무도 가혹한 말이다.

“화산이 정말 협의라는 가치를 좇는 곳이라면, 제 목숨만이 아닌, 화산 문도들의 목숨조차 협의를 위해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내가 가면 된다. 다른 이들보다 내가 먼저 죽으면 된다는 말은 그저 선택을 피하기 위한 도피에 지나지 않아.”

“……사숙.”

“너희는 정말 그럴 수 있느냐?”

이번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고민해 보자꾸나. 우리가 정말 무엇을 하려 했는지. 정말 이게 유일한 길인지. 그게 아니면 지금이라도 다른 길을 선택해야 하는지.”

조걸은 입술을 더 꽉 깨물었다. 피가 살짝 배어날 정도였다. 늘 담담하던 유이설의 손끝마저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모두가 동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럴 수 없다면, 차라리 방장의 말을 따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적어도 화산은 남들만큼 피를 흘리고, 남들과 같은 결과를 맞이할 수 있을 테니까. 협의란 이름으로 더 가혹한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백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은 담담했다. 하지만 백천을 아는 이들은 알 수 있었다. 그 담담한 표정 아래 지금껏 그에게서 찾아볼 수 없던 냉엄함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고민해 보거라. 너희가 내린 결론을 내가 위에 전하겠다.”

백천이 돌아서서 멀어지려 하자 윤종이 백천을 불러 잡았다.

“사숙.”

백천이 발이 우뚝 멎었다. 윤종이 물었다.

“사숙께서는 답을 정하셨습니까?”

“그게 의미가 있느냐?”

“…….”

“옳고 그른 것은 자기가 정하는 것이다. 남에게 묻지 마라. 서로 상의할 것도 없다. 적어도 내 목숨을 어떻게 쓸 것인가 정도는 자기 자신에게 묻거라.

”윤종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말없이 윤종을 돌아보던 백천은 미련 없이 그들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 자리에 남겨져 한참 동안 석상처럼 우두커니 서 있던 이들은 짧게 서로를 보다가 말없이 몸을 돌려 각자의 처소로 향했다.

그들의 어깨에 더없이 무거운 달빛이 내려앉고 있었다.

백천의 느릿한 발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렸다.

‘어렵구나.’

그러지 않으려 해도 자꾸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려워…….”

몇 해 전이었다면 이런 고민 같은 건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강해지는 것만 목표로 하면 됐었고, 화산을 부흥시키는 것에만 신경 쓰면 됐으니까.

저 모자란 사매, 사질 놈들과 우당탕탕 떠들어 대면서 노력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세상은 그들에게 선택을 강요한다. 그 힘에 걸맞은 무게를 짊어지라고 소리친다. 아직 많은 짐을 진 것도 아니건만, 벌써 어깨가 너무 무겁다. 짓눌려 사라져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런 거였구나.’

강대한 적과 싸운다. 그 단순한 말에 이렇게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지 이제까지는 미처 이해하지 못했다.

그 말은 그들이 지금껏 지켜 온 모든 것. 그러니까 삶과 관계, 가치관, 그 모든 것들과도 싸운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어떤 싸움이었던 걸까?’

지금의 그들보다 더 가혹한 싸움을 했던 백 년 전의 선조들은 대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던 걸까? 지금 그들이 백천의 곁에 있다면 과연 그에게 무엇을 전하려 했을까?

백천이 달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시간은 너무도 흘렀고, 꼭 그만큼 세상도 변했다. 백 년 전의 목소리 같은 건 들을 길도 없다. 하지만 저 달만은 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저곳에 떠 있을…….

문득 달을 바라보던 백천의 얼굴이 멍해졌다. 아니, 사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달 아래다.

달을 반쯤 품은 처마 위.

한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달과 반쯤 겹쳐진, 조금 서글퍼 보이는 어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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