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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172화 (1,173/1,567)

1172화. 대답도 못 해 주는 양반이. (2)

장원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강변, 익숙한 얼굴들이 모여 있다. 백천을 비롯한 오검과 혜연까지. 어쩌면 지금의 청명과 가장 가까운 이들.

그들은 조금 거리를 두고 앉은 채 멍한 얼굴로 흘러가는 강물을 보았다.

고요하다.

풀벌레 우는 소리와 장강의 파도가 강변으로 밀려드는 소리만이 조용하게 번져 나갔다.

이들이 모인 곳은 언제나 시끌벅적했다. 그래서 지금의 고요가 더욱 낯설고 어색할지도 모른다.

오가는 파도를 멍하게 바라보던 윤종이 고개를 돌려 다른 이들의 표정을 살폈다.

‘무겁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무겁게 굳어 있다기보다는 다들 조금 멍해 보였다.

“사형.”

“……응?”

그의 시선을 느낀 모양으로 조걸이 슬쩍 윤종에게 시선을 주며 입을 뗐다.

“사형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방장의 말 말이냐?”

“예.”

윤종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떻게 생각하냐니. 평소 같으면 그리 어려울 게 없는 질문이겠으나, 이 순간만큼은 참 대답하기 껄끄러웠다. 하지만 적당히 얼버무리고 묻어 둘 만한 질문도 아니다.

“글쎄, 모르겠구나.”

한숨처럼 나직이 말한 윤종이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논리에는 그른 것이 없었잖으냐?”

“아니,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윤종의 말에 조걸이 별안간 언성을 높였다.

“아니……. 그럴 거면 뭐 하러 물어보느냐. 네 맘대로 생각하면 되지.”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시니까 그러는 것 아닙니까! 그른 것이 없다니요!”

“……하면, 너는 방장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느냐?”

“사형도 아직 한참 멀었습니다!”

조걸이 혀를 차며 말했다.

“말에 논리가 있는가 없는가로 따지면 저 조정의 학사들이 어디 영 틀린 말 하겠습니까? 그만큼 배우고 시험까지 쳐서 들어간 양반들인데, 다들 논리에 맞는 말 하겠죠!”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이냐?”

“그런데도 저들끼리 제 말이 옳다. 내 말이 옳다 하며 싸워 대지 않습니까! 논리가 있다 해서 다 괜찮은 게 아니라는 겁니다. 뭐가 더 옳은가가 중요하지요. 게다가 애초에 못 믿을 사람 입에서 나온 말인데 그게 옳건, 틀리건 무슨 상관입니까?”

“…….”

“말의 논리보다 중요한 건 사람에 대한 신용과 신뢰입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배웠습니다. 애초에 방장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입니까?”

윤종이 떨떠름한 얼굴로 조걸을 물끄러미 보았다.

웬만해서는 조걸에게 논리로 밀릴 일 없던 윤종이지만, 이 말에는 그도 딱히 반박할 말이 없다. 법정을 신뢰할 수 없는 건 그도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걸아, 네 말도 틀린 건 아니다만…… 그렇다고 다 해결되는 게 아니잖느냐?”

“그럼 뭐가 문젭니까?”

“나 역시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게 문제겠지.”

조걸이 순간 말문이 막힌 듯 벙긋거리다 입술을 깨물었다.

“너는 그렇지 않더냐?”

“저는…….”

그는 뭔가 말하려다 말고 고개를 숙여 버렸다.

다시 조용해진 두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던 백천이 혜연에게 시선을 주었다.

“스님.”

“……말씀하시지요, 백천 시주.”

“하나 여쭙겠습니다. 그저 확인하고 싶은 것뿐이니 오해는 하지 말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혜연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이미 백천이 무엇을 물을지 알고 있다는 듯이.

“사람의 마음이란 들여다보이는 것이 아니니, 곁에서 지켜보았다고 해서 다 알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제 느낌에는 방장께서 하신 말씀에 거짓은 없어 보였습니다.”

“……그렇군요.”

백천이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딱히 확인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방장이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다. 천우맹을 병합한 뒤, 그가 한 말이 거짓이었다는 게 밝혀진다면,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반발을 감당해야 할 테니까.

그때는 명분과 실리, 그 모든 것을 잃어야 할 것이다. 어쩌면 구파일방이 가진 주도권마저 천우맹에 내어 줘야 할지도 모른다. 소림의 방장쯤 되는 이가 제 살 깎아 먹는 짓을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저기, 사숙.”

“……그래.”

당소소가 살짝 백천의 눈치를 살폈다. 그 표정을 본 백천은 괜히 속이 쓰려 오는 것을 느꼈다. 당소소가 저런 표정을 짓는 건 정말 드물고 낯선 일이니까.

“사숙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는데…… 저는 방장께서 하신 제안이 그렇게 나빠 보이지는 않아요.”

“소소야!”

조걸이 큰 소리를 내자 윤종이 엄한 눈으로 그를 제지했다.

“이…….”

조걸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런 그와 윤종의 눈치를 살핀 당소소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사실…… 방장과 구파일방을 신뢰할 수 없다는 조걸 사형의 말도 충분히 이해가 가고, 다른 분들이 지금껏 이끌어 온 천우맹을 내려놓기를 힘들어하는 것도 이해해요. 그런데…….”

“눈치 볼 것 없다. 편히 말하거라.”

“……예, 사숙.”

당소소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한들, 구파일방과 함께 싸우면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잖아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조걸이 다시 역정을 냈다.

“대체 뭘 믿고 그쪽에다 지휘권을 넘긴다는 건데! 그 법정 망할 중대가리 놈이 우리를 가장 위험한 곳에다 밀어 넣지 않는다는 보장은 있어? 그러고도 남을 놈이잖아!”

“걸아!”

백천이 엄하게 일갈했다.

“말조심해라.”

“……죄송합니다.”

눈을 내리감은 혜연의 얼굴을 본 조걸이 제 실수를 깨닫고 겸연쩍은 표정으로 사과했다. 같은 말을 하더라도 조금 더 혜연의 기분을 헤아려야 했다.

“내가 말을 조금 실수하긴 했는데, 어쨌든 솔직히 나는 그놈들이랑 같이 싸우면 더 위험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해.”

“더요?”

당소소가 조걸을 빤히 보았다.

“여기서 어떻게 더 위험해져요?”

“……응?”

“말해 봐요, 사형. 여기서 대체 어떻게 더 위험해지냐고요. 열 명이서 적밖에 없는 강남에 들어가서 마교와 싸우는 사람들이, 대체 뭘 하면 더 위험해질 수 있어요?”

“아니, 그건…….”

“예전부터 누누이 말했잖아요. 그러다 죽는다고. 청명 사형은 저러다 정말 죽어요. 그 사람은 제 몸이 헝겊 인형쯤 되는 줄 안다고요. 아무리 다쳐도 자고 나면 낫는 줄 알아요. 사람 몸이 그런 게 아닌데!”

다른 오검은 차마 당소소를 마주 보지 못했다.

“이번에야……. 네, 이번에야 전투가 한 번으로 끝났죠. 그런데 아시잖아요. 전쟁이 원래 그런 게 아니라는 걸. 그럼 사형은 또 죽을 만큼 몸을 혹사하고 제대로 쉬지도, 치료하지도 못하고 다시 전장에 나서겠죠. 그런데…….”

당소소가 다른 이들을 돌아보았다.

“그걸 누가 말릴 수 있어요?”

“…….”

“아니겠죠. 이번에도 안 그랬잖아요. 심지어 저도 못 말렸어요. 아니, 안 말렸죠. 같이 가겠다고 옆에서 바람이나 불어넣었죠.”

“소소야…….”

“지금 생각하면 제정신이었나 싶어요. 그러다 누구 하나 죽어 버리면 남은 평생 후회하고 살았을 텐데, 대체 무슨 배짱으로.”

백천은 보았다. 어떻게든 침착을 유지하려 애쓰는 당소소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는 걸 말이다.

‘그렇겠지.’

당소소는 의원이니 더할 것이다. 누구 하나가 죽으면 다른 이들보다 더 큰 책임을 느낄 테니까. 아무도 당소소에게 그런 것을 요구한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구파와 같이 싸우면 뭐가 달라져?”

“방장이면 적어도 사형을 죽을 곳으로 보내지는 않겠죠.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사형이 살아 있어야 하니까요. 그리고 걸레짝이 된 채로 전장에 또 나서려 하는 사형을 잡아 놓을 수 있겠죠.”

“방장이 왜?”

“그게 이득이니까!”

당소소가 성난 눈으로 조걸을 노려보았다. 조걸은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그쪽에 호의 같은 걸 바라는 게 아니에요. 바보가 아니면 알잖아요. 어떻게든 사형을 마지막까지 살려 두는 게 이득이라는 걸.”

“그럼 우리가 하면…….”

“말릴 수 있어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사형? 우리가 청명 사형을 말린다고요?”

“…….”

“머리에 피가 몰려서 먼저 뛰쳐나가지 않으면 다행이죠.”

당소소가 몸을 떨며 말했다.

“나는 무서워요, 사형. 이러다 정말 그 사람이 죽는 걸 볼까 봐…….”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조걸이 뭐라 말을 하려는 순간, 줄곧 침묵을 고수하던 유이설이 입을 열었다.

“청명이만 두고 할 이야기 아니야.”

“……예?”

“위험한 건 우리도 마찬가지.”

무덤덤한 유이설의 시선이 그곳에 있는 모두를 훑듯 스쳤다.

“지금껏 아무도 죽지 않은 게 더 이상할 정도로.”

“그건…….”

백천이 반쯤 열었던 입을 다시 닫았다. 답은 어차피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

“네, 사형. 청명이에요.”

“……그래. 그놈이 싸우는 와중에도 우릴 살려 내고 있었으니까.”

“그만큼 본인은 더 위험하죠.”

“그래, 그렇지.”

백천이 한탄하듯 짧게 탄식했다.

모두가 알고 있던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피부로 느끼지는 못했다.

방장의 말은 이들이 지금껏 외면하고 있던 현실을 눈앞에 끄집어냈다.

“그럼 앞으로 주먹질이라도 해서 말리면 될 일 아닙니까?”

조걸이 여전히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듯 강경했다.

“나약한 소리 적당히 하십시오. 화산이 여기까지 오는 데 누가 우릴 도와줬습니까? 그런데 이제 와 남에게 기대겠다고요? 진심으로 도울 이들이었으면 지금이 아니라 예전에 도왔을 겁니다!”

“걸아.”

“아뇨, 사숙! 제가 무식한 놈인 건 맞지만, 멍청한 놈은 아닙니다. 할 말은…….”

“사매 말대로 청명이 문제뿐만이 아니다.”

“……예?”

백천이 모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희는 정말 죽어도 괜찮으냐?”

“무슨 뻔한 소릴!”

“생각하고 대답해라.”

“…….”

백천의 목소리에 실린 무거움이 일순간 조걸의 입을 틀어막았다.

입술을 깨문 조걸을 조금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던 백천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항상 목숨을 걸어 왔다. 협의를 위해서 죽는 것이라면 두렵지 않다고 말해 왔지.”

“……예.”

윤종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솔직히 나도 의문이구나. 그게 정말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뜻을 관철하고 싶다는 나의 의지였는지, 아니면…… 그래도 나는 죽지 않을 것 같다는 안일함 속에 내뱉은 허세였는지 말이다.”

“사숙!”

“너희가 그렇다는 말이 아니다.”

“…….”

“내가 그렇다는 뜻이다. 내가…….”

백천이 잠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안에서 복잡하게 휘몰아치는 것들을 정리하려는 듯.

“천우맹이 어찌 되는가? 청명이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는 눈을 천천히 뜨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다음이겠지. 우리 스스로도 무엇을 하려는지 확고하지 않은데, 다른 것을 논할 자격이 있더냐?”

모두가 빨려들듯 백천을 바라보았다.

“방장의 말에 대해 논하고, 천우맹의 미래를 논하기 전에, 자신에게 물어보자꾸나.”

백천의 말은 담담했지만 단호했고, 묵직했지만 서슬 푸르렀다.

“우리가 지금껏 말해 왔던 그 모든 것들을, 우리가 정말 목숨으로 관철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의 눈빛이 시리게 모두를 훑었다.

“내가 지키고자 한 협의를 위해서 내 옆에 선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마저 각오할 수 있는지.”

그 말에야 모두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백천은 그들이 숨을 돌릴 틈조차 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언젠가, 저 전장에서 내 가슴에 칼이 틀어박혀 싸늘히 식어 갈 때.”

“…….”

“그 옆에서 이미 처참히 죽어 시신이 되어 있을 사형제들을 보면서도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말이다.”

칼날 같은 말이, 찬물 끼얹은 듯 싸늘해진 가슴에 틀어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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