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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169화 (1,170/1,567)

1169화. 정말 내가 틀렸던 것인가? (4)

저벅. 저벅.

천천히 천우맹의 장원을 빠져나온 법정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밝은 달을 보고 싶었건만, 안타깝게도 달이 구름에 가리어 보이지 않았다.

아쉬움의 탄식을 내뱉은 법정이 이내 고개를 내젓는다.

‘하지만 구름은 언제고 흘러가기 마련이겠지.’

아무리 구름이 짙게 낀다 한들, 영원히 달빛을 가리지는 못하는 법이다.

참고 기다리면 달은 다시 그 모습을 보이고, 언젠가 새벽이 찾아오면 이윽고 해가 뜨는 것이 세상의 이치 아니겠는가?

“방장.”

종리형이 감탄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 종리 모는 방장의 혜안에 정말 감탄했습니다.”

“……그렇습니까?”

“예, 방장. 설마 천우맹에 그런 제안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실제로 이뤄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구파일방에서 소림만큼의 권한을 준다는 제안을 누가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이뤄질 것입니다.”

“예. 실제로…… 예? 뭐라 하셨습니까?”

법정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제가 저곳에서 한 말 중 허언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한 제안은 모두 이뤄질 것입니다.”

“바, 방장. 화산은…….”

“화산에는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이미 저들은 그 자격을 증명했으니.”

“…….”

“그리고…….”

법정이 고개를 천천히 내젓는다.

“이 일은 본디 진작에 이뤄졌어야 할 일입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우리는 알지 않습니까?”

“……하지만 방장. 그건 선대의 일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저 역시 지금껏 그렇게 말하며 면피해 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참으로 변명 같지도 않은 변명이었지요. 절로 낯이 붉어질 만큼 말입니다.”

“…….”

종리형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법정을 바라보자, 법정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선대의 일과 지금의 일을 완전히 분리하고 싶었다면, 선대께서 이룩한 영광 역시 내려놓는 것이 맞았습니다. 선대가 한 일에 대해 책임지고 싶지는 않지만, 구파일방의 장문으로서 그 권리는 온전히 누리고 싶다니, 그건 후안무치한 일이 아닙니까?”

“그, 그렇긴 합니다만.”

“화산에 제안한 것을 모두 실천함은 물론이고, 그들의 잃어버린 명예도 되돌려 줄 것입니다. 과거 그들이 천하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도 말을 해야지요.”

“……그럼 안에서는 왜 그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조건으로 걸 만한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을 선심 쓰듯 말하는 것 역시 부끄러운 일일 뿐입니다.”

종리형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법정을 쳐다봤다.

“하지만 방장. 반발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화산과 소림이 서로를 인정하게 된다면, 구파 중 어느 문파도 쉬이 반발하지 못할 것입니다. 무당은 발언권을 잃었고, 종남……. 음, 종남도 긴 봉문으로 제 입지를 많이 잃었지요.”

“…….”

“다른 문파들은 딱히 잃을 것이 없으니 굳이 화산과 날을 세울 이유가 없습니다. 간단히 생각하면 화산이 해남의 빈자리를 채우고, 명분을 잃은 무당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뿐이지요.”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과연 법정이 말하는 대로 쉽게 흘러갈까 하는 의문이 남기는 했지만, 종리형은 그 사실을 굳이 입 밖으로 내뱉어 지적하지 않았다.

사실은 지적하고 싶지 않았다기보다는 지적하기가 힘들었다.

원래도 법정은 상대하기가 쉬운 사람이 아니었지만, 지금의 법정은 그가 알고 있던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으니까.

지금의 법정 앞에서 쉬이 말을 꺼낼 수 있는 이는 천하를 통틀어도 손에 꼽지 않을까?

“그럼 정말 화산을…….”

“그래야지요.”

법정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빼앗아 오기 위함이 아닙니다. 화합하기 위함이지요. 화산은 이미 천우맹을 만들어 여러 문파의 수장이 될 자격이 있음을 스스로 증명했습니다. 그런 문파에게 걸맞은 대접을 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분란의 씨앗이 될 뿐입니다.”

“…….”

“힘을 합쳐 저들을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대의 앞에는 자존심도, 권리도 다 작은 것일 뿐입니다.”

“……방장의 말씀이 백번 지당하십니다.”

종리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따지고 보면 사실 그들은 잃을 것이 없었다. 화산이라는 무시 못 할 문파가 실제 가진 전력 이상의 대접을 받는 건 조금 고까운 일이긴 하지만…….

‘그들의 업적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도 없지.’

결국은 모두가 수긍하게 될 것이다.

“제가 방장을 조금 오해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예, 방장. 솔직히…… 저는 방장께서 화산 때문에 소림의 입지가 흔들릴까 봐 그들을 적대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소림, 소림이라…….”

법정이 고개를 젓는다.

“소림은 제가 몸을 담고 있는 곳이지만, 소림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소림은 그저 절일 뿐입니다. 절이란 불법을 전파하고 중생을 구제하는 역할을 하면 족하지요.”

“제가 아둔하여 그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강호가 망하고 나면 소림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다 거름으로 돌아갈 것을.”

“…….”

종리형이 그 말을 듣고도 알쏭달쏭하다는 듯 잠시 입을 다물었다.

“여하튼 정말 대단한 계책이었습니다. 저들이 이 제안을 거절하기는 힘들 겁니다. 방장이 아니시고서야 누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대단이라…….”

법정이 또다시 고개를 내젓는다.

“그게 아닙니다. 장문인.”

“예?”

“대단한 것은 제가 아니라 화산입니다.”

“……너무 과하게 겸손하신 게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천우맹의 수장이 화산이 아니었다면, 제가 저들에게 이런 제안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건…….”

법정이 헛헛하게 웃어 버렸다.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천하의 어떤 문파가 구파일방에 견주는 세력, 오대세가를 능가하는 세력을 만들어 내어 그 수좌에 앉았는데, 대의와 협의라는 뜬구름 쫓는 명분 때문에 그 자리를 내어놓겠습니까?”

종리형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입장을 바꿔 종리형이 현종의 입장이었다면, 법정의 제안을 들었을까? 천만에. 일고의 가치도 없는 말이라고 듣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을 것이다.

“오직 화산이기에 제 말을 듣고 있었던 겁니다. 오직 화산이기에 제 제안을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대단한 것은 제가 아니라, 제 입에서 이 말이 나올 수 있게 만든 화산이지요.”

법정이 나직하게 불호를 외웠다.

“이미 예전에 알았던 일입니다.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아집과 욕심에 사로잡혀 저들을 제대로 보지 못했으니……. 당금의 모든 사태는 제가 초래한 것이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방장께서 천하를 위해 노력하신 것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방향이 틀리면 다 틀린 것을.”

법정이 나직이 말을 뱉고는 다시 하늘을 바라본다.

“아직은 늦지 않았으니 바로잡을 수 있을 겁니다. 그 바로잡는 일조차 저들의 온정에 기대야 한다는 사실이 그저 부끄러울 뿐이지요.”

법정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종리형에게 말한 대로 다른 문파였다면 법정의 말을 제대로 들으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당장 어제의 법정만 해도, 현종이 찾아와 비슷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면 대놓고 멸시한 후 축객령을 내렸을 테니까.

욕을 퍼먹고, 수치를 당한다 해도 모두 자신의 탓이다 생각하고 찾아온 길이거늘, 저들은 그를 욕하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고민해 주었다.

‘쓰구나.’

해야 할 일을 했다. 하지만 그 해야 할 일이 쓰디쓴 것은 다름 아닌 저들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방장. 저들이 제안을 받아들이겠지요?”

“아마 그럴 것입니다.”

법정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아니, 그래야 할 것입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정말 위기가 찾아올 테니.”

사패련이 전부가 아니다.

방장 역시 이제는 마교가 돌아올 것이라는 말을 믿는다.

청명이 자신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인정했는데, 그가 하는 말을 믿지 않을 이유는 없으니.

서로 입장이 다르기에 길이 갈릴 수는 있을지언정, 화산검협이 아둔하여 있지도 않을 일을 걱정한다고 비웃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저……. 그런데 혹시 말입니다. 방장.”

“왜 그러십니까?”

종리형이 슬쩍 법정의 눈치를 보고는 입을 열었다.

“만약……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저들이 방장의 제안을 거부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때는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는 말도 있잖습니까.”

법정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렇다면 제가 저들을 잘못 본 것이겠지요. 그게 아니라면 저들이 너무도 작은 것에 집착하여 큰 것을 보지 못하는 이들이거나.”

“…….”

“하지만 그러지는 않으리라 믿습니다. 천하를 위하는 저들의 마음만은 진심입니다. 그건 어떤 의심의 여지조차 없습니다. 화산의 장문인 현종진인도, 그 화산검협도 모두 훌륭한 이들이니.”

종리형이 잠시 생각하다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저는 여전히 방장께서 그들을 너무 높이 평가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지 않기를 바랄 뿐이지요.”

법정이 고개를 돌려 고요한 장원을 눈에 담았다.

‘이제는 그대들이 고민을 해야겠지.’

아마 쉽지 않은 고민이 될 것이다.

저들 역시 사람. 지금까지 노력해서 이루어 온 천우맹이라는 터전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이 쉬울 리가 없으니까.

천우맹에는 저들의 이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마 그 이상을 내려놓는 일은 법정이 스스로의 미혹과 자존심을 내려놓은 것 이상으로 고통스러운 과정이 될 것이다.

감히 누구에게도 선뜻 요구하기 힘들 만큼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법정은 저들이 올바른 선택을 하길 바랐다.

‘천하는 분열되어서는 안 된다네.’

그래서는 사패련과 마교의 연이은 침공을 절대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법정은 확신했다.

저들이 이 제안을 받지 않고 앞으로도 무모한 일을 계속 벌이게 된다면, 결국 언젠가는 그 무모함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건 사패련과 마교를 막아야 하는 강호의 입장에서도 돌이킬 수 없는 거대한 손실이 될 것이다.

청명에게는 천하를 뒤흔들 힘과 계책이 있고, 법정에게는 청명이라는 검을 완벽하게 활용해 줄 능력과 수완이 있다.

청명이 계책을 만들어 낸다고 해도, 종남이나 무당을 제 마음대로 부릴 수는 없는 일. 하지만 법정은 저 고고한 문파들의 콧대를 눌러 청명의 지시를 따르게 만들 힘이 있는 사람이다.

청명과 화산이 선두에 서고 법정과 소림이 그 뒤를 보좌한다면, 그 뒤를 천하의 모든 정파가 일사불란하게 따르게 만들 수 있다면, 사패련이든 마교든 두려울 것이 무엇이겠는가?

‘자네에게 있어 가장 좋은 선택은 나와 손을 잡는 것일세. 언제까지고 자네에게 천운이 따르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게. 화산검협.’

법정이 눈을 감는다.

그의 입에서 낮은 불호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내 눈을 뜬 법정이 다시 하늘을 보았지만, 여전히 달은 구름 뒤에 가려 있을 뿐이었다.

“날이 흐리군요.”

“며칠은 비가 온다고 합니다.”

“……그래. 그래 보입니다. 하지만 그 며칠이 지나면 다시 밝은 달이 뜨지 않겠습니까?”

미련이 남는 듯 다시 장원을 일별한 법정이 천천히 발을 옮겼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으니, 이제 그저 기다리면 될 일이다. 하루가 일 년 같은 기다림이 되겠지만 말이다.

“가십시다. 미리 해야 할 일이 많을 것입니다.”

“예. 방장.”

두 사람이 걸음을 옮겼다.

하늘을 가린 먹구름이 더욱 짙어지며 어둠이 내린 장원을 더욱 어둡게 물들여 갔다.

숨소리조차 새어 나오지 않는 고요함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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