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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168화 (1,169/1,567)

1168화. 정말 내가 틀렸던 것인가? (3)

“무…….”

조걸이 당황한 눈으로 주변을 돌아본다.

하지만 아무도 입을 열어 조걸을 위해 변명해 주지 못했다. 이 말은 조걸에게 한 말이 아니라, 그들 모두에게 한 말이었으니까.

“무슨 말을…….”

“아닌 것 같은가?”

법정이 고개를 내젓는다.

“그대들 중 저 해남으로 가야 한다는 말을 한 이는 누구인가?”

“…….”

“화산검협이 스스로 그리하고자 하던가?”

법정의 시선이 백천을 꿰뚫는다. 백천이 자신도 모르게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였다.

“설령 그리했다 한들, 자네들만은 말렸어야지. 그 해남행에서 가장 위험할 이가 누구인가는 너무도 뻔한 일이니까.”

“…….”

“하지만 모르긴 모르되, 자네들은 결국 해남으로 갔을 걸세. 그리고 그 선두에는 당연하게 화산검협이 있었겠지.”

차마 그 누구도 아니라 말하지 못했다.

결국엔 그리될 확률이 높다는 것은 그들 역시 알고 있었던 일이니까.

화산의 일은 언제나 그런 식이지 않았는가?

“화산은 지금껏 무모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일들을 몇 번이고 해 왔네. 만인방의 일은 그렇다 치세, 북해에서는 어떠한가? 장강에서는? 그리고 항주에서는 또 어떤가?”

그 하나하나의 사건이 언급될 때마다 모두의 얼굴이 짧은 경련을 일으켰다.

“그중 어디 하나 위험하지 않은 일이 있었는가? 어느 곳 하나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되는 곳이 있었던가?”

“…….”

“그리고 그 선두에는 당연하다는 듯, 화산검협이 있었네.”

조걸이 입술을 깨문다.

그저 사실만을 전하는 저 말이 조걸에겐 마치 지금껏 그들이 청명이 놈을 가장 위험한 곳의 최전방에만 세워왔다는 질타로 들렸기 때문이다.

“몇 번이고 목숨을 걸고, 몇 번이고 살아 돌아왔지. 그리고 그 업적은 고스란히 화산과 천우맹의 광영으로 이어졌다네. 그를 따르는 이들도 자연히 협을 논하고 자신들의 활약을 논했지. 하지만…….”

법정이 굳은 눈으로 모두를 바라보았다.

“내 자네들에게 묻겠는데, 그 선두에 화산검협이 없었다 해도 자네들은 정말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었는가? 죽어도 상관없다고 협의를 관철할 수 있었는가?”

“…….”

“아닐걸세. 그래, 아니겠지.”

법정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럴 수 없었을 것일세. 지금껏 그대들이 용기를 내어 강대한 적들과 맞설 수 있었던 이유는 그대들의 앞에 화산검협이 있었기 때문이겠지. 지금까지는 스스로 낸 용기라고 착각했을 뿐.”

백천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속이 불타는 듯 쓰려 옴에도 무엇 하나 반박할 수 없다는 사실이 백천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물론 그게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닐세. 눈앞에 화산검협 같은 이가 있다면 기대고 싶은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하지만…….”

법정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결국은 그 기댐이 화산검협의 등을 떠미는 꼴이 될 걸세. 언젠가 그를 사지로 몰아넣고 나서야 후회하게 되겠지. 자신이 무슨 짓을 해 버렸는지를 깨닫고.”

백천에게서 시선을 뗀 법정의 눈이 다시금 조걸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소림마저도 그런 화산검협의 등에 기대야 한다는 건가? 나는 무엇 하나 할 수 없으니, 그 어깨에 더 큰 짐을 올리라는 건가?”

“그건…….”

“그건 적어도 소림의 방식은 아닐세. 방장인 내가 해야 할 일은 더더욱 아니겠지.”

조걸이 숨이 막힌다는 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반박할 수가 없다.

고백하건대, 조걸은 어느 순간부터 법정을 그리 대단한 이로 여기지 않고 있었다.

그가 가진 소림의 방장이라는 신분은 대단할지 모르고, 한 무인으로서 지닌 무위는 존중해야 할지 모르나, 한 인간으로서 존경하거나 경계해야 할 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금껏 그가 보여 준 모습은 언제나 청명보다 한 발 뒤늦어 후회하거나, 청명이 가고자 하는 방향과 반대로 향하다가 망신을 당하는 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순간 조걸과 이곳에 있는 다른 이들은 뼈저리게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저 법정이 소림의 방장이 되었는가를. 소림의 방장이란 자리에 오른 이가 얼마나 대단한 이인가를.

그동안 법정을 이겨 온 이는 화산도, 그들도 아니라 그저 청명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그들조차 어느새 잊고 있었다.

“이해하겠는가? 화산검협?”

“…….”

“이제껏 자네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 왔네. 그건 자네의 힘이 되었고, 자네를 따르는 이들에게 이정표가 되었겠지. 하지만…….”

자신을 향한 법정의 시선에 청명이 짧게 입술을 깨문다.

“자네도 느끼고 있었겠지. 모를 수가 없었을 걸세. 그건 아슬아슬한 절벽의 끝에서 검무를 추는 것과 다름없는 일임을.”

“…….”

“열 번을 성공한다 해도 단 한 번 실패하는 순간, 모든 것을 잃게 되겠지. 아니, 어쩌면 이룩한 것이 많은 만큼 더 뼈저리게 잃게 되겠지. 자네가 가장 잃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말이네.”

법정이 청명에게 가만히 물어 온다.

“버겁지 않던가?”

“…….”

“기댈 곳이 있는 사람은 알 수 없는 심정이지, 오직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느끼는 이만이 감당하는 부담일세. 가면 갈수록 버거워졌겠지. 자네에게 기대는 이들은 더욱 많아지고, 상황은 점점 더 위험해지는데 이 상황을 이어나가기 위해선 자네가 더 무리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법정이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그 끝에 무엇이 있는 줄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겠지. 그게 자네가 걷고 있는 길이네. 그건 맨몸으로 가시밭길을 영원히 걷는 것과 다르지 않아. 처음에는 그저 작은 생채기에 불과하지만, 그 생채기가 점점 많아질수록 그 상처에서 흐른 한 방울의 피들이 쌓여 가지. 그러다 언젠가는 그 피들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많아져 전신을 적시게 될 걸세.”

어쩌면 이 순간.

청명은 처음으로 자신을 이해하는 이를 만난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이를 말이다.

“하지만 화산검협, 길은 그것만이 아니잖은가?”

법정이 다른 이들을 쓸어 본다.

“우리와 함께한다면 자네가 그리 많은 것을 짊어질 필요가 없네. 소림과 구파일방은 여전히 부족하고, 나는 여전히 아둔하지만, 자네의 짐을 나눠서 져 줄 정도는 될 것이네.”

“…….”

“그러니 이제 그만 고집을 버리게나.”

청명이 여전히 불신에 가득 담긴 눈으로 법정을 바라본다.

“의외네요.”

“뭐가 말인가?”

“방장께서 이리 혀가 매끄러우신 줄은 미처 몰랐는데 말입니다.”

명백히 비꼼이 담긴 말이었다. 소림의 방장을 상대로는 어떻게 생각해도 적절하지 않은.

하지만 법정은 그 말을 듣고도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그저 허허 웃어 버렸다.

“살다 보니 빈승이 자네에게 칭찬을 듣는 날도 오는군.”

“칭찬으로 들리세요?”

“그럼 아닌가?”

청명이 고개를 내젓는다.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은 이만큼 상대하기 어려운 이도 없다. 상처받을 일도, 화를 낼 일도 없는 이를 상대로는 어떤 도발도 먹히지 않으니까.

지금 청명은 그 사실을 뼈저리게 절감하고 있었다.

“말이야 기름 바른 듯 줄줄 나오지만, 애초에 그 모든 게 방장의 욕심을 좋은 말로 치장한 게 아니라는 걸 무슨 수로 보장할 겁니까? 이미 우리는 방장께 속을 만큼 속았거든요. 애초에 서로 신뢰가 존재하지 않는데, 그저 믿으라 한다 해서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이보게, 화산검협.”

“말씀해 보시죠.”

“자네 말대로 이 모든 것이 내 과한 욕심으로 시작한 일이라 하세.”

“그러시겠죠.”

“그럼 내가 하는 말이 틀린 것인가?”

청명이 눈을 찌푸린다. 법정이 하고자 하는 말을 잘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야…….”

“그렇지 않네.”

법정이 단호하게 말했다.

“자네들이 협의를 지키려 하는 것 역시 일종의 욕심이라 할 수 있네. 사람이란 애초에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던가?”

“…….”

“대의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네. 스스로의 욕심이 자신 하나의 개인적인 탐욕에 그치지 않고, 더 큰 것으로 향할 때, 욕심은 대의가 되는 법이 아닌가?”

법정이 득도한 고승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그저 바랄 뿐이라네. 천하가 이 위기를 조금 더 수월히 헤쳐 나가기를. 그러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는 너무도 확연하지. 분열된 정파를 수습하고, 힘을 하나로 합칠 수 있다면 그 이상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 말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조금도.

그렇기에 그 말을 듣는 이들조차도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 버릴 정도였다.

“그리고 내가 품은 작은 욕심. 그 욕심이 만들어 낸 대의가 자네가 걷는 길 앞에 있는 가시덤불들을 걷어 낼 것일세. 이윽고는 화산의 길도 이끌겠지.”

청명이 말없이 법정을 노려보았다.

“하나만 알아주게나.”

“…….”

“변명같이 들리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저지르고, 잘못을 하기 마련일세. 중요한 것은 그 실수를 통해 배우고 나아가는 것 아니겠는가?”

법정이 눈을 감고 반장을 한다.

“아미타불. 내가 저지른 잘못은 모두 이해하고 있네. 그러니 이리 고개를 조아려 사과하는 것이네. 그러니 자네도 이 못난 사람을 한 번 이해해 주게나.”

청명이 자신도 모르게 제 손을 쥐었다 편다.

사람을 누구나 실수를 한다. 중요한 것은 그 실수에 머무르지 않고 나아가는 것이다.

공감한다. 이해한다. 청명이야말로 그 격언을 전력을 다해 실천하고 있는 사람이니까.

“방장.”

“말하게나.”

청명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방장의 말이 모두 맞다고 칩시다.”

“…….”

“하지만 그 결론은 저 해남이 죽어 나가도록 방조하고 외면하겠다는 말일 뿐입니다. 그 죄는 누가 감당합니까?”

“누구겠는가? 당연히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네.”

“……그게 당신 하나의 목숨으로 감당될 일이라 보십니까?”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래, 내 한 목숨으로는 부족할지도 모르네.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홀로 감당하기 어렵다고 다른 이의 피를 요구해야 하는가? 아니면 다른 이들에게 함께 책임을 져달라고 해야 하는가?”

“…….”

“내가 아니면 누가 지옥에 가겠는가? 나는 그저 오롯이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일 걸세. 그리하여 강호가 이 위기에서 벗어나고,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이들을 구할 수 있다면, 천길 유황불 속에서라도 웃을 수 있지 않겠는가?”

법정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할 말은 다 했네. 이제 남은 건 선택뿐이지. 자네들이 내 제안을 받을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

법정이 짧게 불호를 외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자리에서 대답을 바라지는 않겠습니다. 사흘쯤 뒤 다시 찾아뵙지요. 장문인.”

“가, 가시렵니까?”

“장문인께서도 올바른 결정을 내려 주시길 바랍니다. 빈승은 제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았습니다. 부디 장문인께서도 그러하시기를. 그럼.”

깊게 읍을 한 법정이 종리형을 대동하고 밖으로 나섰다.

그가 돌아가 버린 방에 도무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분위기가 내려앉았다.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고, 누구도 서로를 마주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 순간.

스윽.

청명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아무 말도 없이 밖으로 나갔다.

“……청명아.”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백천의 입가에서 흘러나온 작은 뇌까림만이 방 안을 정처 없이 떠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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