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7화. 정말 내가 틀렸던 것인가? (2)
“아…….”
백천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 역시 법정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법정이 누구인가? 다름 아닌 저 천년 소림의 방장이 아닌가? 설사 법정이 정말 그리 느꼈다고 해도, 소림의 방장이라는 직위를 역임하고 있는 이가 입에 담을 만한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백천이 앓는 소리를 흘린 가장 큰 이유는…….
법정의 말에 공감해 버렸기 때문이다.
천재가 범인에게 자신과 같은 방식을 강요하는 것은 그저 폭력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는 말에 말이다.
그래, 공감한다. 어쩌면 백천이기에 누구보다 더 공감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 역시 지독하게 느꼈으니까.
청명이 그들을 이끄는 방식은 그저 가혹이라는 표현만으로는 모두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리고 백천은 그중에서도 유독 가혹한 삶을 살고 있다.
그가 힘든 티를 내고, 수련을 껄끄럽게 여기는 내색을 조금이라도 보여 버리면, 그의 등을 바라보고 있는 제자들이 먼저 무너져 버릴 테니까.
오검은 청명의 등을 보고 따라가지만, 그 험로를 함께 걷는 이들이 보는 건 청명의 등이 아니라 같은 수련을 버텨 내고 있는 백천의 등이다.
때문에 백천은 지금껏 어떤 불만이 있더라도 입을 꾹 다문 채, 가장 앞에서 청명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그렇기에 저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노력하고 또 노력해도 도무지 잡히지 않고 오히려 멀어지기만 하는 그 등에 가장 절망해 온 이 역시 백천일 테니까.
왜 생각해 보지 않았겠는가?
어쩌면 이건 틀린 일일지도 모르겠다고, 애초에 그는 따라잡을 수 없는 신기루를 좇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 좇을 수 없는 것을 좇다가 그마저 망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없었다고 과연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지금 법정이 그런 백천이 했던 생각과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백천조차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그 말을.
“그게 뭔…….”
청명조차 말문이 막힌 모양으로, 한번 꺼낸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멍하니 법정을 바라볼 뿐이었다.
“내 말이 틀린 것 같은가?”
질문을 던진 법정이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돌이켜보면 매화도에서 잘못된 선택을 한 이는 아무도 없었네. 잘못한 이가 있다면 오직,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남궁황뿐이겠지.”
남궁도위가 입술을 짓깨물었다. 법정은 미안함이 담긴 눈으로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하지만 딱히 자신이 한 말을 정정하지는 않았다.
“그의 잘못을 만회하기 위해 다른 이들을 희생으로 이끄는 것은 내가 할 선택이 아니었네. 그리되었다면 나는 협심이 넘친다는 평은 받았겠지만, 그 평의 대가로 다른 이들의 피를 바쳐야 했겠지.”
“나는…….”
“그렇네. 그래, 바로 그렇다네. 하지만 자네는 피를 흘리지 않고도 남궁을 구할 수 있었지. 그래. 그저 그 차이였던 것뿐이라네. 서로가 서로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한 것뿐이지. 이보게, 화산검협. 자네는 정말 내가 소림과 공동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매화도로 향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청명이 으득 소리 나게 이를 갈았다.
“변명치고는 구차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
“세상에는 능력이 부족함을 알면서도 협의에 목숨을 거는 이들이 넘쳐납니다. 할 수 있는 일만 할 거라면 정파라는 이름은 진즉에 갖다 버렸어야죠.”
“그럴지도 모르지.”
아미타불 하고 불호를 왼 법정이 투명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그럼 내 묻겠네. 같은 상황이 또 벌어진다면 자네는 매화도로 향할 텐가?”
“당연한 말을…….”
“그 대가로 화산의 제자 중 몇 정도가 죽어도 괜찮겠는가?”
“이……!”
순간 청명의 몸에서 살기가 솟구쳤다. 저건 사람이 입에 담을 수 있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법정은 노기를 뿜어내는 청명을 그저 무심한 눈으로 보며 물었다.
“열까지는 괜찮은가?”
“…….”
“스물은? 서른은? 아니면 쉰?”
“……방장.”
“아니, 말을 바꾸지.”
법정의 시선이 청명의 뒤에 있는 오검에게로 향했다. 그 옆에서 입술을 깨물고 있는 혜연에게도.
“이곳에 있는 이들은 어떤가? 이들이 모두 죽었어도 자네는 남궁 소가주와 남은 이들을 구해 냈으니 훌륭한 죽음이었다고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겠는가?”
청명이 입을 닫았다. 그리고 그 순간 백천은 느꼈다.
지금껏 청명이 논쟁하다가 입을 다문 경우는 꽤 많았다. 하지만 그건 대체로 상대의 말을 기다려 주는 것이었다. 스스로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문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금, 다름 아닌 저 청명이 방장의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지. 그럴 수 없을 걸세. 어쩌면 자네는 지금쯤 폐인이 되어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 모든 게 자네의 선택으로 비롯된 결과임을 모르지 않을 테니까.”
“…….”
“그럼 묻겠네.”
법정이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네는 어찌 스스로도 할 수 없는 것을 하지 않았다고 타인을 탓하는가?”
“…….”
“자네의 위선을 탓하고자 함이 아니네. 그건 위선이 아니었을 테니까. 자네는 분명 화산의 희생을 감수한다고 생각하고 매화도로 향했을 걸세. 그건 진심이었겠지.”
모두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청명이 매화도로 가는 걸 얼마나 격하게 반대했는지, 모두가 똑똑히 보지 않았던가?
“하지만 말일세. 자네의 마음 한구석에는 분명 매화도로 향한다 한들, 큰 희생 없이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도 있었을 걸세. 내 말이 틀렸는가?”
“…….”
“그래. 그게 자네일세. 자네는 그런 사람이지.”
법정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니 보인다. 스스로가 범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청명이라는 이가 자신과는 다른 것을 보고 있음을 이해하니 보였다. 이자가 어떤 사람인지.
그가 청명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저 하나뿐이다.
‘화산검협이라는 이는 스스로 겪어 보지 못한 일을 겪어 본 것처럼 여기는 이다.’
그리고 남들은 계산하지 못하는 영역을 계산해 내는 이다. 타인에게는 한없이 무모하게만 보이는 일이, 화산검협의 뇌리에는 손에 잡힐 듯 그려지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 이를 평범한 이가 대체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하지만 내게는 그런 자신감이 없네.”
“…….”
“그러니 대답해 보게나. 화산의 절반을 잃는다 하더라도, 자네는 정말 매화도로 향할 텐가? 앞으로도 자네는 그 협의를 지키기 위해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 자신하는가?”
청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섣불리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이 대답이 그에게 족쇄가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렇다고 대답을 해 버리는 순간, 앞으로 화산은 같은 일이 벌어질 때마다 목숨을 돌보지 않고 적진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청명이 위선자가 되어 버리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애초에 청명은 그런 데 신경 쓰고 살아온 이가 아니니까.
하지만 지금 이 대화의 족쇄가 옭매는 것은 청명이 아니라, 이 대화를 듣고 있는 이들이다. 설령 청명이 그러고자 한다 해도, 이들은 청명이 홀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두고 보려 하지 않을 테니.
“그게 화산의 방식이네.”
“틀렸다는 겁니까?”
청명 대신 입을 연 백천의 질문에 법정이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있는가? 훌륭하지. 너무도 대단하지. 그저 한없이 부러울 뿐이라네. 나 역시 소림이 그런 위치에 서기를 평생을 바라 왔네.”
“…….”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네. 그럴 수가 없어. 나는 그러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이일세. 그럼 도장. 내 묻겠는데, 내가 정녕 그리 잘못되었는가?”
백천이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법정 역시 사람이다. 타인을 구하기 위해서 제 제자들을 죽여야 하는 상황을 피한 것이 어찌 사람으로서 잘못되었다 할 수 있겠는가? 차마 누구도 그런 말은 하지 못할 것이다.
소림이라는 문파가 그 위치에 걸맞지 않은 행동을 했다고 비난할 수는 있을지언정, 법정이라는 개인이 그릇된 선택을 했다고 마냥 비난할 수는 없다.
오히려 화산이기에, 자신보다도 함께 살아가는 사형제들을 더 끔찍이 여기는 화산이기에 더더욱 그 말만은 할 수 없었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네. 이 대답을 얻기 위해 나는 너무도 많은 것을 내려놓았지.”
법정의 담담한 눈에 짧게 회한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화산 역시 틀리지 않았다네. 오히려 옳았네. 나보다 더.”
“…….”
“그러니 우스운 일이 아닌가? 틀린 이가 없는데, 서로의 잘못만을 논하고 있었으니.”
“결국 하고자 하는 말이 그겁니까?”
“이보게, 화산검협.”
법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를 조금은 이해해 주게나.”
“…….”
“나는 자네처럼 될 수 없는 사람일세. 그런데 어째서 자네가 되지 못했다고 나를 탓하는가? 그건 내게도 너무 가혹한 일일세.”
“…….”
그때, 내내 참고 있던 조걸이 버럭 언성을 높였다.
“방장께서 하신 말씀은 틀렸습니다.”
법정이 고개를 돌려 조걸을 바라보았다.
“어째서인가?”
“말이야 다 맞지요. 하지만 그걸 인정한다면 다른 선택이 있지 않습니까?”
모두가 의아한 얼굴로 조걸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머리에는 다른 선택이랄 게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방장께서 스스로가 청명이 놈만 못하다고 인정하신다면, 구파일방에 화산을 들일 게 아니라 구파가 천우맹에 들면 됩니다. 그럼 청명이가 구파일방을 움직일 수 있게 될 거 아닙니까?”
“…….”
“그럼 다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까? 왜 더 똑똑하고 판을 잘 보는 놈이 방장에게 맞춰 줘야 합니까. 모두를 위해서는 그게 더 나은 것 아닙니까?”
순간 그 말에 동조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생겨났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건 알지만, 어쨌든 그것도 최선의 한 방편이 아닌가?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법정은 청명에게는 보이지 않던 싸늘한 눈으로 조걸을 쏘아보았다.
“자네는 정녕 그게 올바르다고 여기는가?”
“예! 올바릅니다!”
“내 이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으나, 그 얘기를 꺼내니 나도 그냥 말을 하겠네.”
“……예?”
“화산검협을 사지로 밀어 넣고 있는 이들은 누구인가?”
순간 조걸이 움찔했다. 그 목소리가 너무도 준엄했기 때문이다.
“현종.”
장문인이 입술을 깨물었다.
“장로들.”
현영과 현상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그대들일세.”
“…….”
“지금껏 그대들은 화산검협이 이뤄 낸 수많은 성과에 그저 감탄해 왔네. 스스로 이룰 수 없는 것을 이뤄 내는 영웅에게 그저 기대 왔네. 그러니 생각했겠지. 저 억지를 그냥 못 이긴 척 들어주면 된다. 그럼 언제나처럼 다시 화산검협이 옳을 것이다.”
“…….”
“내 목숨을 걸었으니 됐다고? 내 죽음도 각오한다고?”
법정이 노기가 등등한 눈으로 모두를 노려보았다.
“똑똑히 들어 두게. 이 상황이 반복되고, 화산검협이 전권을 가지는 상황이 반복될 때, 그대들이 맞이할 것은 그대들의 영웅적인 죽음이 아니라!”
법정의 목소리가 모두를 후려쳤다.
“그대들을 살린 후,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을 화산검협일세. 그게 언젠가 이곳에 있는 이들이 맞이해야 할 현실이지.”
모두가 어렴풋하게는 알고 있었던 사실. 그럼에도 막연히 외면하고 있던 그 사실이 법정의 입에서 쏟아져 모두의 폐부를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