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3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3)
“구…파일방…….”
“……복귀라고?”
화산 제자들의 입에서 신음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들의 눈이 끊임없이 법정을 살폈다. 지금 들은 말이 정말인지 확인해 보겠다는 듯이. 그만큼이나 충격이 큰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받은 충격은 현종과 장로들이 받은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꾸우욱.
허벅지를 짚은 현상의 손에 살을 금방이라도 뚫을 듯 꽉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현상은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구파일방 복귀라니. 설마 그런 말이 법정의 입에서 나올 것이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제자들은 모른다. 이곳에 있는 백자 배와 청자 배는 이 말이 현자 배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두 눈으로 지켜보았다. 구파일방에서 내쫓긴 화산의 선대들이 어떤 마음으로 눈을 감았는지.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원통함을 참아 내지 못하고, 먼 훗날에라도 언젠가는 구파일방에 화산의 이름이 다시 오를 날이 오기를 바라던 이들의 죽음을 아직도 똑똑히 기억했다.
그들의 스승 역시 연신 당부하며 떠났다. 언젠가는 화산을 다시 반석에 올려 찬란했던 영광을 되찾아 달라며 마지막까지 당부하고, 부탁하고, 오열했다.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그런데 지금 그 일을 이룰 힘이 있는 자가 돌아오란 말을 꺼낸 것이다.
물론, 과거에도 법정은 같은 말을 언급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법정에게 ‘화산의 구파일방 복귀’는 화산을 제 마음대로 부리기 위한 달콤한 미끼이자 공수표에 지나지 않았을 터.
하지만 이제 화산은 더 이상 법정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곳이 아니고, 공수표를 던졌다가 적당히 달래고 넘어갈 수 있는 곳도 아니다. 화산은 이제 법정의 발언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문파인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법정이 이 말을 꺼냈다는 건, 지금 이 제안이 진심이라는 의미였다.
“그, 그 말…….”
진심이냐고 되물으려던 현종이 문득 입을 닫았다. 지금 그가 어떤 말을 해도 상황이 어색하다. 그는 화산의 장문인이기도 하지만, 천우맹의 맹주이기도 하다.
천우맹을 해체하는 조건이 화산에게 돌아오는 과실(果實)이어서는 안 된다.
“과한 말씀이십니다.”
그 순간 당군악이 입을 열었다.
“화산은 천우맹의 핵심입니다. 구파일방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천우맹의 수장 자리보다 대단할 것은 없습니다.”
“으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요.”
법정 역시 순순히 그 사실을 인정했다.
“그리고 천우맹을 해체하면 남은 문파들은 어찌하란 말씀이십니까?”
“문제가 될 것이 있소이까?”
“……예?”
법정이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어색한 것은 당가가 천우맹에 속해 있는 것이지요. 당가가 본디 있었던 오대세가로 되돌아가는 것이 정말 문제 되는 일입니까? 수백 년간 그 자리에 있었던 당가가?”
“…….”
“남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남궁세가가 오대세가라는 이름을 다시 쓰는 것이 뭐가 그리 이상한 일이겠습니까?”
“저희는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남궁도위가 냉정히 대답하자 법정이 고개를 내저었다.
“소가주. 내 소가주께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
“하지만 소가주께서 진정으로 가문을 생각한다면, 자신의 고집을 조금은 내려놓으셔야 합니다.”
“저는 천우맹과 함께하는 것이 가문을 위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지금이야 당연히 그렇겠지요. 그럼 백 년 뒤에는 어떻습니까?”
“당연히…….”
“맹주님께서 계시지 않고, 화산검협도 없고, 이곳에 있는 이들이 모두 흙으로 돌아간 뒤에도 천우맹에 속해 있는 것이 가문에 이득이 될 거라 여기는 것입니까?”
“…….”
“아니겠지요. 아닙니다. 내 천우맹의 드높은 뜻과 고고한 이상을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건…….”
법정이 담담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천우맹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몇몇 사람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남궁도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뜻을 이어 가면 될 일이지요.”
“하나의 문파에서 선대의 뜻을 이어 가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거늘, 수많은 문파가 연합한 천우맹이 대를 걸쳐 거듭 뜻을 이어 간다는 것이 정말 가능한 일이라 생각합니까?”
“…….”
“소가주는 훌륭한 이입니다. 그럴 수 있겠지요. 하나, 소가주. 소가주의 다음 대에 반드시 소가주 같은 이가 가주가 된다는 보장은 없소이다. 그리고 그다음 대는 더더욱 그렇겠지요.”
법정이 고개를 내저었다.
“천우맹은 오래 가지 못할 겁니다.”
“아니, 그런데…….”
“천우맹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과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그릇은 애초에 한계가 있는 법입니다. 그들이 정말 천우맹의 넓은 뜻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그 말에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제가 겪어 보았기에 압니다. 저는 제 그릇이 작다고 여기지 않은 사람이었으나, 천우맹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면 묻겠습니다. 천우맹의 후예 중 저 같은 이가 나타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화산검협이 없고, 현종진인이 없는 시대에 내가 나타나게 된다면 천우맹이 어찌되겠습니까?”
“어…….”
이번에는 누구도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예상이 가는 바는 뻔히 있는데, 그걸 입 밖으로 내는 순간 법정에 대한 폄하가 되어 버릴 테니까.
“그런데도 정말 천우맹을 유지하는 것이 미래를 위한 일입니까?”
그때 백천이 날 선 목소리로 서늘하게 말했다.
“제가 감히 입을 열어도 되는 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방장. 천우맹에는 우리뿐 아니라 새외의 분들도 계십니다. 이 말씀을 하시려고 그분들을 자리에 부르지 않으신…….”
“북해빙궁과 남만야수궁, 두 문파에 붙은 새외라는 글자를 파하고 두 문파를 중원의 문파로 인정할 것입니다.”
“…….”
“그리고 그들에 대한 지원은 지금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할 것을 약속합니다. 그럼 저들은 그토록 원하던 것을 손에 넣을 수 있겠지요. 천우맹이 주지 못하는 것. 변방의 야인이 아니라 중원의 중심에 당당히 입성하는 것.”
“노, 녹림은요! 녹림은 사파인데도 천우맹인데!”
조걸의 발작적인 외침에 법정이 빙그레 웃는다.
“그건 나도 고민이네. 같이 논의하면 될 일이겠지. 하지만 이미 녹림은 사파라 부를 수 없는 곳이 아닌가?”
“……그렇긴 한데.”
“녹림이 더는 양민을 해치지 않겠다고 약조한다면 정파로 인정해 주지 못할 것도 없지. 부처께서도 악인을 참회로 이끌라 하셨으니, 오히려 훌륭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 그러시다면…….”
조걸이 머리를 긁적이며 뒤로 물러났다.
아마 임소병이 이 말을 들었으면 눈을 까뒤집고 법정에게 충성 맹세를 했을지도 모른다. 화산이 아무리 녹림을 우대해 줘 봐야, 소림이 한 번 인정해 주는 것만 한 파급력은 절대 만들 수 없을 테니까.
“그러면 된 것 아닌가?”
그때 지금껏 담담히 듣고만 있던 청명이 입을 뗐다.
“그에 대한 대답은 이미 전에 드렸던 것 같은데요. 우리는 허울밖에 안 남은 구파일방에 복귀할 이유가…….”
“허울만이 아니면 되는 것인가?”
“엥?”
법정이 청명을 빤히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화산에 소림과 동등한 지위를 약속하겠네.”
“뭐?”
청명은 순간 저도 모르게 반말을 내뱉고 말았다. 법정의 수작질 정도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있다고 생각했던 청명에게도 이 말만은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소림이 어떤 곳이던가?
과거 마교와의 전쟁 때 화산이 혼자 개발악을 하며 틀어막고 있을 때조차 구파일방의 수장이라는 고고한 자존심을 내려놓지 않던 곳이다.
그런데 그때의 화산에 비한다면 아직 한참 부족한 지금의 화산에 그때도 얻지 못했던 입지를 허하겠다는 말이다.
“뭔 헛소리를…….”
“소림 방장의 이름으로 만천하에 선언하겠네. 화산과 소림은 동등한 입지를 가지고 서로 협력해 나가겠다고 말이네.”
“…….”
청명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그…… 방장. 그…… 이, 이거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무언가?”
“혹시 요즘 바지에 뭘 지린다든가,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거나……. 꿰엑!”
청명이 그 자리에서 앞으로 철푸덕 엎어진다. 그리고 현영이 청명의 뒤통수를 걷어차 버린 발을 슬그머니 회수했다.
“죄송합니다, 방장. 이놈이 한 번씩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장로님께서는?”
“현영이라 합니다.”
“……기억해 두겠습니다.”
법정이 눈을 끔뻑였다. 설마 화산의 장로 중에 청명을 밟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는 듯이.
“아미타불.”
살짝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불호를 왼 법정이 현종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맹주님.”
“……예, 방장.”
“물론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 화산이 누리는 것과 화산이 걸으려는 길을 포기하는 대가로 이 모든 것은 너무도 작은 것에 불과하지요.”
그 순간 청명이 벌떡 일어나선 고개를 격하게 위아래로 끄덕였다. 법정은 담담히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맹주님께서는 제 제안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만약 맹주님께서 그저 화산의 장문이시라면 제 제안을 거절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천우맹의 맹주이신 이상은 제 제안을 거절하셔선 안 됩니다.”
현종이 선뜻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를 보이니 법정이 빙그레 웃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천우맹이 바로 천우맹이기 때문입니다. 묻건대, 구파일방과 천우맹이 지금처럼 갈등할 때와 서로 나뉘어 최소한만 협력할 때, 그리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다시 하나가 될 때.”
현종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셋 중 어느 쪽이 저들을 상대하기에 더 수월하겠습니까? 그리고 그 셋 중 어느 쪽이 더 많은 이들을 살릴 수 있겠습니까?”
“그야…….”
현종은 대답을 끝까지 하지 못했지만, 그건 대답이나 다름없었다. 이건 삼척동자도 그 자리에서 답할 수 있는 질문이니까.
“저는 천우맹이 그간 양민들을 위해 싸워 온 것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 진정성은 이미 여러분들이 증명했습니다.”
법정이 이곳에 앉은 이들을 쭉 훑어보았다.
“그러니 감히 부탁드리겠습니다. 소림이 먼저 내려놓겠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께서도 자존심 때문에 더 많은 이들을 살리고, 천하를 구할 기회를 거부하지 말아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모두가 숨까지 참은 듯 조용해졌다. 법정이 그 자리에서 천천히 고개를 숙였기 때문이다.
얼굴을 더없이 굳힌 당군악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건…… 외통수다.’
그간 천우맹이 내세웠던 명분. 그리고 지키려 했던 가치. 그건 바로 협의였다. 이는 천우맹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협의가 지금은 오히려 더없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목을 겨누고 있었다.
‘법정…….’
순간적으로 법정이라는 인간에 대해 지독한 공포를 느낀 당군악은 저도 모르게 제 허벅지를 콱 움켜잡았다.
누군가가 목을 커다란 동아줄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조여 오는 듯한 압박감이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