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2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2)
방 안의 분위기는 매우 기묘했다.
물론 이곳에 있는 이들에게 법정은 그리 낯선 이가 아니었다. 그간 법정이 화산을 찾아와 먼저 대화를 청한 적도 여러 번이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간 법정과 대화하는 이는 보통 현종이거나, 청명이었다. 이처럼 많은 이들과 함께 자리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그러니 분위기 자체가 미묘해질 수밖에 없었다. 누구도 선뜻 먼저 입을 열 수 없었으니까.
그 분위기를 풀며 입을 연 것은 당연히 현종이었다.
“차라도 내어 와야 할 터인데, 제가 준비가 부족하여.”
“아닙니다, 맹주님.”
법정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보아하니 이곳이 맹주님의 처소인 모양인데, 참으로 검소합니다. 맹주님의 인품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그저 타향살이에 제대로 세간을 갖추지 못한 것뿐이지요. 어찌 검소함이겠습니까.”
“하하. 여전히 겸손하십니다. 맹주님만 뵈면 소승이 참 부끄럽습니다.”
“중대가리 입에 침이나 바르……. 읍! 으으읍! 읍!”
자연스레 청명의 입을 틀어막은 이들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고, 유이설과 당소소가 양쪽에서 청명의 옆구리를 퍽퍽 찍었다.
“…….”
법정이 ‘참 너도 너다’라는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자 현종이 시뻘게진 얼굴로 대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아시겠지만…….”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법정이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평범한 이가 하는 괴행은 무례가 되지만, 영웅이 하는 괴행은 민담이 되는 법 아니겠습니까? 화산검협은 이미 그 자격이 충분하지요.”
현종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참 자랑스러운 제자 놈인데, 때로는 참, 진짜, 정말 부끄럽다.
“드릴 말씀이 없…….”
“그냥 드리는 말이 아닙니다.”
“예?”
법정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화산검협이 항주에서 이룬 일과, 그간 세상을 위해 한 일을 본다면 그의 앞에서 예를 차려야 할 이는 오히려 저입니다. 누가 더 천하만민을 도왔는지는 눈에 보이도록 뻔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
“그러니 괘념치 마시길 바랍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떨떠름하게 답한 현종은 머릿속이 조금 분주해졌다.
‘무슨 생각이지?’
물론 그가 법정의 속내를 훤히 파악할 수야 없겠으나, 일단 지금 법정의 말과 태도에는 가식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현종도 대체 어떤 태도로 법정을 대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미 감정이 상할 대로 상한 상태지만, 그렇다고 예를 차리지 않을 수도 없잖은가?
“방장.”
“말씀하시지요, 가주.”
당군악이 굳은 얼굴로 법정을 보며 말했다.
“덕담을 나누는 것도 좋으나, 어쩐 일로 이곳을 찾으셨는지.”
“흠!”
불쾌한 듯 헛기침 소리를 낸 것은 다름 아닌 종리형이었다.
“당가주께서 천우맹의 이인자라 하시더니, 천우맹의 위세가 대단하기는 한 모양입니다. 맹주도 아니신 분께서 방장께 채근하는 걸 보니 말입니다.”
당군악이 말없이 종리형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종리형 역시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그 시선을 맞받았다.
“그렇지요. 너무 반가운 마음이 앞서서 그만.”
하지만 그들의 짧은 대치는 법정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의해 자연히 풀릴 수밖에 없었다.
법정이 천천히 반장을 하며 깊이 예를 표했다.
“먼저 구파일방을 대표하여, 항주의 환란을 제압해 주신 분들께 감사를 표합니다.”
“어찌…….”
“길이 남을 협행이었습니다. 제 식견이 짧아 여러분께서 이리 훌륭히 일을 마치실 줄 몰랐습니다.”
“…….”
“그리고 제 속이 좁아 더 일찍 와 감사를 드리지 못한 것을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게 어인 말씀이십니까, 방장. 이리 발걸음을 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법정이 자신을 계속 낮추니, 현종의 자세도 갈수록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소림 방장이라는 직위의 힘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그토록 욕하고 뒷담화를 해 대었음에도, 눈앞에 방장이 앉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렇게 긴장이 되니 말이다. 특히나 저리 예의를 차리는 방장을 앞에 두니 더 그랬다.
“다 끝나고 감사하다고 할 거면 애초에 돕기라도 하든가.”
“청명아!”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이제 좀 얌전해진 것 같아 풀어 주었더니 청명이 톡 쏘아붙여 버렸다. 백천이 얼른 다시 그의 입을 틀어막으려는 찰나, 법정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네. 내가 어리석었네.”
“…….”
“그리고 이 감사를 받아야 할 이는 누구보다 자네겠지. 고맙네.”
고개를 숙이는 법정을 잠깐 멍하니 보던 청명이 순간 두 눈에 쌍심지를 켰다.
“아! 알았다!”
“으, 으응?”
“너 이 새끼, 하오문주지!”
“……으응?”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사파 새끼가 대왕 대머리 행세……. 읍! 으읍!”
청명이 다시금 끌려갔다. 이번에는 유이설과 당소소 옆에 혜연까지 들러붙어 청명의 옆구리를 퍽퍽 때려 댔다.
“끄으으으읍!”
하지만 청명을 말리는 이들도 황당해하는 마음은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조걸과 당소소는 내심을 전혀 숨기지 못한 채 ‘이 새끼가 오는 길에 뭘 잘못 처먹었나?’ 하는 얼굴로 법정을 바라보았다.
“이상하십니까?”
그들의 그런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법정이 웃는 낯으로 현종에게 물었다.
“이상하다기보다는…….”
현종이 입을 가린 채 작게 헛기침하고는 말을 이었다.
“이전과는 조금 달라지신 것 같아, 조금 당황스럽습니다.”
“그리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그저 조금 물러나 한 발 뒤에서 바라본 것뿐입니다.”
“한 발 뒤에서요?”
“아미타불.”
법정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행을 하는 이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아집인 걸 알고 있었음에도, 어느새 제가 아집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걸 비로소 깨달았을 뿐입니다.”
“…….”
“사람에게는 누구나 추구하는 선(善)이 있는 법이지요. 그 선이 나와 다르다고 해서 잘못된 게 아닌 것을 잊은 채, 저는 제 선만을 강요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방장.”
“틀리다 생각했던 것이 결국 옳다 밝혀졌다면, 제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지만……. 예, 맹주님. 저는 그것을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틀리지 않은 것을 두고 틀렸다고 소리쳐 댔지요. 그럴수록 제 안의 미혹이 커질 뿐이었습니다.”
현종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지금 법정이 하는 말은 화산의 도(道)와도 닿아 있는 말이다.
법정이 빙그레 웃었다.
“그래서 내려놓았습니다. 그저 공(空)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방장. 그렇습니다.”
현종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오늘은…….”
“사과를 드리고, 또 하나 제안드릴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제안이라 하셨습니까?”
“예, 제안입니다.”
법정이 미소를 띤 채 말했다.
“모든 걸 내려놓고 보니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내 아집 때문에 모두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것도 말입니다.”
현종이 잠깐 멈칫하며 물었다.
“저희 모두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의미이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어찌……?”
“……아미타불.”
눈을 감고 나직이 불호를 왼 법정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흔들림 없는 눈으로 현종을 마주했다. 그 안에 담긴 진중함에, 현종의 등허리에 절로 긴장이 서렸다.
“지금 중원이 어떤 상황인지는 맹주님께서 더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현종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며 법정이 말을 이었다.
“강남은 사파의 악적들에게 시달리고 있고, 저들은 언제고 장강을 넘어 강북을 침탈하려 들 것입니다. 그리고 백 년 만에 그 마교도 다시 종적을 드러낸 상황입니다. 풍전등화, 백척간두라는 말이 조금도 과하지 않다 보아야겠지요.”
“으음,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중원을 지켜 내어야 할 저희는 어떻습니까? 그저 서로 반목만을 거듭하고 있지 않습니까?”
청명의 눈꼬리가 또다시 뾰족해진 순간, 법정이 살짝 자조하듯 말했다.
“물론 그 대부분 원인은 다름 아닌 저에게 있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리 찾아뵙고 사죄를 드리려 한 것이지요. 다시 한번 죄송할 따름입니다. 소승이 너무도 모자라…….”
“아, 아닙니다, 방장. 그게 어찌 방장만의 잘못이라 하겠습니까? 제 잘못 역시 크겠지요.”
법정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맹주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빈승이 더욱 부끄러워집니다. 지금껏 우물 안에서 살아오다 보니, 세상이 모두 제 뜻대로 흐를 줄만 알았습니다.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으면 반성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을, 그 쥐톨만 한 자존심을 버리지 못해 세상을 뒤틀어 바라봤던 모양입니다.”
“방장…….”
현종이 흔들리는 눈으로 법정을 바라보았다.
소림의 방장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내려놓고 말한다면, 그 말에 담긴 진심 정도는 믿어 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심지어 법정의 옆에 앉은 종리형조차도 법정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는 듯,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럼 그 제안이라 하심은…….”
“본디 사파가 융성하고 마교가 발호할 때,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해야 할 일은 너무도 당연했습니다. 그저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지 못하여 먼 길을 돌아왔을 뿐이지요.”
“…….”
“하여, 저는 맹주님께 제안드리고자 합니다. 아직은 늦지 않았을 테니, 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 전에 이제라도 화합을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현종이 망설일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건 현종의 입장에서는 바라마지 않던 일이다. 그저 법정과 구파일방이라는 곳을 믿을 수가 없었을 뿐, 이들이 자신을 내려놓고 함께하기를 원한다면 그가 거절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방장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당연히 관계를…….”
“아닙니다, 맹주님.”
“예?”
하지만 법정이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것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제가 왜 화산을 인정하지 못하고 배척하였는지 아십니까?”
“그, 글쎄요.”
“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해의 여지가 있는 말에 화산 제자들이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법정은 이어지는 말로 그들의 오해를 풀어 주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한 울타리 안에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줄 알았던 곳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니, 밉고 화가 났습니다. 예, 이게 모두 제가 모자라서 그런 것이지요. 하지만…… 맹주님. 세상은 잘난 이들만이 사는 곳이 아닙니다. 누군가는 저같이 모자라기도 하겠지요.”
“……그럴 것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그리고 천우맹의 화합은 그저 요식 행위에 불과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지금은 그저 사이좋은 척할 뿐, 결국은 다시 갈라질 거라고 말입니다.”
그 말에 듣고 있던 이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그들만 해도 그 인식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럼 어찌하자는 말씀이신지?”
“버려야지요. 가지고 있는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선은 울타리를 허물어야겠지요. 그러기 위해서 방법은 그저 하나뿐입니다.”
법정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청천벽력 같은, 또한 당황스러운, 그리고 또 어쩌면 바라마지 않던 말을 내뱉으며.
“천우맹을 해체하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십시오. 소림은 화산의 구파일방 복귀를 정식으로 요청드립니다.”
경악한 이들의 입에서 새어 나온 헛바람 소리가 방 안을 순식간에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