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1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1)
“방장, 이건…….”
굳게 닫힌 장원의 정문을 향해 걸어가면서도 법정에겐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종종걸음으로 따라붙은 종리형은 복잡한 심사를 어쩌지 못하는 얼굴로 다급히 그를 만류했다.
“방장. 이대로 시간만 죽이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말씀드린 건 분명히 저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
“아미타불.”
작게 불호를 왼 법정은 종리형을 돌아보며 빙그레 웃었다.
“장문인.”
“예?”
“감사합니다, 장문인. 장문인께서 하신 말씀 덕분에 눈이 뜨였습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제게 결과의 최선을 생각하라 하셨지요.”
“예, 맞습니다. 제가 분명 그리 말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법정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 덕분에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이 가장 옳은 길인지 말입니다.”
“하, 하오나, 방장.”
“옳다……. 예, 옳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지요. 그동안 제가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작은 미혹 하나가 끝없이 커져 사람을 삼키는 것이 심마라 하더니, 제가 심마에 걸렸던 모양입니다. 덕분에 찬물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들었습니다.”
종리형이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 내었다.
“방장……. 제가 방장의 깊은 뜻을 짐작이나 하겠습니까. 하지만 아무리 깊은 뜻이 있다고 하셔도, 이리 갑작스레 저들이 거하는 곳에 방문하는 건…….”
“안 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리 급한 일이라면, 차라리 저들을 불러들이지 그러셨습니까. 소림의 방장께서 천우맹을 찾아갔다는 말이 돌면 사람들이 오해라도 할까 무섭습니다.”
“하하. 그럴 일이 아닙니다.”
“예?”
법정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일전에는 현종진인께서 저를 찾아오셨으니, 이번에는 제가 찾아오는 것이 이치에 맞겠지요.”
“그, 그게 어찌 이치에 맞습니까? 서로 입장이 다르고, 서로 가진 신분이 다를진대.”
“글쎄요. 제게는 딱히 거리낌이 없습니다. 되레 저들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머물러서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결심이 서자마자 저들을 이리 만날 수 있으니 말입니다.”
“…….”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 잘될 것입니다.”
종리형의 입에서 한숨이 푹 새어 나왔다.
“대체 뭘 하시려는 것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답해 드리기 어려울 게 뭐가 있습니까? 저는 저들에게 손을 내밀려 합니다.”
“예? 바, 방장. 천우맹과 우리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지 않았습니까?”
“아직은 돌이킬 수 있지요.”
종리형이 황당하단 얼굴로 법정을 바라보았다.
“그, 그럼 저들이 제안을 거절하면 그땐 어찌하시렵니까?”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만약에라도…….”
“흐음, 글쎄요. 모르겠습니다. 제가 아는 저들이라면 거부하지 않겠지만, 만일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법정의 눈이 살짝 어둡게 가라앉았다.
“아니,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종리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법정의 뒤를 따랐다.
‘대체 무슨 제안을 하시려는 거지?’
방 안에서 며칠은 끙끙 앓던 사람이 갑자기 문을 박차고 나오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천우맹으로 향했다. 괴이한 것은 법정의 표정이 이제까지와는 달리 더없이 산뜻하다는 점이었다.
‘정말 갑자기 대오각성이라도 하신 겐가?’
물어 봐야 대답을 해 주지 않으니 답답할 노릇이 아닌가?
‘지켜보는 수밖에.’
정문을 지키던 위사들은 다가오는 법정을 보고는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리고 있었다. 충분히 그럴 만했다. 소림의 방장이 갑자기 방문하는 상황을 저들이 상상이나 해 본 적 있겠는가?
일전에 본 적이 있어서 멀리서부터 법정을 알아보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일 일이었다.
“장문……. 아니, 맹주님은 안에 계시는가?”
“바, 방장을 뵙습니다.”
“허허. 그리 긴장하실 것 없네. 그저 차나 나누러 왔을 뿐이니.”
“여, 연통은 넣어 두었습니다. 드, 들어가시지요!”
“나를 들여보내라는 명이 왔던가?”
“그…건 아닙니다만.”
“그럼 이곳에서 기다리겠네. 주인의 허락 없이 객이 안으로 드는 것은 예가 아니겠지.”
“그…….”
위사들이 떨리는 눈으로 서로 시선을 교차했다. 대체 어찌 대답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때 다행스럽게도 안쪽의 문이 절로 열렸다.
쾅!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현종이 격하게 문을 연 것이다. 문 앞에 서 있는 법정과 종리형을 발견한 그는 살짝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방장.”
“맹주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느릿하게 반장 하는 법정을 맞아 현종도 깊이 포권 했다.
“미리 말을 전해 주셨으면 제가 마중을 나왔을 터인데, 어찌 이리 연통도 없이 갑자기…….”
“생각이 나서 들렀습니다. 한번 마음이 들뜨니, 느긋이 예를 갖출 시간이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맹주님.”
“아닙니다. 외려 기쁘기 한량없는 일이지요.”
“함께 오신 분은 공동의 장문이십니다. 서로 면식은 있으시지요?”
“화산의 현종입니다. 공동의 종리 장문인을 뵙게 되어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아닙니다, 맹주님. 제가 더 영광입니다.”
현종이 밝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작은 의혹을 담고 법정을 살피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법정은 감정의 날을 있는 대로 드러냈었다. 한데 지금의 법정은 그때와는 사뭇 달라 보였다. 오히려 처음 마주했을 때 느껴졌던 여유와 부드러움이 가득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그럼 염치 불고하겠습니다.”
법정이 현종을 따라 장원 안으로 향한다.
현종의 한 발짝 뒤에서 그를 따르던 법정이 이내 마당에 나와 그를 기다리고 있는 이들을 마주했다.
“다들 오랜만에 뵙습니다.”
법정이 푸근한 미소와 함께 말을 건넨다. 그 인사에 누구는 슬쩍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고, 누구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쨌든 대부분이 떨떠름한 속내를 감추기에 바빴다.
“당 가주께서도 계셨군요.”
“여기가 제가 있을 곳 아니겠습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방장.”
“소가주께서도.”
“……반갑습니다.”
서로의 마지막이 그리 유쾌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남궁도위는 평소처럼 깔끔한 예의를 보여 주지 못했다.
“이쪽은?”
“예. 이쪽 분들께서는 야수궁의 궁주와 빙궁의 궁주십니다.”
“아아.”
법정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귀한 분들을 만나 뵙게 되어서 참으로 반갑습니다.”
“맹소입니다.”
“서, 설소백이라 합니다.”
법정이 이번에는 반장을 취하지 않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천천히 고개를 든 법정의 시선이 뒤쪽에 있는 한 사람에게로 향했다. 기다렸단 듯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뭐 얻어 처먹을 게 있다고 또 쭐레쭐레 처기어들……. 읍! 읍읍! 으으으읍!”
백천과 윤종, 조걸이 동시에 청명의 입을 틀어막았다.
법정의 입에서 처음으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자네는 여전하군.”
“으읍! 으읍!”
유이설과 당소소에게 팔다리를 잡힌 청명이 시뻘게진 얼굴로 뭐라 뭐라 소리쳐 댔지만 안타깝게도 들리지 않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버린 법정은 다른 이들을 돌아보며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뗐다.
“여러분들과 담소를 나누고 싶은 마음은 가득하나, 사적인 일로 온 것이 아닌지라 긴 시간 낼 수 없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 아닙니다.”
“공무가 급하신데 그리하셔야지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법정의 시선이 현종에게 가 닿았다.
“맹주님. 따로 잠시 뵈었으면 합니다.”
“그러시지요, 방장.”
법정의 시선이 당군악에게 닿았다.
“그리고 가주께서도.”
“그리하겠습니다.”
현종과 당군악을 뺀 다른 이들이 뒤로 물러나려 할 때였다.
“소가주께서도 오시게.”
“……저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남궁도위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법정이 맹소와 설소백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원래는 당연히 두 분을 응당 모셔야 하겠으나, 제가 이제 논하려 하는 것이 중원 내의 민감한 일인 만큼 동석을 권하지 못하니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충분히 이해합니다.”
“예, 괜찮습니다.”
빙긋 웃음을 지어 보인 법정은 아직도 읍읍 소리를 내며 몸부림치는 청명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자네도 들어오게, 그리고 자네 곁에 있는 다른 화산 제자들도 함께.”
“……저희도 말입니까?”
“자네들이 없으면, 화산검협이 날 때려죽이려 할 때 말려 줄 이가 없잖은가?”
“그, 그게 무슨…….”
“하하하핫.”
법정이 건넨 농에 조걸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런데…… 중요한 사람이 하나 보이지 않는 것 같은데?”
“예?”
그때 유이설이 번충 쪽을 향해 턱짓했다.
“저기.”
“응?”
유이설이 가리킨 쪽으로 슬쩍 고개를 뺀 윤종이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거기서 뭘 하고 계십니까, 녹림왕?”
번충의 너른 등 뒤쪽에서 머리를 감싼 채 쪼그려 앉아 있던 임소병이 화들짝 놀라 재빠르게 눈을 굴렸다.
“하, 하하하……. 저는…….”
“음. 녹림왕이시군.”
법정이 빙그레 웃으며 임소병을 바라보았다.
“어떤가? 오시겠는가?”
“히이이익!”
“응?”
“자,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나쁜 짓 하지 않겠습니다!”
“…….”
“제, 제가 산적이 되려고 된 게 아니옵고……!”
“그 녹림…….”
“으아아아아악!”
임소병이 새된 비명을 내지르며 전각 뒤쪽으로 달아나 버렸다.
모두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본다. 심지어 법정마저도 입을 벌리고 눈을 끔뻑였다. 황당함을 어쩌지 못하고 입을 헤 벌리고 있던 윤종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백천에게 물었다.
“왜…… 왜 저럽니까?”
“음.”
백천이 겸연쩍은 얼굴로 제 뺨을 긁적였다.
“전에 저 양반한테 들은 말인데, 소림 중한테 맞아서 피떡이 된 채 죽은 산적 시체만 다 끌어모아도 장강 반은 채운다더라.”
“…….”
“남궁은 싫은 정도지만 소림은 무서운가 봐. 피에 새겨졌는지, 어떻게 해 보려 해도 안 된다는데.”
“그게 말이 됩니까?”
“중대가리 보면 무서워서 쪼는 인간만이 살아남아 이어진 게 녹림이라던데, 나도 뭔 말인지 잘 모르겠다.”
“그럼 혜연 스님한텐 왜 그럽니까?”
“파계승은 산적으로 전직하는 게 기본이라 안 무섭대.”
“……파계 아닌데.”
임소병의 빈자리를 황망한 표정으로 보던 법정이 고개를 내저었다. 현종이 민망한 듯 그를 안내했다.
“이쪽으로 드시지요.”
“예. 감사합니다, 맹주님.”
함께 참석하기로 한 인원들이 안으로 향하자, 마당에 남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설소백이 고개를 갸웃했다.
“듣던 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네요.”
“어떤 부분이 말이냐?”
맹소의 말에 설소백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동안 들은 바로는 참 나쁜 분 같았는데…….”
“이리 보니 생각보다 좋은 사람 같다?”
“……네. 그저 그리 보이는 것이겠죠?”
“아니. 아마도 저 법정이란 중은 그 생각대로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예? 그럼 왜……?”
맹소는 느리게 팔짱을 꼈다. 그리고 법정이 들어간 방문을 바라보다 나직이 중얼거렸다.
“때로는 올곧은 선인이 악인보다 더 무서울 때도 있는 법이지.”
설소백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