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0화. 모든 정파가 버린 문파라. (5)
“버림이라니, 사매.”
백천이 눈살을 찌푸리며 유이설을 돌아보았다.
오검은 서로 못 할 말이 없는 사이다. 사선을 함께 몇 차례나 넘나든 그들의 유대는 어쩌면 혈연보다 더 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관계가 그렇다 해도, 지금 유이설의 발언은 분명 선을 넘었다.
“이건 우리가 만든 상황도 아니잖느냐.”
“네.”
하지만 유이설은 여전히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
“하지만 같아요, 결과는.”
“…….”
“그저 물어본 것뿐.”
거기까지 말한 유이설은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어쩌면 여기에서 끝낼 수 있었던 화제였을지도 모른다. 이곳에 모인 이들이 처세에 능하고 제 생각을 숨기는 데 능숙한 이들이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안타까운 일인지, 아니면 다행스러운 일인지 대화는 이걸로 끝나지 않았다.
“……어떻게 되는 겁니까?”
누구라도 꼭 해야만 했던 질문을 던진 게 유이설이라면, 그 화제를 이어 간 이는 바로 윤종이었다.
윤종의 시선은 임소병에게로 향해 있었다. 이 상황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을 이. 아니, 어쩌면 이 상황을 가장 객관적으로 이야기해 줄 이를 향해서.
“그럼 해남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글쎄요.”
임소병은 곤란하다는 듯이 부채 끄트머리로 머리를 긁적였다.
“물론 뭐, 해남파도 생각이 없는 이들은 아니니 자신들이 가장 먼저 해를 입을 가능성이 크다는 걸 알고 있을 겁니다. 당연히 탈출에 대한 계획도 세우고 있겠죠. 바보가 아니라면.”
“아, 당연히 그렇겠…….”
그때 임소병은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하지만 저들만으로 가능한 일이었다면 이미 해남도에서 발을 뺐을 겁니다.”
안도감이 잠깐 깃들었던 윤종의 표정이 다시 딱딱하게 굳었다.
“아직 상황을 보고 있을 수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 말입니까?”
윤종이 차마 대답하지 못하자 임소병이 심드렁하게 말을 이었다.
“여러분께는 이 상황이 지금 갑작스레 벌어진 일 같겠지만, 해남에게는 살갗에 닿은 지 오래된 현실입니다. 그들은 아마 몇 해 전부터 이런 상황에 내몰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았을 겁니다. 만약 제가 해남파의 문주라면 장강에서 매화도 사태가 벌어졌을 때, 둘 중 하나는 선택했을 겁니다. 뒤도 안 돌아보고 섬을 탈출하든가, 그게 아니면 사패련의 뒤를 치려 하든가.”
“……그렇겠죠.”
“그 둘 모두를 선택하지 못했다는 건, 뭔가 이유가 있었다는 거겠죠. 그 이유가 뭔지는 모릅니다. 말 그대로 삼천 리나 떨어진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저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지만…… 짐작 가는 바가 있기는 하죠.”
“짐작이 가신다면……?”
“마지막까지 장강에 합류하지 않았던 사파 놈들이 있잖습니까.”
“하오문?”
“예.”
탁.
임소병이 부채로 제 손바닥을 가볍게 두드렸다.
“하오문은 정보를 다루는 특성상, 넓은 지역을 감시하기 좋은 문파입니다. 생각이 있는 이라면 해남을 감시하는 역할은 하오문에 맡겼겠죠.”
“자, 잠시만요. 하오문주는 항주에…….”
“감시에 문주까지 필요하겠습니까? 일이야 밑의 놈들이 하는 거지.”
“…….”
“어쩌면 하오문주는 해남파를 감시한다는 핑계로 그간 장일소의 압박을 피해 온 것인지도 모르지요. 그러다가 이제 더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장일소에게 완전히 굴복했을 겁니다.”
일리가 있다는 듯 윤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결국, 해남이 어디로 상륙하더라도 그들을 잡아 죽일 준비를 장일소가 미리 해 놨다는 거겠죠. 그 용의주도한 놈이 등 뒤에 있는 칼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테니까.”
조걸이 이해 못 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그럴 거면 진작 제거했으면 되는 일 아닙니까? 지금까지 내버려 둘 이유가…….”
“구파일방에 속한 문파를 공격한다는 건 구파일방 전체를 완전한 적으로 돌리겠다는 선전포고나 다름없습니다. 그건 장일소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아니었겠지요. 적어도 매화도 사태 전까지는 말입니다.”
그 말에 조걸의 입이 꾹 닫혔다. 대신 윤종이 다시금 물었다.
“말이 조금 샌 것 같습니다만…… 그래서 해남파는 어떻게 된다는 소립니까?”
“글쎄요. 굳이 그걸 제게 묻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윤종 도장.”
임소병이 실소를 머금었다.
“뻔히 알고 계시면서 아무것도 짐작 못 하는 척하시는 겁니까?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답답하다는 듯 착한 척이라도 해 보시려고요?”
한껏 비아냥거리는 말에 다른 오검이 발끈했지만, 윤종은 그저 담담히 임소병의 말을 되받았다.
“그저 녹림왕의 의견을 확인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의 흔들림 없는 눈이 임소병을 응시했다.
“제 생각은 완전하지 못하고 짧으니까요. 그러니 저보다 훨씬 판세를 잘 읽고 계신 분의 생각을 듣고자 함입니다. 그래야 틀리지 않은 선택을 할 수 있으니까요.”
말없이 빤히 윤종을 바라보던 임소병이 순간 겸연쩍은 표정을 짓더니 제 머리를 다시 긁적였다.
“죄송합니다. 괜한 소리를 했군요.”
고개를 끄덕인 임소병이 허심탄회하게 입을 열었다.
“장일소는 후환을 남겨 두는 이가 아닙니다. 그리고 정파를 자신의 밑에 모조리 굴복시키겠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릴 지껄일 만한 이도 아니지요. 장일소의 무서운 점은, 어처구니없는 야망가이자 몽상가에 가까운 놈이, 그 몽상을 이뤄 나가는 방식은 지독할 정도로 현실적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런 장일소가 선택할 방법이야 뻔하지 않겠습니까.”
임소병의 눈빛이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겁니다.”
“…….”
“일부러라도 악착같이 찾아 죽이겠지요. 아마 어린아이, 어른 관계없이 해남파라는 이름을 쓰는 이들은 모조리 씨를 말리려 들 것입니다.”
쥐 죽은 듯한 침묵이 방 안을 메웠다. 한참 만에 입을 연 이는 역시나 윤종이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뭐, 이유라면 당연히 있지요.”
임소병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그래야 사패련이 강북 땅에 들어왔을 때, 어중이떠중이들이 대항하지 못할 게 아닙니까?”
“어중이떠중이?”
“작은 문파, 낭인들, 은거해 살아가는 이들, 사패련이 장강에서 중원으로 들어왔을 때 주력의 등 뒤에서 방해를 하고 보급선을 노릴 수 있는 이들.”
임소병이 혀를 차 댔다.
“사파의 입장에서 보자면, 우리가 중원을 정복하는 것을 번번이 좌절시켜 오던 이들이죠.”
“아…….”
“그런 이들에게 본보기를 보이는 겁니다. 사패련에 적대하는 이들은 개미 새끼 한 마리 살아남지 못한다고, 그렇게 되면 원래는 당연히 구파일방이나 천우맹에 합류해서 함께 싸웠을 중소문파들도 망설이게 되고, 목숨을 걸고 싸울 협사들도 한 번은 주저하게 되지요.”
윤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고작 그런 이유로…… 고작 그런 본보기 때문에 그리 잔인한 수를 쓴단 말입니까?”
“고작 그런 이유?”
하지만 임소병은 그답지 않게 서릿발 같은 시선으로 윤종을 노려보았다.
“도장은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들이 대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동네 아이들이 작대기를 들고 뛰어다니는 병정놀이쯤으로 보시는 겁니까?”
“…….”
“이건 전쟁입니다.”
크게 놀라운 말도 아니다. 하지만 이 말이 처음으로 이곳에 있는 이들에게 지금의 상황을 실감하게 했다.
“전쟁에서 도와 협의를 논할 생각하지 마십시오, 도장. 전쟁에서는 승리가 도고, 이긴 자가 협의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뭐, 맞는 말이지.”
“청명아!”
“정확하게는 ‘패한 이의 협의 따위는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다’가 맞겠지.”
윤종이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청명은 그런 그를 잠시 보다 임소병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지. 안 그래?”
청명이 투명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임소병이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습니다. 예전이면 그게 다라고 했겠지만.”
윤종과 임소병이 서로 한 발씩 물러나니 분위기가 소강상태로 들어갔다.
“크흠.”
그리고 그 조용해진 분위기 속에서 당군악이 입을 열었다.
“……해남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내 생각에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군.”
그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애초에 해남은 천우맹의 소속도 아니잖은가. 사실 그들이 먼저 우리에게 손을 내민다면 모를까, 우리가 저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도와주겠다고 하는 것도 어찌 보면 주제넘은 짓이지.”
“네. 주제넘은 짓입니다.”
그 말에 대답한 건 다름 아닌 백천이었다.
“하지만 가주님. 누군가 그 주제넘은 짓을 하지 않는다면 해남파는 정말 무너지게 될 겁니다.”
“이보게. 백천 도…….”
“그리고.”
백천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누군가 한 번쯤은 그런 주제넘은 짓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랄 때가 있었습니다.”
“…….”
“대놓고 도와달라고는 할 수 없고, 자존심 때문에 고개를 숙일 수는 없었지만, 그 누구보다 간절하게 말입니다.”
“그건…….”
“우리가 여기서 해남을 외면하게 된다면 구파일방도, 천우맹도 저들을 버리는 게 됩니다. 그 어디에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되겠죠.”
지금껏 입을 닫고 있던 남궁도위도 입을 열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당군악의 시선을 느낀 남궁도위가 빙긋 웃었다.
“그 무모한 도움 덕분에 저는 지금 여기에 살아 있으니까요. 포위된 채 죽음만 기다리는 이의 심정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소가주…….”
“그곳으로 가야 할 이가 필요하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남궁은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보게, 소가주. 자네는 남궁세가를 다시 일으켜야 할…….”
“훗날의 많은 것을 위해 지금 해야 할 것을 외면하는 게 남궁의 길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
“그럴 바에는 차라리 옳은 뜻을 위해 죽는 것이 남궁에 걸맞은 길이겠지요.”
당군악이 저도 모르게 현종을 바라보았다. 현종은 그저 굳은 얼굴로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답답해진 당군악이 뭐라도 말하려 할 때, 그의 귓가에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청명이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천하의 모든 정파가 버린 문파라……. 그래. 그거 확실히 어디선가 많이 듣던 이야기네.”
“화산검협.”
청명이 싸늘한 시선이 백천과 남궁도위를 동시에 꿰뚫었다.
“하지만 똑똑히 알아 둬. 그 실패의 대가를 너희의 죽음 따위로 치를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 그 실패는 천우맹의 패배와 사패련의 승리로 이어질 수도 있어. 그럼 너희의 그 치기가 이곳에 있는 이들 모두를 지옥으로 끌고 들어가게 될 거다.”
“…….”
“다른 이들은 협심이 없어서 입을 다물고 있다고 생각해? 어른이 좀 돼라. 이 썩을 애송이 새끼들아.”
백천이 입술을 짓깨물고 청명을 노려보았다.
“그럼 너는 대체 뭘 어떻게 하고 싶은 거냐? 그냥 외면하자는 거냐?”
“나는…….”
청명이 무언가 말을 하려 할 때였다.
“매, 맹주님!”
문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그 목소리에 어린 심각함을 알아챈 현종이 재빨리 소리쳐 물었다. 이윽고 방 안에 있는 모두가 귀를 의심하게끔 하는 말이 들려왔다.
“소, 소림 방장께서 오고 계십니다!”
“……뭐라고?”
현종이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눈을 부릅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