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9화. 모든 정파가 버린 문파라. (4)
“엥?”
“네가?”
황당하다는 듯한 시선이 쏟아지자 청명이 얼굴을 확 일그러뜨렸다.
“왜? 나는 반대하면 안 돼?”
“사실 그게 이상한 게 아니지.”
“아니, 따지고 보면 네가 다른 사람 말을 순순히 듣는다는 게 훨씬 더 이상하긴 하지.”
청명학 권위자인 백천의 마지막 말에 모두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정확하십니다.”
“여윽시 사숙이다.”
“이 새끼들이?”
하지만 청명이 눈을 부라리자 일제히 슬쩍 시선을 피했다. 저도 모르게 같이 눈을 내리깔았던 당군악이 이내 움찔하며 재빨리 고개를 제자리로 돌렸다.
“화산검협.”
“네.”
“자네의 생각은 어떻기에 그러는가?”
그러자 청명이 고개를 슬쩍 들어 지도를 바라보았다.
“야, 똑바로 들어 봐.”
“예, 형님!”
번충이 얼른 지도를 바짝 펴며 위로 올렸다. 녹림왕이 시킬 때보다 훨씬 더 바짝 군기가 든 모양새였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기이하게 여기지 않았다. 웬만큼 이상한 일도 청명이 얽히면 그러려니 하게 되는 법이니까.
청명이 귀를 후비적대며 말했다.
“뭐. 나라고 대왕 대머리가 열받아서 잘 익은 문어 대가리 꼴이 되는 게 싫은 건 아니죠.”
“누구보다 바라겠지.”
“내 생각에는 그날 저 새끼 등선한다.”
“……선계에서 받아는 줍니까?”
“아……. 그건 생각 못 했네.”
청명이 등선이라도 하는 날에는 선계에서 대책 회의를 열어야 할 것이다. 저런 걸 신선이라고 받았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가 없으니까 말이다.
“물론 그렇겠지. 게다가 이건 단순히 소림과의 감정만 두고 논할 일이 아니잖은가?”
당군악이 진중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소림을 엿 먹이……. 크흐흐흠! 아니, 소림에 묵은 감정을 푸는 것은 그저 부가적인 일에 지나지 않네. 중요한 건 천우맹의 전력을 강화하고, 천우맹이 이제는 구파일방과 대등한 곳이 되었다는 것을 천하에 확인시키는 일이지.”
“음.”
“자네도 알다시피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네. 정석적인 방법으로 구파일방보다 큰 영향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앞으로 백 년도 부족하겠지.”
이 말에는 심지어 현종조차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이 멸망일로(滅亡一路)를 걷고 있을 때, 현종의 꿈은 언젠가 다시 구파일방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룰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구파일방에서 자문이 쫓겨난 설움을 겪은 현종조차 그럴진대, 다른 이들이야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구파일방에 속한 한 문파가 구파일방이 아닌 천우맹을 선택하게 만들 수 있다면, 백 년이 걸릴 그 일을 단번에 해낼 수 있네. 그렇지 않은가?”
“뭐. 그렇기야 하겠죠.”
하지만 청명은 영 심드렁한 반응이었다.
“그런데 왜 반대를 하는 것인가? 천우맹을 더 강한 곳으로 만들어 사패련과 마교에 대항해야 한다는 건 자네가 언제나 주장하던 일이 아니던가?”
“아. 좋죠, 좋죠. 물론 되기만 한다면 좋은 일이죠.”
“응?”
청명이 씨익 웃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정해 봅시다. 저 맛탱이가 가 버린 사패련 새끼들이 우글거리는 강남. 저 또라이 장일소 새끼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오호호홋! 잘도 기어들어 왔구나!’ 하고 전속력으로 달려와 반겨 줄 강남 땅을 종으로 돌파하고.”
청명이 손가락을 따악 튀기자 현영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참고로 구강을 기준으로 하면, 해남도에 인접한 담강(湛江)까지 가는 데만 삼천 리를 가야 합니다.”
“히이이이익!”
“사, 삼천 리?”
“그것도 직선거리로.”
눈을 휘둥그레 뜬 윤종이 당소소를 돌아보았다.
“소, 소소야. 우리가 북해에 갔을 때 거리가 얼마였지?”
“그때……. 음, 그때 아마 오천 리쯤 되었을 거예요. 섬서에서 출발했었으니까.”
“부, 북해까지가 오천 리밖에 안 됐다고?”
조걸의 입에서 영혼 빠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때도 뒈질 뻔했는데.”
“……그러게. 진짜 죽는 줄 알았는데.”
“심지어 거기는 적이라도 없었잖아. 그런데 적밖에 없는 강남 땅을 질러서 삼천 리를 가야 한다고?”
모두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지도를 바라보았다. 중원 전역을 한 장에 그려 넣은 지도를 보고 있으니 현실감을 잠시 잃었었다. 삼천 리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실감이 났다.
“그, 그럼 얼마나 걸린다는 거야?”
“일반적인 상행이 기준이면 어디 보자…… 하루에 칠, 팔십 리 정도까지는 어떻게든 갈 수 있다고 치면…….”
“사, 사십 일?”
“운이 좋으면 한 달이겠지. 그것도 잘 닦인 공도로만 다녔을 때 말이야.”
“하……. 하하…….”
백천이 소리 내어 웃어 버렸다.
‘이건 안 된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저 사패련이 지배하는 강남에서 한 달 동안 생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해남까지 갈 필요도 없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무신(武神)일 텐데, 뭐 하러 전력을 강화하러 간다는 말인가? 그 시간에 그냥 사패련을 쓸어 버리면 그만이지.
“아니, 뭐. 가긴 간다고 쳐. 해남까지 간다고 치자.”
청명이 뚱한 얼굴로 귀를 후비적대며 말했다.
“가서 어쩔 건데?”
“그건 또 무슨 말이냐? 아! 무슨 말인지 알겠다. 음, 그런데 상황이 안 좋으니 해남파도 협조를 하지 않을까?”
“아니, 협조하면 어쩔 거냐고.”
“……어?”
청명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걔들이 정신이 나가서 ‘아! 안 그래도 우리도 저 대왕 대머리 새끼한테 열받아 있던 참이었소!’라고 한다 치자! 그래서 이제 천우맹에 합류한다고 쳐!”
“응.”
“그럼 ‘아이고! 이제 잘 부탁드립니다!’ 하고 그냥 돌아와? 그럼 지금이랑 바뀌는 게 뭔데?”
“……해남의 소속이 바뀌겠지.”
“아, 예. 그러시네요. 아주 조오오오은 일입니다. 그럼 이제 사패련 새끼들이 해남파를 때려잡기 시작하면, 멀리서 구경이나 하고 있었다는 소리를 우리가 듣게 되겠지. 저 대왕 대머리는 혀를 차면서 ‘구파일방이라면 도와줬을 텐데. 빌어먹을타불!’ 소리나 해 댈 거고.”
듣기만 해도 위장이 뒤틀리는 것 같다.
“……그럼 도와주……. 아니, 아니다.”
이건 조걸마저 하던 말을 중간에 끊어 버렸다. 그만큼 터무니없었다. 삼천 리가 넘게 떨어진 곳에 무슨 수로 병력을 보내 돕겠는가?
강남 최남단에 주력을 보낼 수 있을 정도면 돕고 말고 할 필요도 없다. 이미 거기까지 가는 동안 사패련을 모조리 무찌른 다음일 테니까.
“에이. 그건 생각을 너무 한쪽으로만 한 거지.”
“응?”
그때 조걸이 후후후 웃으며 말했다.
“나도 그동안 너한테 배운 게 있다니까. 이럴 때는 생각을 반대로 해 보면 되지! 사패련이 해남을 치면, 우리가 장강으로 쳐들어가는 거야! 그럼 전선이 양쪽으로 분리되니까!”
“아, 그래? 그럼 천우맹이랑 사패련에 전면전이 벌어진 옆에서 대왕 대머리가 신나게 손뼉 치겠지! 잘한다! 잘한다! 둘 다 싸워서 둘 다 다 뒈져라!”
조걸의 뺨이 미미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청명이 일갈했다.
“야, 이 미친 인간아! 해남파 하나 더 먹는다고 우리한테 뭐 사패련 때려잡을 힘이 생길 것 같냐? 전력이 약한 쪽이 하는 양동을 뭐라고 하는 줄 알아?”
“그, 글쎄?”
“각개격파다, 이 새끼야! 각개격파!”
발끈한 청명이 조걸을 향해 달리려고 하자 현종이 얼른 그의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청명아.”
“아니, 저 인간이 사람 속 터지게……!”
“그래, 그래. 하지만 그래도 회의 중이니 이따 때리거라.”
“끄응.”
청명이 앓는 소리를 내자 조걸이 고개를 푸욱 숙였다.
“으음. 하지만 화산검협. 나는 조걸 도장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네. 양동이라는 게 꼭 병력이 많은 쪽이 쓸 수 있는 전략은 아니잖은가. 어떻게든 구파를 움직일 방법만 찾아내면…….”
“그럼 장일소에게 말리는 거죠.”
“……어째선가?”
“그 새끼를 일반적인 인간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니까요? 그 새끼는 제 땅에 나타난 마교 놈들을 때려잡기 위해서 여기까지 찾아와서 무릎이라도 꿇겠다고 한 놈이에요.”
“…….”
“그런 장일소를 상대로 뒤를 친다?”
청명이 코웃음을 쳤다.
“장담하건대 장강으로 밀고 들어가는 순간, 아무렇지도 않게 병력을 뒤로 쭈우우우욱 빼 버릴걸요?”
“……자, 장강을 버린다고?”
“쯧쯧. 이래서 윗대가……. 아니, 윗사람들이란.”
청명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한번 가진 땅을 쉽사리 내놓지 못한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으니까 장일소가 응전할 거라 생각하는 거죠. 장일소는 지키는 놈이 아니에요. 공격하는 인간이지. 우리가 공격에 들어가면 장일소는 얼씨구나 하고 병력을 빼 버릴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야…….”
당군악이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공격해 들어가야겠지. 아니면 의미가 없으니까.”
“네. 해남까지 공격해 들어가야죠. 몇 리를?”
“……삼천 리.”
“네네. 병력을 이끌고 적당히 시간 끌어 주는 놈들 상대로 가면 한 한 달은 걸리겠네. 그 시간이면 장일소가 해남파 찜 쪄 먹고 거기다가 남해 별장 하나 지어 놓고 시도 한 세 수 정도 지으며 놀고 와도 될 텐데요.”
“…….”
“그렇게 장일소가 돌아오면?”
청명이 차가운 눈으로 지도를 응시했다.
“우리가 마교 사태 때 그렇게 우려했던 일이 정말로 벌어지겠죠. 강남 한중간에서 싸 먹힐걸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일이군.”
거리가 문제다, 거리가.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해남파가 공격당할 때, 그들이 도울 방법은 없다고 봐야 한다.
그때 백천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그러니까…… 나는 말이 왜 여기까지 왔는지 잘 모르겠는데. 우리가 처음 논했던 건 해남파를 거기 두는 게 아니었잖아. 그 해남파를…….”
“동룡아.”
“응?”
청명이 세상에서 제일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봐 오자 백천이 움찔해서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어, 그래. 해남 애들을 여기로 데리고 오면 끝이다, 그치?”
“그, 그래. 배가 문제기는 하지만, 어떻게든 그건 계획을 잘 짜서…….”
“어. 그래. 배 타고 육지 도착했어. 그럼 이제 어쩔 건데?”
“어쩌냐니? 그야…….”
“응. 해남파 애들 수만 해도 오백은 넘을 건데, 그걸 데리고 강남을 뚫어야 해.”
“…….”
“그 와중에 전력이 손실되면 의미가 없으니까 그걸 온전히 지켜서 말이야.”
“와……. 굉장한 업적이네?”
“뭐, 이 새끼야?”
“아, 좀 말로 하라니까! 말로!”
현종이 청명을 잡아당겼지만, 이번에는 청명도 쉽사리 진정하지 못했다.
“내가 그게 됐으면 여기서 고민하고 있겠냐? 그냥 강남 내려가서 장일소 모가지 따고 오지! 야, 이 미친! 사패련을 이기려고 전력을 강화하는 건데, 사패련을 때려잡아야 가능한 일을 끌고 와? 그걸 다들 우와우와 하고 있고? 야, 이 인간들아! 내가 너희 때문에 속이 아주 썩어 문드러진다, 문드러져!”
모두 헛기침하며 청명의 시선을 피했다.
한참을 씩씩거리던 그는 겨우 진정했는지 깊게 숨을 토해 냈다.
“계륵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야. 얻으면 좋지. 그런데 얻기 위해서 잃어야 하는 게 얻는 것보다 많아.”
“…….”
“대왕 대머리 새끼가 생각이 없어서 내버려 두는 게 아니라니까. 지도 답이 없는 거지. 이건 괜히 건드리면 오히려 덧나는 곳이야.”
“음, 확실히…….”
“우리가 생각이 너무 많았네.”
“아쉽다. 좋은 생각이었는데.”
모인 이들이 현실적인 어려움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이 나쁘지는 않지만, 이건 쉽사리 손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이대로 방관하는 쪽이 더 이득이다.
모두가 그 사실을 납득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유이설만은 그 와중에도 투명한 시선으로 말없이 정면으로 청명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무심한 시선에 꿰뚫린 청명이 눈을 가늘게 떴다.
“왜, 사고?”
“그럼 해남은?”
“응?”
“……해남파의 사람들은?”
“…….”
“이대로 버림받는 거야?”
청명이 문득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