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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158화 (1,159/1,567)

1158화. 모든 정파가 버린 문파라. (3)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할 말이 생긴 듯 입을 열었던 이도 차마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다시 닫아 버리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그만큼이나 임소병의 말이 남긴 파장은 대단했다.

“……남해라니…….”

“저 강남을 뚫고?”

누군가는 임소병이 세운 계획의 무모함에 아연실색했다.

강남은 말 그대로 사패련의 땅이다. 과거에도 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곳이지만, 지금은 말 그대로 용담호혈. 사지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은 곳이다.

그런 곳의 최남단에 위치한 문파를 지원하겠다니,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하긴 한 일인가?

“배는 대체 어떻게 구하고?”

“섬을 지원한다니……. 강북에 있는 섬도 아니잖아.”

누군가는 해남파가 자리한 해남도라는 위치 자체에 주목했다.

해남은 그들에게 더없이 익숙한 명칭이지만, 반면 끝도 없이 먼 이름이기도 했다. 해남이라는 이름을 들어 보지 못한 강호인은 존재하지 않겠지만, 해남도에 직접 방문해 본 사람 역시 손에 꼽을 지경일 터.

어떤 의미에서는 구파일방의 한 문파이되, 새외의 문파들보다 더 멀게 느껴지는 곳이 바로 해남파였다.

“아니, 잠깐만……. 애초에 이건 저들이 우리의 지원을 원해야 가능한 일이잖소. 생각 없이 강남으로 갔다가 저들이 거부해 버리면 진짜 우리만 고립될 수도 있소.”

“그건 정말 최악이지.”

그리고 또 누군가는 해남파라는 문파 자체를 신뢰할 수 있는지 의문을 가졌다.

하지만…… 서로 다른 생각들 속에서도, 이들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 가장 강렬한 생각은 따로 있었다.

“구파일방…….”

청명이 입을 연 순간, 장내의 모두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청명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 구파일방에서 이탈하는 문파가 생긴다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심지어 제 발로 구파일방을 나와 천우맹으로 들어오는 모양이 만들어진다 이 말이지?”

“바로 그겁니다.”

“흐음.”

청명이 턱을 괸 손가락으로 제 뺨을 톡톡 두드렸다. 하지만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모양새와 달리, 결론은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생각만 해도…….”

청명의 입꼬리가 사악하게 뒤틀렸다.

“기분 째지는데?”

이건 굳이 그 여파를 생각해 보지 않아도 될 만한 일이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그래, 정말 그렇기만 하면 파장이 무시무시하겠어. 이건 정말 중원 전체가 뒤집히고도 남을 일이야.”

길고 긴 강호의 역사.

그 오랜 역시 속에서도 제 발로 구파일방의 직위를 걷어찬 문파는 없었다. 아니, 강호를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그런 일이 발생할 가능성조차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구파일방이라는 명칭이 가지는 상징성은 그만큼 어마어마하니까.

강호에 존재하는 모든 정파의 목표는 구파일방 한자리를 차지하거나, 오대세가 한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화산의 문도 중에서도 은근히 구파일방에 복귀할 날을 기다리는 이들이 있을 정도다. 물론 소림이 전권을 가진 구파일방이라면 거저 자리를 내어 준다고 해도 거절하겠지만, 상황이 달라진다면 대놓고 거부할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구파일방이라는 이름은 그동안 정파의 상징이었고 중원을 수호하는 최후의 보루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 단단한 위상에 쩌적쩌적 균열이 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단 말이지?”

청명의 입꼬리가 더욱 말려 올라갔다.

만일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구파일방이라는 이름은 더 이상 정파의 상징으로 남아 있을 수 없게 될 터.

그래. 정말 벌어지기만 한다면 말이다.

“으음.”

대체로 얼굴을 굳히고 있는 당군악이지만, 그 역시 지금 평소보다 배는 더 심각한 표정이었다. 이 상황이 그만큼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녹림왕의 말대로 이뤄지기만 한다면, 분명…… 굉장한 일이겠지.”

그 말에 모두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해남파만 해도 보통 전력이 아니네. 구파일방의 한 축이지. 적어도, 음…….”

당군악은 말끝을 흐려 버렸지만, 그가 하려던 말을 눈치 좋게 이해한 남궁도위가 그가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을 마저 완성해 주었다.

“전력의 반 이상이 날아가 버린 남궁세가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커다란 전력이지요.”

“……그런 의미는 아니었다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가주님. 사실은 사실이니까요.”

남궁도위의 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 눈빛이 ‘중요한 것은 지금이 아니라 훗날이다’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 눈빛을 보고서야 당군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세가와 비교하는 것은 과하겠지만, 천하에 그만한 힘을 가진 문파가 많지 않다는 것은 분명 사실일세. 천우맹과 함께할 가능성이 있는 문파로 한정한다면 더더욱 그렇겠지.”

“구파일방의 말석이라고는 해도 말이죠?”

조걸의 말에 당군악이 고개를 내저었다.

“해남파가 가장 마지막에 합류한 문파이긴 하지만, 그 전력이 구파일방 중에 가장 낮다고는 할 수 없네. 애초에 마교로 인해 거의 박살이 난 곤륜 같은 문파에 비한다면 훨씬 강대한 곳이지.”

“아, 그렇습니까? 그런데 왜…….”

“뻔한 소리를.”

청명이 당군악 대신 대답해 주었다.

“구파일방에 속한 문파보다 더 센 문파가 생긴다고 해서 원래 있던 문파를 내쫓을 수는 없잖아. 그건 도의에 맞지 않는 일이지.”

“그런데 우린 내쫓았잖아?”

“카아아아악!”

청명의 눈이 별안간에 다시 돌아가기 시작하자 모두가 도끼눈을 뜨고 조걸을 노려보았다. 평소라면 별것도 아닌 일에 눈을 뒤집는 청명이 놈을 탓했겠지만, 이 부분만큼은 건드린 쪽이 잘못한 게 맞다.

“아, 아니, 나도 화산파니까 이런 말 해도 되는 것 아니……야?”

“걸아, 그냥 입을 닥쳐라.”

“옙!”

조걸이 구석으로 신속하게 쪼그라들자 청명이 쯧 하고 혀를 차고는 말을 이었다.

“……여하튼! 이리저리 따져 봐도 해남파만 한 문파가 없는 건 확실해.”

“그렇네.”

당군악 역시 이 부분에 대해선 완벽하게 동의했다.

“전력도 전력이네. 하지만 전력보다 더욱 중요한 부분은 상징성이겠지. 해남파 정도 되는 문파가 구파일방이 아닌 천우맹을 선택한다는 것. 그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방 안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누군가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릴 만큼 말이다.

“물론…… 아무리 해남이라 해도 결국 한 문파에 불과하니 선언만으로 세상이 뒤집히지는 않겠지. 하지만 적어도…….”

당군악의 굳은 눈빛이 방 안의 모두를 훑었다.

“물줄기의 방향 정도는 뒤틀 수 있을 걸세. 분명히.”

깍지 낀 손을 머리 뒤에 걸친 청명이 심드렁하게 중얼댔다.

“이미 남궁세가가 천우맹에 들며 인식이 바뀌었으니 말이죠.”

“정확하네.”

당군악이 가볍게 손가락을 튀겼다.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키겠다는 듯 말이다.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는 좀 그렇지만…… 사실 오대세가와 구파일방은 같은 급으로 묶이긴 조금 어렵지. 물론 남궁황이 가주일 때의 남궁세가라면 구파일방의 어떤 문파와도 견줄 만하겠지만…… 그 외 다른 문파들은 솔직히 구파일방에 견주기는 어렵다고 봐야 하네. 세간의 인식 역시 오대세가를 구파일방과 같은 급으로 두지는 않고.”

“그게 사실이긴 하죠.”

“그렇기에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마침내 천우맹이 오대세가를 넘어 구파일방마저 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가 될 테니까. 어쩌면…….”

당군악의 입가에 청명과 비슷한 미소가 맺혔다.

“이 기회를 통해 천우맹이 구파일방의 위상을 뛰어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지.”

그 말이 결정타였다.

구파일방을 뛰어넘는다.

그건 천우맹에게 있어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야 할 과제였다. 하지만 또 동시에 너무 멀어 차마 논하기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그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한 것이다.

“……진짜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야?”

윤종이 멍하게 중얼거리자 조걸이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어떻게 되긴 어떻게 됩니까? 대왕 대머리 머리에서 김 펄펄 나는 거지. 아주 그냥 달군 돌 되시겠네!”

“……진짜 법정이 화병으로 죽는 꼴도 볼 수 있겠는데?”

“그 정도면 주화입마는 확정이라 봐야지. 소림 방장이 바뀔 수도 있겠어.”

그 순간 임소병이 탁 소리 나게 부채를 내리쳤다.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임소병을 돌아보았다. 이전에도 발언력이 그리 약하지 않았지만, 이 순간 그의 발언력은 당군악마저 뛰어넘고 있었다.

“겨우 그 정도가 아닙니다.”

“엥?”

“쯧쯧. 잘 생각해 보십시오. 구파일방과 천우맹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입니까?”

“싸가지?”

“……맞는 말인데, 그…….”

임소병이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구파일방이 왜 구파일방입니까?”

“그건 또 뭔 소리래요.”

“열 개의 문파만이 그 이름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천우맹은 아니지요. 천우맹은 문파 수에 제한이 없습니다. 그리고 꼭 대문파만이 들어야 하는 곳도 아닙니다.”

“아…….”

“지금까지야 숱한 문파가 구파일방의 눈치를 보느라 미적대고 있었지만, 천우맹의 위상이 구파일방을 뛰어넘는 순간! 아니, 대등해지는 순간만 와도 인식이 바뀔 겁니다.”

촤아아악!

임소병이 펼친 부채로 제 얼굴을 반쯤 가리며 음흉하게 웃었다.

“구파일방의 수하 짓을 하느니, 차라리 당당한 천우맹 소속이 되는 게 낫다고 말입니다.”

“…….”

“거기에 이미 제가 기가 막힌 묘수를 미리 두어 뒀잖습니까?”

“묘수라니요?”

“녹림! 바로 녹림입니다! 천우맹에 녹림이 없었더라면 웬만한 문파는 감히 천우맹을 찾아올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겁니다. 차별 없이 받아 준다고 해도 말만 그렇다고 생각했겠지요. 하지만 지금 천우맹에는 다름 아닌 사파 놈들이 들어와 있잖습니까?”

“…….”

“그럼 다들 생각하겠죠! 우리가 힘은 좀 부족하지만, 적어도 사파 새끼들보다는 나은 대접을 받지 않을까?”

“……저, 녹림왕……? 틀린 이야기는 아닌데…… 녹림왕께서 그런 이야기를 하셔도 됩니까?”

“사실이 그런데 뭐 어떻습니까. 제가 악을 쓴다고 사람 취급받는 것도 아니고, 억울하면 남궁세가에서 태어났어야지.”

“아니, 그런데 예전부터 왜 자꾸 저희를 물고 늘어지시는…….”

“그러니까!”

촤악!

임소병이 버럭 언성을 높였다.

“단 한 수! 이 단 한 수만으로 중원의 판도 자체를 바꿔 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한 수만 성공할 수 있다면!”

그의 눈이 새파랗게 빛을 내뿜었다.

“천우맹은 저 사패련을 상대로 싸울 수 있는 최소한의 힘은 가질 수 있게 될 겁니다. 이것만 성공시킬 수 있다면 말이죠. 이해하셨습니까?”

여기까지 듣고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는 이곳에 있을 자격이 없다.

“해야겠네.”

“어떻게든 해야 하는 일이군.”

“그럼 누가 가지?”

이 일을 반드시 성공시켜야겠다고 모두가 다짐한 그때였다.

심드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난 반대야.”

“응?”

모두의 눈이 슬쩍 커졌다.

그들이 놀란 이유는 하나. 이 일을 반대하고 나선 이가, 누구보다 강하게 일을 추진할 것 같았던 청명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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