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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157화 (1,158/1,567)

1157화. 모든 정파가 버린 문파라. (2)

묘한 분위기가 방 안에 내려앉았다.

청명은 지도에 그려진 해남도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내가 놓친 건가?’

아니, 그런 건 아니다. 아무리 그의 시대에는 해남파가 구파일방이 아니었다고 한들, 지금 해남파가 구파일방 소속이며 해남도에 있다는 사실을 놓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청명의 뇌리에 이러한 사실이 남아 있지 않았던 이유는 애초에 구파일방은 그가 머릿속에 넣고 조율해야 할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건 대왕 대머리의 몫이지.’

천우맹 하나를 온전히 건사하는 것도 힘든데 구파일방의 사정까지 봐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런데 지금 다름 아닌 임소병이 그 부분을 지적하고 나온 것이다. 확실히 이건 청명으로서는 생각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다른 이들 역시 이 상황이 생각보다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았는지, 더 이상 임소병을 타박하지 않고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잠겼다.

당군악이 턱을 주무르며 입을 열었다.

“그 말인즉…… 지금 해남파가 백척간두의 상황에 처해 있다는 뜻인가?”

“그럴 겁니다.”

“하지만 이해가 안 가는 측면이 있군. 그렇다 해도 그 상황을 해결할 이들은 우리가 아닌 구파일방이 아닌가?”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임소병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바꿔 생각해 보시죠.”

“응?”

“해남파의 입장에 서서 봅시다. 그 양반들은 어쨌거나 해남도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소림을 비롯한 구파일방과 남궁 그……. 아니, 뭐 오대세가가…….”

슬쩍 남궁도위를 바라본 임소병이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장강에서 수로채를 때려잡다가 사파에 당해 갑자기 의논도 없이 강남불침의 조약을 맺었습니다. 그럼 해남파의 입장에서는 어땠겠습니까?”

“날벼락이지, 뭐.”

“사람 새낀가 싶었겠지.”

“나 같으면 대머리 정수리에 불 지르러 갔다.”

깊게 생각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강남불침의 조약은 다른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들에게는 사파에 눌려 강남 땅을 밟지 못하게 된 굴욕의 조약이다. 하지만 그건 거꾸로 말하자면 굴욕이었을 뿐, 실질적인 위협은 아니었다는 의미다.

하지만 해남파의 입장에서는 어땠겠는가.

강남불침 조약 하나만으로 해남파는 부지불식간에 사파 놈들에게 둘러싸여 고립되어 버린 것이다.

“잠시만요. 그런데 그건 이전에도 마찬가지 아니었나요?”

“다릅니다.”

조걸에 물음에 임소병이 딱 잘라 말했다.

“물론 강남은 이전에도 사파가 득세한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신주오패와 사패련이 다른 것은…… 서로를 적으로 인식하느냐, 아니면 동료로 인식하느냐지요.”

“아…….”

“신주오패 시절에도 사파는 강했습니다. 하지만 그 강함을 발휘하기 어려웠죠. 서로가 서로의 적이었으니까요. 애초에 우리도 그 썩을 만인방 새끼들과 전쟁을 치르지 않았습니까?”

그 말에 당군악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그러니 해남파가 지리상으로는 고립되어 있다고 해도, 사파가 연합할 일은 없으니 그리 위협으로 느끼진 않았던 거지요. 그리고 만에 하나 사파가 공격해 오는 일이 생긴다면, 장강 유역에 있는 남궁세가나 무당파, 그리고 지리적으로 그나마 가까운 사천의 문파들이 바로 지원을 올 것 아닙니까?”

“그랬겠지.”

당군악이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가만 해도 그런 상황이 벌어졌다면 모든 일을 제쳐 두고 강남으로 향했을 것이다. 그건 구파와 오대세가가 서로 간에 맺은 약속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강남불침의 조약이 맺어진 순간!”

촤아아아악!

임소병의 붓이 다시 한번 장강을 따라 지도를 가로 그었다.

“해남파가 무슨 일을 당하든, 구파일방은 저들을 지원하지 못합니다.”

“아…….”

그제야 해남파가 느꼈을 압박을 모두가 이해했다.

“그렇게 삼 년을…….”

“네, 맞습니다. 해남파는 무려 삼 년을 피가 마르는 심정으로 버텨 냈을 겁니다. 언제 사파가 그들을 노릴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 말입니다. 그러다 드디어! 그 길고 긴 삼 년의 시간이 끝나 가는데…….”

“매화도가 터졌군.”

“네. 펑 하고 터져 버렸죠.”

모두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한쪽에 쏠렸다. 남궁도위가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생각도 못 했다.’

물론 미리 생각을 했다고 해서 남궁황을 말릴 순 없었겠지만, 어쨌든 그들이 사파를 공격하면서 해남파가 어떤 입장이 될지는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

“매화도 사태가 남긴 결론은 하나입니다. 강남불침의 조약은 이제 끝나겠지만…… 그뿐이라는 것. 이제 어차피 서로가 서로의 땅을 밟을 수 없습니다. 그건 항주마화 때, 저 소림이 직접 증명한 일 아닙니까?”

“그렇지요.”

백천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림은 그때 조약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사패련이 지배하는 땅에 정파가 발을 들이기를 껄끄러워한다는 것을 천하에 공표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럼 이제 해남파는 어떤 입장일까요?”

백천이 굳은 얼굴로 지도를 바라보았다. 어떤 입장이냐니, 그야…….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겠군요.”

“정확합니다.”

임소병이 짝 소리 나게 손뼉을 쳤다.

“무당이 해남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장강불침 따위는 벌어져서는 안 됐습니다. 그리고 소림이 해남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마교의 발호 때 어떻게든 강남땅을 밟아서 양민이나 아군이 위험할 시에는 구파일방이 강남으로 향할 수 있다는 신호를 줘야 했습니다.”

임소병이 차갑게 조소했다.

“하지만 두 번 다 그러지 않았죠.”

사람들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보니 해남파가 느꼈을 절망감이 절절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해남파는 마지막으로 구파일방에 합류한 문파라 자격지심이 있었을 겁니다. 그런 와중에 깔끔하게 없는 문파 취급까지 당한 거지요. 이런 상황에서 저들이 정말 구파일방의 직위를 유지하는 것만으로, 소림이나 무당이 자신들을 위해 달려와 줄 거란 믿음을 가지고 있을까요?”

“안 하겠죠.”

“예. 바보 천치가 아닌 이상은 그러지 않을 겁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결속이 예전 같다면 모를까, 내부적으로 사분오열이 나 있는 이런 상황에서 저 머나먼 곳에 있는 해남파를 구하기 위해 사패련과 맞설 문파가 몇이나 될까요? 단언컨대…….”

임소병의 눈빛이 서늘했다. 항상 정도를 외치던 정파의 실상에 대한 차가운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없을 겁니다.”

아무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실상이 그러하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

‘강남이 저리 컸나?’

문득 지도가 밑도 끝도 없이 광활해 보였다. 해남파를 지원하기 위해서는 저 넓은 강남을 종으로 가로질러야 한다.

‘말도 안 돼.’

백천의 입술이 살짝 떨렸다.

사실 항주는 강남에서 그리 깊은 곳에 위치하진 않았다. 장강을 타고 횡으로 가야 할 길이 먼 게 문제였지, 애초에 장강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도 아니잖은가?

하지만 해남파는 완전히 말이 다르다. 저 해남을 지원하러 가기 위해서는 사패련의 소굴이나 다름없는 강남을 완전히 가로질러 바다까지 도착해야 한다.

“아니, 막상 바다에 도착해도…….”

“섬으로는 어떻게 가?”

“……사패련이 지배하고 있는 강남에서 해남도로 갈 배까지 구해야 한다는 말이로군.”

“심지어 전쟁이 났다는 말이 들리고 나서 출발하면 도착하기도 전에 끝이 날 거야. 그러니 미리 가야 한다는 소리잖아?”

임소병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정리를 했다.

“네, 맞습니다. 그러니 해남을 돕기 위해서는 그 조건이 갖춰져야죠. 해남이 구원을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남해로 향할 수 있어야 하고, 사패련이 들끓는 강남을 뚫어 내고도 해남도로 향할 방법을 또 찾아내야 합니다.”

현종은 아연한 얼굴로 지도를 바라보았다.

‘이건…….’

이건 정말 단순히 구파일방을 꾸짖을 만한 일이 아니다. 현실적으로는 이곳에서 해남도를 도울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녹림왕, 이건…….”

“예, 압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촤악!

임소병이 부채를 촥 펴 들고는 입을 열었다.

“해남파는 구원을 바라지만, 현실적으로 자신들을 구하러 올 이들이 있을 거라 상상하지 못할 겁니다. 그렇기에 오직 결사항전, 옥쇄를 각오하고 있겠죠.”

“으음.”

“하지만 그럴 때!”

임소병의 붓이 단숨에 강남을 가로지르고 해남까지 도달하는 선을 그렸다.

“우리가 도울 수 있다면?”

“…….”

“구파일방의 힘이 약해지고, 구파일방이라는 이름이 가져다주는 이득이 무의미해진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해남이 구파일방을 탈퇴하고 제 발로 천우맹에 가입하는 상황도 꿈은 아닐 겁니다.”

파아아아앙!

임소병이 지도를 후려쳤다. 얼마나 강하게 쳤는지, 탄탄한 천으로 만들어진 지도의 한 부분이 부욱 소리를 내며 찢어질 정도였다.

“아시겠습니까?”

“…….”

“구파일방에서의 이탈입니다. 지금까지 강호의 역사상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아…… 물론 제 발로 나온 게 처음이라는 이야깁니다. 쫓겨난 문파는…….”

“아니, 근데 저 새끼가 진짜?”

“처, 청명아! 참으라니까!”

“지금 그런 상황 아니라고!”

“나도 꼴받기는 하는데, 일단 다 들어 보고 죽이자!”

바둥거리는 청명을 다시 내리누른 현종이 임소병을 재촉했다.

“계속하십시오.”

“예.”

임소병이 뭔가 사람을 긁어 대는 얼굴로 청명을 슬쩍 일별하고는 말을 이었다.

“쉽지 않은 이야기지만, 만약 성공만 한다면 구파일방에 속한 해남파가 스스로 구파일방 자리를 벗어던지고 천우맹에 합류하는 걸 천하의 모든 문파가 보게 될 겁니다.”

“…….”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습니까? 조금 전에 다들 말씀하셨지요. 중소문파가 왜 천우맹에 합류하냐고, 당신들이 중소문파여도 구파일방에 붙겠다고 말입니다. 왜 그런 말이 나옵니까? 다름 아닌 구파일방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가진 역사와 명성은 천우맹이 아무리 강대해져도 단기간에 극복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타아아악!

부채를 단번에 접은 임소병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해남입니다. 어설픈 중소문파가 아닌, 바로 그 구파일방 중 하나인 해남파가…… 구파일방을 버리고 천우맹을 선택해, 천우맹이 더 가치 있는 곳이라는 걸 천하에 선언하게 될 것입니다.”

“…….”

“그렇게 되며어어언?”

꾸우우욱.

임소병의 부채 끝이 지도의 한 부분을 지그시 눌렀다. 그 부채의 끝이 닿은 곳은 다름 아닌 숭산. 소림이 있는 곳이었다.

“구파일방과 천우맹의 무게추도.”

찌이이이익.

부채가 거의 지도를 찢어 내듯 옆으로 이동했다. 모두의 시선이 그 부채의 끝을 따라 움직였다.

“바뀔 수 있지…….”

마침내 부채가 멈추었다. 긴 선을 그어 낸 부채가 멈춘 곳은 다름 아닌 섬서의 화산. 화산파가 있는 곳이다.

“않을까요?”

임소병의 눈이 소름 끼치는 빛을 발했다.

“만약 그게 가능하기만 하다면,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어떤 대가를 내어 주는 한이 있더라도 해 볼 만한 일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탁!

가볍게 부채로 제 손바닥을 두드린 그는 씨익 웃으며 뒤로 한 발 물러났다.

“이상입니다.”

임소병의 말이 끝나자 방 안에 기이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당혹과 우려, 그리고 묘한 흥분이 혼재하는 기이한 분위기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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