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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155화 (1,156/1,567)

1155화. 뭐, 꼭 필요하다면야. (5)

그 분위기 속에서, 청명조차 조금의 기대를 품고 임소병을 바라보았다.

그가 이 회의를 소집한 이유는 지금부터 뭘 해야 하는지 몰라서가 아니다. 그는 나름대로 무엇부터 해야 할지 생각을 끝내 놓았다.

그럼에도 그가 회의를 주최한 이유는 둘.

하나는, 이제 더 이상 혼자 생각하고 혼자 이끌어 가는 방식을 고수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조금 전 백천에게 말했듯이, 여기 있는 이들 하나하나는 전쟁이 벌어졌을 때 자신이 판단해서 다른 이들을 이끌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누군가가 결정을 내려 주기를 기다리는 습관이 들어 버리면 스스로 판단해야 할 때 제대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상황이 반드시 벌어질 것이다.

그러니 적어도 이들은 자기 스스로 최선을 찾아내는 이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청명 역시 제 의견을 조금을 줄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설사 그 회의의 결과가 청명이 생각하는 최선의 길과 어긋난다 할지라도, 결과적으로는 최선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또 다른 하나는…….

‘나 혼자로는 안 돼.’

청명은 만능이 아니다.

아무리 그 끔찍했던 전쟁을 겪었고, 남들은 감히 짐작할 수 없는 사선을 숱하게 넘었다 할지라도 결국 청명의 경험과 인식에는 한계가 있다.

지금까지야 그가 생각하는 방식이 맞아떨어졌다지만, 장일소와 마교라는 거대한 대적들을 상대하려면 그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러니 의견을 모아 보려는 것이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청명이 귀를 기울이기에 부족함이 없는 이들이니까.

그 순간 임소병이 입을 열었다.

“이기기 위해서는 뭐가 중요합니까?”

“……예?”

남궁도위가 멍하게 되묻자 임소병이 접은 부채로 제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질문이 좀 어려웠나 보네요. 두 사람이 싸우면 어떤 이가 이깁니까?”

“그야…… 조금 더 열심히 수련해 온 이지요.”

“아니, 아니지. 상대를 더 잘 파악한 이입니다.”

“나는 그것보다는, 자신의 한계를 명확하게 알고 있는 이가 이길 확률이 더 높다고 생각합니다.”

정론들이 쏟아졌다.

그때, 뻔한 말이라면 두드러기가 돋는 이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툭 내뱉었다.

“그냥 더 센 놈이 이기는 거 아냐?”

순간 정적이 흘렀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조걸의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아, 아니, 제 말은…….”

“맞습니다!”

“……엥?”

촤아아아악!

임소병이 부채를 펼쳤다.

“이런저런 수식어 붙여 가며 빙빙 돌려 말해 봐야 결론은 하나뿐이지요. 더 센 쪽이 이깁니다. 그게 강호의 유일한 진리 아니겠습니까?”

“거, 거봐요! 내 말이 맞다잖아!”

“누가 뭐라고 했나?”

“왜 혼자 발끈하시는?”

“아이고, 차암 잘하셨네.”

“이, 이 양반들이!”

모두가 조걸에게서 냉정하게 시선을 돌렸다. 세상에는 잘해도 칭찬해 주기 싫은 인간이 있기 마련이다.

“그럼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어찌해야겠습니까, 남궁 소가주니이임?”

그 부담스러운 시선을 받은 남궁도위가 상체를 뒤로 살짝 젖혔다.

“그야…….”

이런 어처구니없는 대답이 제 입에서 나올 일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해 봤지만, 지금 돌아가는 분위기는 오로지 그에게 한 가지 대답을 강요하고 있었다.

“저, 저희가 더 세지면 되지요.”

“아이고. 이제 좀 머리가 돌아가시네.”

“…….”

살면서 가장 우둔해 보이는 대답을 하고 칭찬을 받았다. 그 사실이 남궁도위를 알 수 없는 자괴감에 빠뜨렸다. 물론 그 와중에 사파인 임소병에게 칭찬을 받고 내심 기뻤던 것에 대해선 이상함을 알아채지 못했다.

“자, 그럼 더 세지는 방법에는 뭐가 있겠습니까?”

“그야…….”

임소병도 여기까지는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는지, 깔끔하게 정리를 해 버렸다.

“딱 두 가지입니다. 질을 강화하거나, 양을 늘리거나.”

그 말에 백천이 발끈한다.

“아니, 그럼 아까 중소문…….”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양을 늘린다는 건 전력이 될 이들을 보충하는 걸 의미합니다. 설마 어중이떠중이들을 모조리 다 끌어모은다고 힘이 더 강해질 거란 일차원적 생각을 하시는 분은 여기에 없겠지요?”

“그, 그럼요.”

“…….”

순간적으로 말을 돌려 버린 백천을 향해 따가운 시선이 쏟아졌다. 고개를 푹 숙인 그는 내심 이를 갈았다.

“그런데 그…….”

당패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꼭 방법이 그것 둘뿐인 건 아니잖습니까. 전략이나 전술, 그리고…….”

“아, 책략?”

임소병이 피식 웃었다.

“아, 뭐 그럴 수 있지요. 소가주께서도 머리를 잘 쓰면 본인보다 두 배 정도 강한 적을 상대로는 싸우실 수 있겠지요.”

“쉽지는 않겠지만…….”

“그럼 세 배는?”

“…….”

“다섯 배는? 열 배는?”

당패는 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머리를 쓴다고 열 배 센 이를 상대로 이길 수 있으면, 사람들이 왜 야밤에 산을 오르는 걸 두려워하겠는가? 맨주먹으로 호랑이 잡으러 다니지.

“아시겠습니까? 애초에 전력 차이 앞에서 전략이나 전술은 무의미합니다. 머리 안 써도 이길 수 있으면 미쳤다고 골머리 썩어 가며 이길 방법을 궁리하겠습니까? 몸이 나쁘니 머리가 고생하는 거지.”

“아, 아니……. 한고조도 항우를 이겼는데.”

“일대일로 붙었으면 맞아 죽었지! 그 양반도 있는 전력, 없는 전력 다 끌어다가 다구리 친 거 아닙니까!”

“…….”

듣고 보니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다.

“지금 사패련과 우리 중에 누가 더 강합니까?”

“그야…….”

이건 생각해 보지 않아도 답을 할 수 있다.

“사패련이지요.”

“예. 그쪽이 셉니다.”

아직 천우맹의 전력으로는 사패련을 단독으로 상대하는 게 쉽지 않다. 물론 서로 규합한 이들이 얼마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느냐에 따라서 상황이 달라지기는 하겠지만, 드러난 전력만으로는 사패련이 확실히 우위에 있다.

“애초에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부족한 전력으로 더 강한 전력을 극복해 낼 계책을 짜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그사이에 전력을 늘릴 방법을 찾지.”

모두가 임소병의 말에 홀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병력의 질은!”

임소병이 고개를 획 돌려 청명을 바라보았다.

“여기 도맡아서 처리하는 양반이 있잖습니까. 저 양반이 성질 더럽고, 다른 데는 도저히 써먹을 데가 없어도 이런 능력 하나는 장원 급제급……. 에헤이, 에헤이! 그거 내려놓으시고. 벼루로 맞으면 저 정말 죽습니다. 죽어요!”

청명이 마지못해 들어 올렸던 벼루를 다시 내렸다. 임소병이 식은땀을 소매로 훔치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남은 건 양을 늘리는 것밖에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당패가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중소문파로 도움이 안 된다면 대문파를 끌어오는 수밖에 없는데, 지금 상황에서 저희에게 합류할 곳이 없잖습니까?”

“남는 전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다들 이합집산을 했는데.”

“흐으으음.”

모두가 의아한 얼굴로 말하니 임소병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대문파가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다들 동의하신 거지요?”

“……가능만 하다면야.”

“물론 될 수만 있다면 그렇겠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우니 문제 아닙니까?”

임소병의 지적은 그들의 아픈 부분을 정확하게 찔렀다.

애초에 지금 천우맹이 서로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연계를 강화하려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희생자를 줄이기 위함이고, 또 하나는…….

‘그렇게라도 안 하면 정말 못 이길 테니까.’

백천이 심각한 얼굴로 임소병을 보았다. 지금까지 임소병이 뱉은 말 중 가장 아팠던 것은 ‘사람은 뭐라도 하게 되면 일단은 안심한다’였다.

그건 백천에게 완벽하게 들어맞는 말이었다. 천우맹과 사패련 사이에 격차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하루하루 수련하는 것에만 모든 정신을 팔았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할 수 있는 것을 하려 든 것이다.

‘이게 시각의 차이인가?’

어쩌면 이건 스스로 생각하고 해결하려 하는 임소병과 아직은 누군가 해결책을 내 주기를 기다리는 백천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백천은 이 순간을 제 가슴속에 통렬히 새겨 넣었다.

임소병이 부채를 탁 소리 나게 접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번충!”

“예, 녹림왕!”

“지도 펴 봐!”

“예!”

번충이 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지도를 쫘악 펴 들었다. 덩치가 워낙 크다 보니 두 사람이 양쪽에서 펴 들어야 할 지도를 혼자서도 활짝 펼칠 수 있었다.

‘저걸 미리 준비해 왔다고?’

당군악이 황당한 얼굴로 임소병을 보았다. 이제 보니 녹림왕은 애초에 이곳에서 이런 대화가 오갈 것을 미리 짐작한 모양이었다.

“현재 중원에 소속이 명확하지 않은 문파는 모두 네 곳입니다.”

“네 곳이요?”

“네. 둘은 여러분도 아는 곳입니다. 새외사궁 중 남은 둘인 남해태양궁과 포달랍궁이지요.”

“아…….”

그 말을 들은 이들이 눈을 끔뻑였다. 그리고 포달랍궁이라는 말이 나오자 청명의 눈이 순간적으로 반짝였다.

“그리고 또 하나는…… 새외오궁이라 지칭할 때 포함되는 혈궁입니다.”

“그, 그런데 혈궁은…….”

“네에, 네에. 압니다. 하지만 일단은 가능성의 문제를 접어 두고, 속하지 않은 세력만 놓고 논해 보자는 겁니다.”

“으음. 그렇다면야…….”

애초에 혈궁은 그 본단이 어디인지도 명확히 알려지지 않은 신비 문파인 데다가, 문도들의 성향도 워낙 사특하기로 유명해 천우맹과는 그 결이 맞지 않았다.

“새외와 중원은 어울리지 못한다고 하지만, 그건 적어도 천우맹에게만은 통용되지 않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곳에는 다행히도 새외 두 문파의 장들이 와 계시니 저들을 설득하기도 조금은 용이해질 겁니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그러게…….”

모두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서로를 돌아보았다.

물론 야수궁과 빙궁이 천우맹의 일원이라 해서 저들이 천우맹의 편을 들어줄 거란 보장은 없다. 새외사궁은 딱히 대표하는 문파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 결속도 생각 이상으로 느슨하니까.

하지만 그 두 문파가 부족한 천우맹의 전력을 메꿔 줄 가능성을 가졌다는 것 역시 분명한 사실 아니겠는가?

“이 중에서 제일 전력이 될 만한 곳은 일단 포달랍궁인데…….”

“안 돼.”

청명이 단칼에 손을 내저었다.

“서장에서 여기까지 오다가 전쟁이 터질 거야.”

“정답입니다.”

임소병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게다가 포달랍궁은 웬만해서는 제 지역을 떠나지 않고, 정말 큰일이 아니고서는 타 문의 분쟁에도 개입하지 않는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 가능성이 없을 테고.”

오검은 과거 만났던 반선라마를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애초에 그 사람에게는 우리와 함께 싸워 달라는 말도 못 꺼낼 것 같았다. 그 짧은 만남으로도 알 수 있었다. 일반적인 무인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는 걸.

“그럼 남은 곳은 여기입니다.”

콱!

임소병이 가볍게 지도의 한곳을 짚은 순간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거기까지 간다고?”

“아, 아니, 거기도 사람이 사나? 중원이 저렇게 넓어?”

“끄응.”

임소병이 찍은 곳을 보며 맹소가 머리를 벅벅 긁어 댔다.

“남해태양궁이군.”

“예, 그렇습니다. 현재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대문파지요.”

“하지만…… 하아. 그건 쉬운 일이 아닐세. 애초에 그…… 남해태양궁은 임읍(林邑)에 있지 않은가?”

“그렇지요.”

“애초에 그들은 우리와 말과 글 자체가 다르네. 쉬이 섞일 수 없을 거야.”

“그건 감수해야지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남해태양궁은 그대들이 아는 것처럼 새외에서 제왕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문파가 아닐세.”

“예?”

“진짜 제왕이네. 남해태양궁의 궁도들이 황족이거든.”

“……엥?”

이건 임소병도 몰랐는지 눈을 껌뻑거렸다.

“진짜요?”

“……내가 이런 걸로 거짓말해서 뭘 하겠는가? 그러니 그들은 그…… 타국에 와서 싸울 생각을 애초에 하지 않을 걸세. 그들 입장에서는 천우맹과 함께해 달라는 제안이 어떻게 들리겠는가?”

“그야…….”

“황족인 자신들에게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낭인으로 참여해 달라는 말로 들리지 않겠는가?”

“어…….”

“만약 사신을 보낼 거면 나는 빼 주게나. 이역만리에서 오체분시를 당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임소병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맹소를 망연히 보았다.

그리고 그때 청명이 입을 열었다.

“거창하게 시작하더니. 뭐야? 결국에는 아무도 못 데리고 온다는 거잖아?”

“그래 놓고 잘난 듯이 무시란 무시는 다 하고.”

“뭐? 아무런 의미도 없는 짓?”

분위기가 슬슬 험악해지자 임소병이 주춤 뒤로 물러났다. 특히나 남궁도위와 백천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자, 잠시만요! 아직! 아직 더 있습니다!”

“또 뭔 개수작을!”

“쓸데없는 저항 그만두고 얌전히 맞으십쇼!”

“아니, 있다니까요! 애초에 네 군데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여긴 확실합니다! 바로 여기요!”

타악!

임소병이 또다시 지도의 한곳을 짚은 순간, 모두의 시선이 그 손가락 끝으로 쏠렸다.

“……뭐?”

“제정신인가…….”

“이 인간 정말 미쳤나?”

모두의 입에서 황당하단 반응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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