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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154화 (1,155/1,567)

1154화. 뭐, 꼭 필요하다면야. (4)

“……크흠.”

당군악이 크게 헛기침을 했다. 살짝만 생각해 봐도 지금 법정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가 손에 잡힐 듯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럼 소림은…….”

“알아서 하겠죠, 뭐. 우리가 그런 것까지 신경을 써 줘야 하나.”

그 말에 눈을 질끈 감아 버린 당군악은 다시금 넌지시 물었다.

“하지만 자네 말대로라면 저들이 자리를 비워 줘야 우리도 장강을 떠날 수 있는 것 아닌가?”

“에이, 꼭 그런 건 아니죠. 사실 우리는 애초에 얻을 건 다 얻었잖아요. 가 버려도 그만이에요.”

“응? 아까는 저들이 결정하는 거라면서?”

“그건 다른 이야기죠. 우리가 이러고 있어야 저 새끼들이 못 빠질 것 아니에요.”

“……설마?”

청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낄낄 웃었다.

“적당히 죽치고 앉아만 있어도 저 새끼들이 죽어 나가는 판인데, 제가 왜 먼저 일어나 줘요? 뒈지기 직전까지 버텨야지.”

“…….”

“원래 싸움박질은 이기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꼴 보기 싫은 놈 뒈지라고 하는 거지.”

청명을 보며 당군악은 새삼 다시 생각했다.

‘적이 아니라 다행이지.’

처음 저 인간을 만났을 때 까딱 잘못해서 원수가 되기라도 했다면 지금 법정이 당하는 꼴을 다름 아닌 당군악이 당하고 있었을 게 아닌가. 그랬다가는 위장에 구멍이 좀 뚫리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쟤들은 신경 끄자고요. 눈에 불 켜고 보고 있는다고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닐 테니까. 사실 지금 진짜 상황이 꼬인 건 사패련이 아니라 구파일방이잖아요. 한동안은 멀리서 삿대질하고 구시렁대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을 거예요. 지금 시비를 걸기에는 민심이 너무 안 좋으니까.”

“그렇겠지…….”

민심이라는 건 실질적인 힘이 되지는 않지만, 은근히 사람의 등을 밀어주는 것이다. 특히나 명분이 없을 때는 민심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일이 잦다.

더욱이 체면과 명분을 가장 우선시하는 법정이라면 한동안은 천우맹이 무엇을 하더라도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당군악은 신중한 사람이다. 그는 다시 꼼꼼히 생각을 더듬으며 말했다.

“그리 안심할 만한 일은 아닐 걸세.”

“네?”

“지금은 움직이지 못한다는 말은 결국 언젠가는 움직일 거라는 말과 그리 다르지 않네. 그리고 내가 아는 법정이라면, 때가 되었다 싶을 때 정말 거대한…….”

당군악이 말을 멈추고 입을 닫았다.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살짝 눈을 가늘게 뜨고 그런 그를 바라보던 청명이 대신 말을 마무리해 주었다.

“적이 되어 나타날 거라고요?”

당군악은 차마 그렇다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어떤 말을 하건, 이 자리에서 내뱉어진 말은 파급력이 너무도 크기 때문이었다.

‘적이라고?’

지금껏 당군악은 천우맹의 입장에서 여러 번 저 소림과 갈등을 빚어 왔다. 때로는 화산을 지지하며, 또 때로는 그의 의지로.

하지만 지금껏 그가 해 온 일들은 문파 간에 벌어지는 갈등의 연장선이었지, 저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를 진정 적으로 인식해서는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 그의 입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적’이라는 말이 나올 뻔한 것이다.

심지어 저 소림을 상대로 말이다.

‘이게 정말 괜찮은 일인가?’

어느새 자연스레 인식이 변해 버렸다. 어쩌면 지금껏 천우맹이 구파일방을 어찌 대할지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정하지 않고 있어서 벌어진 일일지도 모른다.

“……화산검협.”

“예, 가주님.”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그 말에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은 건지는 알고 있는데, 장소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죠?”

귀신같이 의중을 알아챈 청명을 보며 당군악이 쓴웃음을 지었다.

“음, 그렇군.”

“뭐 사실 그거야말로 우리가 아니라 저쪽에 달린 것 아니겠어요? 지켜보셨으면 아시겠지만, 제가 먼저 저쪽에 나쁘게 대한 적은 없었거든요.”

“…….”

“왜 그러시죠?”

“아니, 뭐……. 그냥…….”

무언가 말을 하려던 당군악은 이내 허허 웃어 버렸다.

“그래, 사람의 입장은 다 다른 거니까.”

“이해하신다니 다행이네요.”

그냥 이건 생각을 하지 않아 버리는 쪽이 낫다.

“그럼 일단 그 이야기는 접어 두도록 하고.”

이해하는 이도, 이해하지 못한 이도 그 말에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청명이 시선을 옮겼다.

“그래서.”

“응?”

갑자기 표적이 된 백천이 영문을 몰라 눈을 끔뻑였다.

“또.”

“……나한테 갑자기 왜 그러냐?”

“지금 우리만 말하고 있는 것 같아서. 할 말이 있지 않아? 설마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닐 테고.”

차마 ‘아무 생각 없었는데요?’라고 대답하지 못한 백천은 어정쩡한 얼굴로 변명했다.

“굳이 내가 말하지 않아도, 뭐…….”

“아, 누가 나서서 해 줄 거다?”

청명이 시큰둥한 어조로 말했다.

“내내 하던 이야기지만 말이야.”

“응?”

“전쟁에 들어가면 누군가가 지시를 내려 주길 기다릴 시간 같은 건 없어.”

“…….”

“즉각적으로 자기가 판단하고, 자기가 움직여야 해. 내가 판단을 하지 못해서 고개를 돌리는 한순간에도 사람이 죽는다.”

심드렁하게 말하고 있지만, 그 말에 담긴 의미는 작지 않았다.

‘그러니 평소에 생각하고, 판단하고, 의견을 내는 것을 자연스럽게 해 두라는 거군.’

이 뻔한 회의 하나조차 전쟁을 대비한 일이라고 생각하니 긴장감과 동시에 살짝 갑갑함이 몰려왔다.

“그럼, 말이 나온 김에……. 중소 문파들 말이다.”

“걔들은 왜? 아까 내가 말한 건 그냥…….”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전쟁이 벌어지고 알아서 합류하길 기다릴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편입을 노리는 게 낫지 않을까?”

“호오?”

청명이 재미있다는 듯 백천을 바라보며 물었다.

“왜?”

“나온 이야기잖아. 천우맹이 제대로 체계가 잡히지 않으면, 저들은 누굴 따라야 할지 모르게 된다고. 거꾸로 생각하면, 우리가 그들이 어떤 이들인지 미리 익혀 두지 않았을 땐 적절한 지시를 내리기가 힘들어지지 않을까?”

“오…….”

“와…….”

윤종과 조걸의 격한 반응에 백천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뭐? 왜?”

“아뇨, 사숙. 비웃는 게 아니라…….”

“정말 오랜만에 사숙 같은 말을 들은 것 같아서.”

“…….”

“그러고 보면 예전에 사숙은 이랬었는데.”

“화산을 이끌어 갈 기재 소리를 들은 적도 있었지. 지금은 그냥 동네 바…….”

“……고 요망한 주둥아리를 닥치는 게 네 신상에 좋을 것 같은데?”

“옙!”

조걸이 즉각 입을 닫았다. 백천은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그 와중에 동의한다는 듯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유이설이 자꾸만 신경에 거슬렸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로군.”

“사실 그냥 기다리는 건 수동적이긴 했지.”

여기저기서 찬성하는 의견이 나왔다. 특히나 당군악과 맹소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끌어야 할 이들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건 분명 중요한 일이니.”

“아까 화산검협의 말대로라면, 그들 대부분은 아직 구파일방을 조금 더 신뢰하는 것 같으니, 눈 뜨고 빼앗기기 전에 적극적으로 나서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지금 같은 민심이 희석되어 저들이 구파일방을 자연히 다시 받아들이기 전에 말이야.”

“음. 제 생각도 같습니다. 백천이가 좋은 의견을 내어 주었구나.”

백천의 어깨에 간만에 힘이 들어갔다.

사실 그간 가진 실력이나 능력에 비해 너무 동네 바보 형 취급을 받지 않았던가? 이처럼 천우맹의 중진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 능력을 인정받자 과거 한때 가졌던 자신감이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그래, 바로 이거…….’

“으휴. 아무 의미도 없는 짓을.”

돌아오는 자신감에 초를 팍팍 치는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백천이 돌아보니 여전히 벽에 등을 기댄 임소병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백천 도장. 요 조동아리가 한 번씩 망령되이.”

제 입을 얄밉게 찰싹찰싹 때려 대는 임소병을 보니 화딱지가 더 끓어올랐다.

“……의미가 없다고 하셨습니까?”

“예. 뭐, 그…… 백천 도장의 생각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그 뭐랄까……. 얻는 건 없고 골머리만 썩을 일을 자처한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말입니다. 그게 정파 분들의 특성이라는 건 저도 익히 알고 있지만…… 하하.”

“왜 의미가 없다고 보시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분명히 도움이 될 일 같은데.”

“도움이야 되겠죠, 도움이야. 세상에 도움이 안 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기에 계신 분들이 문을 열고 나가서 마당을 쓸어도 사는 데 도움이야 되겠지요.”

차라리 도움이 안 된다고 해라 이 새끼야. 백천의 위장이 쿡쿡 쑤셔 왔다. 청명 하나만 해도 감당하기 힘든데, 임소병까지 같이 있으니 위장이 양쪽에서 쑤시는 기분이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를 여쭤도 되겠냐고요? 당연히 되죠. 뭐, 그거 대답해 드리는 게 어렵겠습니까.”

임소병이 벽에서 등을 떼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자연스레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부채가 쫘악 펴졌다.

“애초에 회의의 목적을 잃으니 이런 쓸데없는 의견들이 나오는 겁니다.”

“……예?”

“하나를 해결했으니 다른 할 일을 찾아보자. 그 앞에 대전제가 뭡니까?”

“그야…… 더 효율적으로 천우맹을 정비하고, 사패련과 맞서 싸우기 위해…….”

“그게 문제라는 겁니다, 그게!”

임소병의 일갈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이들이 움찔했다.

“그런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하고 있으니, 쓸데없는 이야기로 회의가 빙빙 도는 것 아닙니까! 시간 낭비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던 이들이 자신은 그런 적 없다는 듯 머리를 고정했다. 그리고 자연스레 고개를 주억거리던 오검은 되레 임소병의 편에 붙어 백천에게 힐난의 눈빛을 보내기 시작했다.

백천의 가슴에 천불이 치밀었다.

‘저 의리도 없는 새끼들…….’

내가 언젠가는 사패련이고 나발이고 너희들부터 때려잡는다. 진짜…….

“사패련에게 맞서기 위해서가 아니지요.”

타악!

임소병이 접은 부채로 제 손을 내려쳤다.

“사패련에게 이기기 위해서입니다.”

“…….”

“사람이란 뭐라도 하게 되면 일단은 안심합니다. 자기가 놀고 있지 않고, 노력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안도감이 때로는 사람을 망치는 법입니다. 아무짝에 쓸모없는 짓을 하며 시간만 낭비하게 만드니까.”

“으음…….”

“묻겠는데, 그래서 직위를 신설하면 사패련을 이길 수 있습니까?”

임소병의 날카로운 눈빛에 남궁도위가 움찔했다.

“그건…….”

“그럼? 중소 문파를 합류시키고, 그들의 편제를 짜 놓으면 사패련을 이길 수 있습니까?”

“안 하는 것보다는…….”

백천도 말꼬리를 흐리고 말았다. 그게 전황에 큰 영향을 줄 수 없다는 건 백천 역시 알고 있었다.

“쯧쯧쯧쯧.”

타악!

임소병이 다시 제 부채로 손바닥을 치고는 말했다.

“이런 양반들이 천우맹을 이끌고 있으니!”

남궁도위와 백천의 얼굴이 화르륵 붉어졌다. 맞는 말이라 반박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지만, 그 말을 한 이가 하필이면 임소병이라는 게 그들을 더욱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들이 살면서 언제 사파 놈에게 훈계를 들어 보겠는가?

“그래도 남궁 소가주는 좀 낫습니다.”

“어엇?”

남궁도위가 놀라서 임소병을 보았다. 설마 저 인간이 그를 옹호해 줄…….

“직위가 필요하다는 점은 확실히 맞습니다. 이런 인간들을 모아다 회의하느라 시간을 낭비할 바에야, 차라리 제대로 군사 직위를 만들어서 저를 거기에 앉히는 게 낫습니다! 그럼 나쁜 머리를 굳이 굴리느라 고생할 것 없이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 구르기만, 끄아악!”

날아온 목침에 얻어맞은 임소병이 바닥을 떼굴떼굴 굴러 벽에 처박혔다.

“하여간 저 사파 새끼는 낄 데 안 낄 데를 모르고 시시각각 선을 넘는다니까.”

청명이 손을 탁탁 털었다. 멍하니 바라보던 이들은 그 순간 현종이 슬쩍 내밀었던 손을 거두는 모습을 보며 움찔하고 말았다.

어? 그러고 보니 저 목침이 원래 그…… 맹주님 쪽에 있었…….

어…….

“그런데 뭐 일리는 없는 이야기는 아니지.”

청명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꿈틀대는 임소병을 바라보았다.

“그래, 한번 지껄여 봐. 그래서 사패련을 이기고 싶으면 우리가 뭘 해야 하는지.”

“이렇게 패 놓고?”

“아, 그럼 더 맞을래?”

“에이, 썩을.”

흘러나온 코피를 소매로 벅벅 닦은 임소병이 오만상을 쓰며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모두가 긴장한 눈으로 그의 입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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