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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153화 (1,154/1,567)

1153화. 뭐, 꼭 필요하다면야. (3)

“……방장.”

법정이 눈을 질끈 감았다.

‘심마인가?’

최근 들어 화산검협을 생각하면 속이 요동치는 일이 잦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아미타불.”

습관처럼 불호를 외어 마음을 최대한 진정시켰다. 어떻게든 침착함을 되찾은 후 눈을 떴다. 그리고 우려 어린 얼굴로 바라봐 오는 종리형을 마주 보았다.

“장문인께서 무엇을 우려하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

“본산을 오래 비워 두는 게 좋지 않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이곳에서 딱히 성과를 얻지 못한 채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듯해 마음이 급하시다는 것 역시.”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괜히 겸연쩍어진 종리형이 슬쩍 엉덩이를 뺐다. 법정이 말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저희가 먼저 이곳에서 물러나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방장.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이러고 있는다고 해서 얻을 게 생기진 않을 것입니다.”

“…….”

“냉정히 말해 저희는 이미 장강에서 민심을 잃었습니다.”

종리형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저 본산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곳 주민들이 저희를 대하는 태도와 천우맹을 대하는 태도가 눈에 띄게 차이 납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의 사기도 가면 갈수록 떨어지고 있습니다.”

“……아미타불.”

“이러다간 그저 시간만 낭비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잃지 말아야 할 것을 잃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됩니다. 잃은 시간과 이득은 어떻게든 복구할 수 있지만, 한번 무너진 자부심은 쉽사리 회복되지 않는다는 걸 방장 역시 알고 계시잖습니까.”

종리형의 지적은 타당했다. 그 역시 한 문파의 장문에 자리에 오른 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파악하지 못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보기에 지금 법정이 하고 있는 일은 단순한 고집부리기에 지나지 않았다.

“방장. 승패란 병가지상사라 했습니다. 설령 이번에 패한다 한들, 마지막에 이기는 이가 모두 이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지요.”

“이곳은 이미 저희가 패한 전장입니다. 명장은 패전에 미련을 두지 않는 법입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새로운 전장을 구성하고, 패배를 만회하는 데 여력을 쏟지요.”

법정의 입술이 살짝 실룩였다. 종리형이 말한 패전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패전이란 말도, 그 패전의 대상이 심지어 사패련도 아닌 천우맹이라는 것도. 게다가 패전이라는 말까지 들었지만, 실제로는 누구와 주먹 한 번 섞어 보지 못했다는 사실마저 다 마음에 안 들었다.

하지만 가장 껄끄럽고도 속이 타는 부분은, 그 말을 들으면서도 반박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그 자신이었다.

패하지 않았으되, 패한 전쟁.

그것이 법정이 바라보는 이 장강대전(長江大戰)이었다.

“방장의 입장을 전달받은 몇몇 문파가 이미 지원 의사를 밝혀 오지 않았습니까.”

“그러합니다.”

“그들 역시 이 상황을 그저 두고 볼 수는 없다 여겼겠지요. 하지만 방장. 그들을 어디로 오라 하시겠습니까? 이 장강으로? 전쟁이 벌어지지도 않을 상황에 그들을 이곳으로 오라 하시겠습니까?”

“…….”

“소림 방장의 몸으로 객장처럼 이 한데서 객을 받으려 하십니까? 그들이 과연 이곳에 계신 방장을 보면 뭐라 생각하겠습니까? 그 한 몸을 불살라 사패련을 견제하려 하시는 방장께 정말 감탄하겠습니까?”

법정의 입술이 다시 한번 실룩였다. 하지만 종리형은 그런 반응을 보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사람의 권위란 자리에서 나옵니다. 자리란 직위와 위상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말 그대로 있는 곳을 의미하기도 하는 법입니다. 황궁의 옥좌에 앉아 있는 황제와 들판의 막사에 들어앉아 있는 황제가 같아 보일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그 역시 틀린 말이 아니었다.

“방장께서 그들을 맞아야 할 곳은 이곳이 아닙니다. 방장께서 계셔야 할 곳은 다름 아닌 소림입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법정의 입에서 드문 한숨이 새어 나왔다.

다 맞는 말이다. 다 맞는 말. 하지만 문제는, 법정 역시 이 모든 것을 몰라서 이곳에 이리 죽을 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패한 전장이라…….’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이미 패한 전장에 미련을 두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기세를 잃어버린 전장에서 억지로 기세를 만회하려 하다가는 피해만 늘릴 뿐이다.

하지만…….

“장문인께서 말씀하시는 바를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법정이 살짝 머뭇대는 기색을 보이자 종리형이 눈치 좋게 먼저 물었다.

“천우맹 때문에 그러십니까?”

“…….”

“방장……. 방장께서 저들을 신경 쓰시는 것 역시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미 전선이 고착화되어 버린 이상, 저들이 무엇을 하겠습니까?”

종리형이 답답하다는 듯 빠르게 말을 이었다.

“저 역시 저들이 어째서 이곳에 계속 머물러 있는지 그 이유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게 왜 우리가 함께 머물러야 할 이유가 됩니까? 저들이 이곳에 남아 사패련을 막겠다 하면, 그렇게 스스로 방패막이가 되겠다 자처한다면 그러라 하십시오. 그게 왜 우리의 손해입니까. 이득이면 이득이지. 지금 방장께서는 그 간단한…….”

법정의 눈썹이 일순 꿈틀댔다.

“‘간단’이라 하셨습니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얼음장 같은 목소리에 종리형이 입을 꾹 다물었다.

법정 역시 자신이 지나치게 반응했음을 알아챘는지 가만히 눈을 감고 불호를 외었다. 그리고 냉엄한 기운이 빠진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시 천천히 말했다.

“장문인. 하면, 묻겠습니다. 장문인께서 생각하시기에 제가 이곳 장강에 도착한 이후로 결정적인 실책을 저지른 것이 있었습니까?”

“그건…….”

종리형은 차마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처음에 떠오른 생각은 ‘그렇다.’였다. 거꾸로 돌이켜 본다면 장강과 얽힌 후 법정이 저지른 모든 일이 실책이었으니까.

하지만 종리형은 일을 그리 단순히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방장께서 정말 악수를 두셨는가?’

그건 그저 결과론일 뿐이다. 당시의 법정은 가장 최선의 판단을 했다. 오히려 다른 이들이 감정에 휘둘릴 때, 유일하게 냉정한 이였다고 해야 한다.

문제는, 그 냉정하고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이 모조리 악수가 되어 버렸다는 것. 아니, 그 모든 판단을 저 천우맹이 강제로 악수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적이 진을 친 채, 덫을 놓고 기다리고 있는 매화도로 진격하는 것이 정말 옳은 판단이었나? 당시에는 법정의 냉정함에 그조차 학을 뗐지만, 정말 매화도로 진격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는 세 살 아이도 알 것이다.

패한 전쟁에 미련을 두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은 바로 종리형 자신이 아닌가? 이미 끝나 버렸던 그 싸움을 화산이 뒤엎으며 소림과 공동을 방관자로 만들어 버린 것뿐이다.

‘마교 역시 마찬가지지.’

마교를 막기 위해 저 사패련의, 그리고 흑귀보의 본거지나 다름없는 항주로 향하는 것이 정말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판단인가?

명장은 이기는 전장을 선정해야 한다고 말한 것 역시 종리형이다. 그가 보기에도 항주는 그들이 싸울 수 있는 전장이 아니었다. 그 판단은 절대로 잘못되지 않았다.

저 화산이 단독으로 강남으로 쳐들어가 주교의 목을 베면서 소림과 공동을 용기 없는 겁쟁이로 전락시켜 버리지 않았다면 말이다.

“방장…….”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습니다. 대체 내가 무슨 실수를 했는지 말입니다. 열 번, 백 번, 천 번을 다시 생각해 봐도 제가 내렸어야 할 판단은 명확합니다.”

종리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만은 그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올바른 판단의 대가가 무엇입니까? 저 천우맹의 기세는 비할 바 없이 높아졌고, 장강에서 벌어진 사태에 대한 공 역시 모조리 천우맹이 가져갔습니다. 천하의 모든 이들이 소림을 손가락질하고 화산을 칭송합니다. 심지어!”

우득.

법정이 앞에 놓인 다탁을 움켜잡았다. 손가락 끝이 원목을 파고들었다.

“저 사패련마저도 마교를 막은 공이 있으니, 손을 놓고 있었던 소림보단 낫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

“통탄할 노릇이지요.”

법정이 허허 웃어 버렸다.

“순리대로라면 저들은 이미 패가망신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리되었습니까? 저들은 당연히 패해야 할 전장에서 승리하고, 잃어야 할 곳에서 이득을 얻어 냈습니다. 가히 상상할 수도 없는 방법으로.”

“…….”

“다시 묻겠습니다, 장문인. 정말 자라 보고 놀란 이가 솥뚜껑을 경계하는 것이 잘못된 일입니까? 그게 정말 그리도 어리석은 일입니까?”

“방장…….”

“아니요. 제 생각에는 당할 만큼 당해 놓고도 똑같은 짓을 반복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이 없습니다. 머리로 이해할 수 없다면 적어도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말아야겠지요.”

“……그래서 계속 이곳에 계시는 겁니까? 저 천우맹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니 경계를 풀 수 없어서요?”

“…….”

“저들이 이 장강을 떠나지 않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 보시는 겁니까?”

법정이 대답 없이 다탁에서 손을 뗐다. 그의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법정은 결국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제가 답답해 보일 수 있다는 것은 이해합니다.”

종리형은 차마 아니라고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미타불. 하지만 한 번만 더 실기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몰릴지도 모릅니다. 그것만은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종리형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여기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법정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 버린 것이다.

“방장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저는 더 이상 설득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방장. 한 가지는 생각하셔야 합니다. 지금 방장께서 하시는 말씀은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

“듣기에 따라서는……. 예. 듣기에 따라선 그…….”

종리형이 살짝 머뭇대다가 질끈 입술을 깨물고는 격하게 말을 토해 냈다.

“방장께서 그저 저 화산검협에게 겁을 집어먹으신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순간 법정의 눈에서 칼날과도 같은 눈빛이 새어 나왔다. 움찔한 종리형이 즉시 고개를 푹 숙이고는 웅얼거렸다.

“물론 저는 그리 생각하지 않지만…… 생각이 짧은 이들은 그렇게밖에는 받아들이지 못할 겁니다.”

“…….”

“그러니 방장, 한 번만 더 고려해 주십시오. 방장께서도 위에서 이끄시는 입장이니 익히 아시겠지만, 때로는 최선의 선택이 최선이 아니기도 한 법입니다. 다른 이들이 이해하지 못할 만큼 너무 앞서 나간 생각은 뒤따르는 이들을 멀어지게 하여 분열을 낳을 뿐입니다.”

종리형이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권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방장. 과정의 최선이 아닌, 결과의 최선을 생각해 주십시오. 그럼.”

종리형이 방을 나가 버렸다. 법정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말이 없었다.

알고 있다.

말은 저리 해도 종리형은 제자들을 달래고 법정을 변호하느라 필사적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골머리가 썩는 와중에도 아마 어떻게든 법정을 도우려 들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고마움 이전에 헛헛함이 먼저 밀려들었다.

“……겁을 집어먹었다…….”

우습다. 너무 우스운 이야기다.

그가 누구인가? 천년 소림의 당대 방장인 법정이다. 그런 그가 이제 겨우 화산의 삼대제자에 불과한 이에게 겁을 집어먹는다? 그것도 무력 때문이 아니라, 그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게 어찌 우습지 않을 수 있으랴.

“정말 그럴지도 모르지……. 허허허허.”

허탈한 법정의 웃음소리가 방 안을 메웠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지나도록 그 방에서는 불호를 외는 소리도, 염주를 굴리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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