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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152화 (1,153/1,567)

1152화. 뭐, 꼭 필요하다면야. (2)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처음 든 생각은 딱 하나였다.

‘수, 수습해야 돼!’

이 상황을 어떻게든 수습하지 못한다면, 이 방을 나가는 순간 귀신 같은 눈으로 노려보고 있는 저들의 발에 밟혀 죽을지도 모른다.

그럼 ‘남궁 이대 나란히 장강에서 가다.’라고 새긴 묘비가 세워지겠지.

모두가 입방아를 찧을 것이다. 그나마 아버지는 용감히 싸우다 갔지만, 아들놈은 미련하게 주둥이 잘못 놀리다가 응징당해 뒈졌다고 말이다.

‘아, 안 돼.’

남궁도위가 그려 온 수많은 자신의 최후 중에 그런 그림은 없었다. 극심한 위기감에 몸을 떨던 남궁도위가 필사적으로 입을 뗐다.

“이, 일단 이 안건은 조금 미뤄 두시는 게…….”

“왜? 좋아 보이는데. 당장 하면 되지. 뭐 대단한 일이라고.”

“그, 그렇지 않습니다!”

남궁도위의 머리가 살아온 그 어느 때보다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저, 적절한 자리를 만들고, 그 자리에 적절한 사람을 선임하는 건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이런 자리에서 대충 뚝딱뚝딱 정할 만한 일이 아니라는 거지요!”

“흐음?”

“인사(人事)가 만사라고 하지 않습니까! 대대로 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왕조는 반드시 망했습니다! 그러니 기필코 중히 여기셔야 합니다!”

“……그렇게까지?”

“다, 당연한 일 아닙니까!”

“흐으으음.”

청명이 뭔가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근데 그냥 중요한 자리 몇 개는 미리 정해 두고, 다른 자잘한 자리는 나중에 채워도 되는 거 아냐?”

“사,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지 않습니다. 중요한 자리를 먼저 정해 두면 그 뒤의 자리를 선정하는 일은 아무래도 조금 나태해지지 않겠습니까!”

“…….”

“모든 것은 천우맹을 생각하는 제 마음이라는 걸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그, 그래. 청명아. 이건 이 자리에서 바로 정할 일이 아닌 것 같구나.”

“그렇네, 화산검협. 이 일은 장로들과 함께 깊이 고민해 보겠네.”

현종과 당군악마저 남궁도위의 편을 들고 나서자 청명이 입맛을 다시며 슬쩍 한발 물러섰다.

“뭐, 정 그러시다면…….”

“하하. 그래그래. 이게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지, 그럼.”

그때 청명이 슬쩍 남궁도위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예?”

“남궁 소가주님이 혓바닥이 참 능수능란해지셨네.”

“…….”

“원래 안 그랬던 것 같은데 말이야. 요즘 사파 새끼랑 어울려서 그런가?”

“…….”

“좋은 거 배운다. 조오은 거.”

억울한 마음에 남궁도위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입을 벙긋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 사파의 수괴와 비교를 하다니!

“한 번 봐줬다.”

청명이 피식 웃고는 고개를 돌려 모두를 보았다.

“그럼 다른 안건은요?”

“흐음. 안건이라…….”

당군악이 슬쩍 헛기침했다. 이미 여러 번 겪어 본 일이건만, 모두가 평등한 자리에서 서로 의견을 교환하는 것에 여전히 익숙해지질 않았다. 하지만 이럴 때는 그가 무슨 의견이라도 내어야 한다.

“이보게, 화산검협.”

“네, 가주님.”

“전쟁은 일어나겠지?”

당군악을 보는 청명의 눈빛이 뚱해졌다. 이제 와서 뭔 새삼스러운 이야기냐는 뜻이다.

“그럼 자네는 전쟁이 벌어지기까지 이 장강 전선을 유지할 생각인가?”

“그건 우리가 정하는 게 아니죠.”

“응?”

“구파일방 놈들이 정하는 거죠. 저 새끼들이 방을 안 빼고 있는데, 저희가 먼저 방을 빼 버리는 건 좀 그렇잖아요?”

“확실히 그건 맞는 말이군.”

당군악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법정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천우맹 역시 반쯤은 우발적으로 이곳에 자리를 마련한 것이지만, 사실 그보다 더 급작스레 장강에 터를 잡은 건 소림을 비롯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였다.

정확하게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중, 소림과 뜻을 함께하는 몇몇 문파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이야기가 나오니 백천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고 보면 저희가 당장 닥친 일이 급해서 신경을 전혀 못 쓰고 있었는데, 대체 저들은 뭘 하고 있는 걸까요?”

“응?”

“그렇잖습니까. 저희야 여기에서 수련도 하고, 사실 새외 분들이 합류할 곳도 애매하다 보니 자연스레 여기에 눌러앉은 것이지만……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그런 상황이 아니잖아요.”

“확실히 그렇지.”

“발을 빼려면 언제든 뺄 수 있을 것 같은데…….”

초반에는 구파일방 역시 쉽사리 장강을 떠날 수 없었다. 사패련이 언제 강을 넘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패련에 내부 정비가 필요하다는 정보를 저들이라고 모를 리가 없지.”

“그건 구파일방을 너무 무시하는 거지요. 당연히 알고 있을 겁니다.”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사패련이 북상하지 않는다면, 구파는 굳이 장강 유역을 지키고 있을 필요가 없다. 그런데 왜 아직도 저기에 자리를 잡고 있단 말인가?

“뭐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해요?”

“으음?”

모두의 시선이 청명의 얼굴에 꽂힌다.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심드렁했다.

“그렇게까지 깊은 생각을 하는 게 아닐걸요? 그냥 쟤들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되잖아요.”

“……그건 또 무슨 말인가?”

“가주님이 그 대머리 입장이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기껏 꽁지가 빠져라 달려왔는데, 한 건 아무것도 없고. 마교가 발호한다 해서 그걸 기회로 삼아 보려고 했는데, 몇몇 놈들이 가서 싹 해결해 버리고.”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하니 참 곤란하긴 하겠다 싶었다.

“우리야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 편이지만, 저 대왕 대머리는 엄청나게 신경 쓰는 게 있잖아요.”

“체면과 명분을 말하는 거로군.”

“네. 그거죠.”

청명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런 상황에서 우리보다 먼저 장강에서 발을 빼고 싶지는 않았을 거예요. 적어도 자기들이 마지막까지 장강을 지켰다는 명분 하나는 얻고 돌아가고 싶을 테니까요. 처음에는 그냥 딱 하나만 생각했겠죠. 적당히 지켜보다가 우리가 해산해서 각자 문파로 돌아가면 자기들도 빠지겠다.”

“……아.”

“네. 그런데 우리가 집엘 안 가는 거죠.”

“…….”

“그런 상황에서 저희가 쟤들보고 왜 너희 집에 안 가냐고 물으면 쟤들은 속이 터져 죽을걸요?”

당군악이 헛웃음을 지었다.

“자네 말이 다 틀린 건 아니네만, 문파의 본거지를 내버려 두고 이곳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게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네. 화산처럼 종남이 봉문 해 섬서에 영향을 끼칠 문파가 따로 없다면야 문제가 안 되겠지만, 다른 문파들은 잠깐의 공백이 치명적인 문제를 불러올 수도 있지.”

“흠?”

“물론 자네가 말한 체면과 명분이 아주 영향을 안 끼친 건 아니겠지만,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저들이 저리 머물러 있다고 생각하는 건 조금 과한 것 같군. 절대 그것만은 아닐 걸세.”

당군악이 확신을 담아 이야기하는 순간, 임소병이 불쑥 끼어들었다.

“뭔 생각들을 반만 하십니까.”

당군악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임소병은 방 벽에 등을 기댄 채 나른한 얼굴로 말했다.

“손자에서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 하였거늘, 우리 고매하신 정파 분들께서는 하나같이 적은 아시되 자신을 모르신다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린가?”

당군악이 묻자 임소병은 피식 웃었다.

“생각을 해 보십쇼, 생각을. 저쪽에서도 그간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 계속 지켜봤을 것 아닙니까?”

“그…렇겠지?”

애초에 이 장원은 내부의 일을 외부에 감출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게다가 장원의 일을 맡은 이들이 수도 없이 오가니, 굳이 개방을 동원할 필요도 없이 간단히 이곳의 정보를 손에 넣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저들은 사패련보다 천우맹의 동향이 더 궁금할 테니, 당연히 관심을 가졌을 터.

“그럼 저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겠습니까?”

“무슨 생각이라니?”

“저들이 그동안 대체 뭘 보고 들었을지 생각을 해 보시라니까.”

“뭘 보고 들었냐니, 그야…….”

그 순간 백천이 입을 열었다.

“화산과 당가가 온종일 싸움박질해 대고 있고.”

윤종이 그 뒤를 받쳤다.

“당가의 가주님께서 열받아서 장로들을 대동하고 제자들을 쥐 잡듯이 패고.”

당패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갑자기 운남에서 올라온 야수궁이 거기에 참전해서 다른 문파들과 치고받고 있다?”

남궁도위가 식은땀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서, 설마 남궁세가가 녹림과 드잡이질을 하고 있다는 소리까지 퍼졌을까요?”

당군악의 표정이 일그러질 때쯤 머리 뒤로 양손을 깍지 낀 조걸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결정타로 그 꼴을 본 청명이 놈이 반쯤 정신이 나가 버렸다는 소리까지 들었겠지, 뭐.”

“……어?”

“아시겠습니까?”

임소병이 이거 보라는 듯이 쐐기를 박았다.

“지금 ‘너희 여기서 대체 뭘 하고 있냐?’ 하고 묻고 싶은 건 우리가 아니라 아마 저쪽일 겁니다.”

당군악은 이제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 * *

“방장.”

“…….”

“대체 언제까지 여기에 머무를 생각이십니까?”

“…….”

“설마 이곳에서 뼈를 묻을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방장은 눈을 감은 채 침묵했다. 종리형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그를 채근했다.

“방장도 아시지 않습니까. 한동안 사패련은 북상하지 못합니다. 지금 매화도를 점거하고 있는 수로채는 장강을 넘을 여력이 안 됩니다. 수장이 부상당한 수로채가 사패련의 지원 없이 단독으로 일을 벌일 수 있을 리 없잖습니까.”

“…….”

“그런데 왜 이곳에 계속 머물러 계시는 겁니까! 하염없이 시간만 때운 게 벌써 며칠째입니까?”

종리형은 답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제 가슴을 쳐 댔다.

“제자들 사이에서 나오는 불만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저도 저지만, 급하게 본산을 떠나와 이 먼 타지에 발이 묶인 저들의 심정도 이해해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팽가 쪽에서는 이미 단독으로라도 이곳에서 이탈하자는 말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합니다!”

“…….”

“방장! 뭐라고 말이라도 해 보십시오, 제발!”

그 순간 법정이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하지만 그뿐, 그는 깊이 가라앉은 눈으로 종리형을 바라보기만 했다. 여전히 가타부타 말은 없었다.

“……방장.”

그 반응에 종리형이 결심을 굳힌 듯 입을 뗐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층 낮았다.

“이런 말씀은 드리지 않으려 했는데…… 지금 아이들 사이에서는 방장께서 겁을 집어먹었다는 말이 돌고 있습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고 말입니다. 제 말 이해하시겠습니까?”

“……솥뚜껑이라 했소?”

“예. 방장! 그만큼이나 지금…….”

“그게 뭐가 문제요?”

“……예?”

당황한 종리형이 눈을 크게 뜨고 법정을 바라보았다. 법정은 여전히 태연했다.

“자라에게 물린 자가 솥뚜껑을 보고 놀라는 게 왜 잘못이오? 아무렇지 않은 척하다가 다시 물리는 게 더 어리석은 거지.”

법정이 살짝 이를 갈아붙였다.

“미련하고 답답하다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내 저들에게 다시 치욕을 당할 순 없는 노릇 아니겠소? 내 말이 틀리오?”

“바, 방장.”

법정의 눈은 분명 마주 앉은 종리형에게로 향해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종리형 너머에 떠오른 청명의 모습이었다.

‘화산검협.’

법정이 코로 길게 숨을 내뱉었다.

‘또 무슨 수작질을 하는 것인가?’

청명의 환영이 낄낄 웃어 대었다. 법정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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