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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151화 (1,152/1,567)

1151화. 뭐, 꼭 필요하다면야. (1)

“직위?”

청명의 반응은 영 심드렁했다.

“그게 뭐 꼭 필요한 거야?”

그는 방 안에 앉은 이들을 쭉 살피더니 말했다.

“뭐. 그런 거 없어도 누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대충 서로 알잖아. 굳이 뭐…….”

그러자 남궁도위가 발끈하여 말했다.

“아니, 그건 우리끼리 이야기가 아닙니까?”

“……응?”

“막상 전쟁이 났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사패련이 쳐들어옵니다. 그럼 장강에 있는 중소 문파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야…….”

“다들 천우맹과 함께 싸우려고 우리한테 줄을 서지 않겠습니까?”

청명이 살짝 감탄한 얼굴로 남궁도위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그 사람들은 구파일방에 가지 않을까?”

“…….”

순간 할 말을 잃은 남궁도위가 청명을 망연히 보았다. 오검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한 마디씩 보탰다.

“나 같아도 구파일방 쪽에 붙지.”

“솔직히 저건 자신감 과잉이죠. 살려면 구파일방에 붙어야지.”

“소림 대 화산. 구파일방 대 천우맹. 에이, 이건 생각할 것도 없다.”

남궁도위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저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지?”

“사형, 저 양반 남궁세가 출신 아닙니까. 원래 남궁세가 사람들은 자기들이 소림보다 못할 게 없다고 생각한다던데요.”

“……진짜?”

“아니면 저러겠습니까?”

저 새끼들이? 남궁도위는 치솟는 빡침을 가까스로 꾹꾹 눌렀다. 원래 토론이란 먼저 열받는 쪽이 지는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최선을 다해서 이성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상황에 따라서 구파일방 쪽에 가지 못하고 저희와 함께하는 이들도 있을 것 아닙니까?”

“……그렇겠…지?”

청명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마지못해 동의했다. ‘그게 뭔 개소린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어쨌거나 개소리든 나발이든 들어는 준다고 한 것 같으니까 일단 참는다.’라는 의지가 선명하게 녹아 있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사람들이 누가 누구인지 알고 지시를 제대로 따를 수 있겠습니까?”

“흐으음?”

듣고 있던 사람들이 확실히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말 되네.”

“음. 생각 못 했던 문젠데.”

“아니, 그런데…… 대충 남들이 하는 거 보고 따르면 되는 일 아닌가? 사람이면 다들 눈치라는 게 있잖아.”

그 말을 들은 남궁도위가 순간 입을 살짝 벌린 채 조걸을 바라본다. 조걸이 퉁명스레 물었다.

“뭡니까? 그 ‘눈치라는 말이 네 주둥아리에서 나올지 몰랐다’라고 말하는 것 같은 얼굴은?”

“와, 귀신 같으시네.”

“예?”

“아, 아니.”

남궁도위가 크게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물론 눈치가 있으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효율이 떨어지지요. 그리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백발이 성성한 유명 문파의 장로님이 지시했는데, 갑자기 새파랗게 어린놈이 튀어나와선 그게 아니라고, 이쪽으로 가야 한다고 소리치는 상황을 말입니다.”

“어…….”

“그럼 누구 말을 따라야 합니까? 생각하기 어려운…….”

“어린놈.”

“어린 새끼.”

“새파랗게 어리고 싸가지 없게 말하는 새끼.”

“그중에 제일 짜증 내고 있는 놈.”

거의 동시에 튀어나온 대답에 남궁도위가 눈을 끔뻑였다.

“왜, 왜요?”

그는 정말 당황해서 되물었다. 그러자 백천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천우맹에 나이 든 장로님을 무시하고 짜증 내며 제 할 말만 하는 놈이 하나밖에 더 있겠습니까?”

와, 그거 진짜 설득력 있네.

남궁도위는 납득했다. 그러다 이내 정신을 차렸다.

“그, 그렇긴 하지만…… 그건 저희끼리만 아는 거잖습니까! 외부 사람들은 화산검협이라는 별호는 알아도 청명 도장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른단 말입니다.”

“저기, 소가주님.”

“네?”

“……우린 청명이라고 안 했는데.”

“…….”

“…….”

남궁도위가 떨리는 눈으로 청명을 돌아보았다.

청명이 ‘아? 그렇게 보고 계셨단 말이지?’라는 얼굴로 빙긋 웃으며 바라봐 오고 있었다. 남궁도위는 저도 모르게 청명의 시선을 피해 버렸다.

“크, 크흠.”

이럴 때일수록 빨리 화제를 전환해야 한다.

“하여튼 그…… 저 사람을 잘 모르는 이들이 겪을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체계와 직위는 필요합니다.”

그 순간 유이설이 손을 들었다.

모두가 화들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심지어 당군악조차 당황한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지금까지 있었던 숱한 회의에 유이설은 빠지지 않고 참석하곤 했었다. 하지만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려 든 건 처음이었다.

“그, 그…… 어, 그래. 말해 보거라, 이설아.”

“정말 모를까요?”

“……응?”

“쟤를?”

유이설이 고개를 돌려 청명을 바라보았다.

유이설의 말은 고작 두 마디에 불과했지만, 그 말이 모두를 납득하게 했다.

“……솔직히 모를 수가 있나?”

“사실 아직도 모르면 강호인이 아니지.”

“쟤 얼굴은 모를 수 있다고 치는데, 화산에서 날뛰는 어린놈을 보면 지나가던 동네 애새끼도 ‘아, 쟤가 화산검협이구나.’ 하겠다.”

“청명이 놈 모르려면 귀 막고 살아야 하는 거 아님?”

남궁도위가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면 저 말도 영 틀리지 않다. 화산검협의 악명……. 아니, 위명이 너무 드높다. 지금이야 좀 바래 버린 옛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어쨌거나 한때 화산신룡이라는 별호로 불릴 때는 천하제일 후기지수로 인정받기도 했었고…….

‘항주마화 이후로는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명해졌지.’

상대가 다른 곳도 아닌 마교다.

실제로는 장일소와 함께 연합하여 주교와 싸운 것이지만, 아무리 천우맹이라 해도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할 수는 없으니, 대충 청명이 놈이 다른 천우맹도들과 함께 주교를 때려잡았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사패련은 사패련대로 장일소가 주교를 잡았다고 주장하는 중이고.

여하튼 저 구파일방조차 차마 이 사실에 대놓고 딴죽을 걸지는 못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다 보니, 청명이 주교를 이겼다는 소식은 이미 천하에 파다했다.

어쩌면 천우맹이라는 이름보다 화산검협 청명이라는 이름이 더 유명할지도 모르는 상황 아닌가?

한 무인이 얼마나 유명한가는 동네 작은 골목길을 돌아보면 알 수 있다. 어린아이들이 작대기를 휘두를 때, ‘매화검법’을 외치고 ‘화산검협’을 소리치는 상황이면 다 끝난 거지, 뭐.

“그, 그게…….”

말문이 막힌 남궁도위가 우물쭈물하자 사람들이 혀를 찼다.

“소가주님이 쓸데없는 데 집착하는 면이 있으시네…….”

임소병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원래 있는 집 자식 분들이 쓸데없는 격식을 못 만들어서 안달 아닙니까. 남궁세가 소가주신데 오죽하시겠습니까? 남궁세가가 천우맹의 맹주가 되었으면 저기 바닥 쓰는 인부 하나까지 직위가 생겼겠지요. 장원환경관리위사 뭐 이런 걸로.”

“끄으…….”

임소병에게 얻어맞으면 다른 이들에게 맞는 것보다 세 배는 더 아픈 기분이다. 어떻게든 항변해 보고 싶지만, 처음부터 예시를 잘못 들어 버려서 도무지 그럴 빌미가 나오질 않았다.

하지만 그때, 마음 착한 현종이 남궁도위를 구해 주었다.

“으음. 그리 말할 것만은 아닙니다.”

모두가 현종을 바라보았다.

“맹에 속한 이들이 모두가 청명이 녀석처럼 유명한 것은 아니잖습니까?”

“그 말씀이 맞습니다, 맹주님.”

“사실 직위란 권위를 만들어 내는 법이라 저 역시 그리 탐탁지는 않습니다만…….”

현종이 살짝 겸연쩍은 얼굴로 모두를 보았다.

모든 것을 자연 그대로 물 흐르듯 내버려 두라는 가르침에 따르는 도가의 도인으로서는, 사람의 역할을 한정하고 세분화하는 과정이 그리 마음에 들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적절한 직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에 공감합니다. 각 문파의 장로들이 서로 의견이 달라졌을 때는 문제가 생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민감한 문제지.”

당군악과 맹소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각 문주들끼리는 다툴 일이 그리 없다. 서로 간에 어느 정도 암묵적 규칙이 쌓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각 문파의 장로들은 아직도 자신의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의견을 조율할 시간이 있는 상황이라면 딱히 문제 될 게 없을 것이다. 하지만 순간순간의 판단으로 전황이 뒤바뀌는 전쟁에서는 그 작은 의견 충돌이 커다란 문제를 야기할 가능성이 있다.

특히나…….

“대부분 피해는 우리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싸우는 중소 문파 사람들이 받게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겐 별문제가 없다는 정도의 이유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으음.”

“그런 의미에서 남궁 소가주께서 아주 잘 지적을 해 주신 셈이겠지요.”

“맹주님…….”

현종을 바라보는 남궁도위의 눈에서 감격이 뚝뚝 흘렀다.

과연 저 깊은 생각과 따뜻한 배려, 천우맹의 맹주가 되기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는 저 인품!

조금 전 임소병은 남궁세가가 천우맹의 맹주가 되는 상황을 이야기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본디 남궁황은 천하에서 가장 오만한 이 중 하나였다. 자식인 남궁도위조차도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남궁황이라 해도 현종을 겪어 보았다면 결국 맹주 자리를 내어 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화산이 천우맹을 이끄는 것이 참 다행이었다. 저런 분이 맹주가 되어…….

“……그런데.”

그 순간 청명이 살짝 의혹 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응?”

“아니, 뭐…… 반대하는 건 아니고. 갑자기 좀 근본적인 의문이 들어서 그러는 건데요.”

당군악이 의아하다는 투로 물었다.

“근본적인 의문이라니, 뭘 말하는 건가?”

“그…… 지금 그 중소 문파를 지키는 게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그렇지.”

“우리가 걔들 목숨까지 신경 써 줘야 돼요?”

“…….”

“막말로 걔들이 뭘 했다고?”

“…….”

“…….”

모두가 할 말을 잃고 청명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청명은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무슨 틀린 말이라도?”

“그…….”

순간 아연해진 이들이 멍한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다 일제히 눈을 질끈 감았다. 심지어 현종조차도 양손으로 얼굴을 감쌀 뿐, 차마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어쩌다가……. 어쩌다가 저런 현종 아래에서 저런 인간이 나왔단 말인가? 그리고 이곳의 모두는 어쩌다가 저런 인간의 지시를 받고 있단 말인가?

청명도 눈치가 아주 없는 건 아니라 주변을 살피더니 스리슬쩍 말을 바꿨다.

“뭐, 꼭 필요하다면야 반대는 안 하겠는데…….”

“저기요. 남궁 소가주님.”

그 순간 조걸이 슬그머니 말을 건네었다.

“예? 예, 조걸 도장.”

“소가주님의 말씀대로라면 저 새끼도 적당히 높은 자리 하나는 차지하겠죠?”

고개를 돌려 청명을 본 남궁도위가 잠깐 생각에 잠겼다.

청명이라, 청명…….

“그…렇겠지요?”

아무리 생각해도 저 사람을 빼놓을 방법이 없다. 효율적이라는 명분하에 벌어지는 일이라면 저 사람에게 총사 정도의 자리를 줘서 각 문주를 제외한 모두가 명을 따르게…….

생각을 이어 가다 순간적으로 상황의 심각함을 이해한 남궁도위는 우뚝 굳어 버렸다. 얼굴이 삽시간에 희게 질렸다.

‘여기에 감투까지 쓴다고?’

저 사람이?

조걸이 황급히 손을 들었다.

“저, 저는 반대……!”

“아, 그래?”

하지만 그 순간 청명이 흐름을 놓치지 않고 불쑥 끼어들었다.

“그렇게 되면 내가 하는 말을 안 들으면 반란군 되는 건가?”

“……자, 잠시만요. 도…….”

“그럼 나는 찬성.”

청명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만들자고, 그 직위인지 뭔지.”

그 순간, 모두의 칼날 같은 시선이 남궁도위에게 꽂혔다.

남궁도위는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러 버렸는지 깨달았다. 그의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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