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0화. 할 건 다 했는데 말이야. (5)
“소가주님, 어디 가십니까?”
“음.”
남궁도위는 말을 고르며 잠시 머뭇댔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중진 회의? 운영진 회의? 가주 회의?’
화산검협이 각 문파의 문주들을 다 불러 모으기에 가는 와중이었지만, 다른 이에게 설명할 적당한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생각해 보면 굉장히 중구난방이구나.’
일반적인 맹은 직위 구분이 굉장히 엄격하다. 각 문파의 문주들이야 따로 직위를 마련해서 앉히기가 어려운 면이 있으니 문주로 통칭한다고 하지만, 맹에서 따로 일해야 하는 각 문파의 장로들이나 중진들은 적당히 자리를 만들어 주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괴이하게도 천우맹만은 그런 자리가 따로 없었다. 워낙 청명의 성향이 자유분방하기도 하고, 현종 역시 그런 것을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맹주를 맡은 문파가 도가라 그런가?’
만약 남궁도위의 선친인 남궁황이 천우맹의 맹주였다면, 우선은 맹의 체계화부터 손을 댔을 것이다. 맹이 해야 할 일마다 주도할 직위를 만들고, 그 직위에 적절한 인사를 배치하는 것부터 시작했겠지.
‘하여튼 볼수록 참 독특한 곳이야.’
“소가주님?”
“아, 음……. 그래. 화산검협께서 부르시는구나.”
“아아, 두목단 회의 가시는군요.”
“……무슨 회의?”
태연하게 대답한 이의 옆구리를 옆에 선 이가 팔꿈치로 쿡 찔렀다. 그러자 말을 한 이가 아차 하고 입을 다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잘 다녀오십시오.”
“…….”
“다녀오십시오.”
“어, 어……. 그래.”
가솔들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하자 남궁도위가 등 떠밀리듯 몸을 돌렸다.
‘두목단?’
그, 뭐랄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우리 그…….’
한 맹의 대소사를 맡아 보는 이들에게 붙일 만한 말은 아닌 것 같…….
‘잠깐만.’
남궁도위가 미적미적 앞으로 옮기던 발을 멈추었다.
그러니까…… 사람은 많은데, 정확한 직위는 좀 애매모호하고, 모든 일은 그냥 능력이 있는 사람이 대충 알아서 하며…… 보통은 대가리 중에서 가장 머리가 좋은 사람이 대충 정한 방향을 생각 없이 따라가는 집단이 그러니까…….
“……산적이잖아.”
어쩐지 뭐가 굉장히 낯설면서도 익숙하다 했다! 이게 산채지, 이게!
물론 가솔들이 이런 점까지 생각해서 두목단이라 부르지는 않았겠지만, 저들도 뭔가 느낌이 그랬다는 이야기 아니겠는가?
‘이, 이대로는 안 돼!’
부르르 몸을 떤 남궁도위는 눈에 불을 켜고 회의가 열리는 현종의 처소를 향해 빠르게 발을 옮겼다.
‘바꿔야 한다!’
굳은 다짐을 가슴에 새기며 말이다.
* * *
“전부 오셨어요?”
깨달음을 얻고 이성을 되찾은 남궁도위가 냉정한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러고 보면 애초에 모인 사람부터 이상해.’
무릇 세상 모든 일이란 적당한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 그 형식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공과 사를 혼동하게 된다. 모든 집단에서 발생하는 패악은 바로 이 공과 사의 혼동에서 나오는 법이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를 보라. 모인 사람들의 면면이 너무 제멋대로이지 않은가?
“대충 다 오신 것 같은데?”
“…….”
바로 저 인간이 문제다. 저 인간이. 언제나 청명을 비롯한 오검을 친애의 눈으로 바라보던 남궁도위의 눈이 오늘따라 샐쭉했다.
‘청명 도장이야 어쩔 수 없다 치고, 솔직히 다른 분들은 확실히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오해는 금물이다. 남궁도위가 저들에게 좋지 않은 감정이 있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다. 남궁도위는 오검이 맹의 대소사에 의견을 낼 자격이 충분하다고 본다. 하지만 어떠한 직위도 없이 내키는 대로 누구는 들어오고 누구는 들어오지 않는 게 문제인 것이다.
그러니…….
“네, 사형. 다 오신 것 같아요.”
당소소도 들어오잖아, 당소소도! 아니, 애초에 쟤는 오검도 아니잖아!
‘아니, 최근에는 오검이라 불리던가?’
예전에도 그런 기미가 있기는 했지만, 청명은 도저히 다른 오검과 하나로 묶어 부를 수 있을 만한 이가 아니다.
물론 오검도 이제는 후기지수라 부르기 민망한 이들이다. 저 나이대에서 그들과 그나마 실력을 비교할 수 있는 이는 혜연과 남궁도위 두 사람이 유일할 테니까.
과거 오룡이라 불렸던 이들은 지금은 굳이 백천이 나설 필요도 없이 윤종이나 조걸 선에서 정리된다. 아니, 냉정하게 말하면 당소소 선에서 정리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오검도 물론 대단한 이들이다.
하지만 화산검협 청명은 그런 수준에서 논할 이가 아니다. 청명과 일대일로 대적이 가능한 이를 논하려면 각 문파의 최고수를 끌고 와야 하는 상황 아닌가?
‘솔직히 그것도 어려울 것 같지만.’
청명이 장일소와 함께 주교와 싸우던 모습을 지켜본 이라면, 세간에서 논하는 청명의 무위가 실제 실력보다 굉장히 과소평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천하에서 청명을 상대할 수 있는 이가 열 손가락 안에 꼽힐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이를 어떻게 오검이란 이름으로 한데 묶겠는가?
그러다 보니 사람들도 슬슬 오검에서 청명을 뺐다. 그리고 오검을 사검이라 부르는 대신 협행에 자주 함께 나섰으며, 또한 최근엔 매화도에서도 협명을 날린 당소소를 슬그머니 밀어 넣고 있는 상황이지만, 어쨌거나 공식적인 건 아니니까.
‘그래. 화산은 그렇다 치자, 화산은.’
“아니, 아직 녹림왕이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럼 저 양반은 왜 있냐고! 남궁도위가 살짝 일그러진 눈으로 당패를 바라보았다.
애초에 여긴 문주급 회의다! 그런데 왜 당가의 소가주인 당패가 당연하다는 듯 자리를 잡고 있냐 이 말이다. 당군악이 이미 와 있는데!
“아이고! 제가 좀 늦었습니다.”
“크흠. 안녕하슈.”
남궁도위의 뺨이 실룩였다.
그의 시선이 이번엔 녹림왕의 뒤를 따르는 철신장 번충에게 꽂혔다. 그간은 저 장비의 현신 같은 외양을 보며 감탄하면 그만이었지만, 한번 거슬리기 시작하니 온갖 것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애초에 저 사람은 장로도 아니잖아!’
수행할 이를 데리고 오려면 그 일장로인가 뭔가 하는 사람도 있더구만, 왜 굳이 저 사람을 회의에 끌고 들어온단 말인가? 딱 봐도 머리를 써야 하는 회의에 필요한 사람도 아니건만!
“왜 그렇게 보슈?”
“……아닙니다.”
고개를 돌려 버린 남궁도위의 입에서 한숨이 푹 새어 나왔다. 그의 시선은 이제 만악의 근원에게로 꽂혔다.
“다 왔어?”
저 인간이다. 바로 저 인간! 만악의 근원!
심드렁한 어조로 입을 떼는 청명을, 남궁도위는 도끼눈을 뜬 채 바라보았다.
세상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다. 애초에 이 모든 일은 화산의 삼대제자라는 말도 안 되는 신분으로 적당한 직위 하나 없이 회의를 주도하는 저 인간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당패에, 오검에, 번충까지!
저들의 존재에 대해 딴죽을 건다고 해도, ‘화산 삼대제자도 들어오는데, 왜 저만 가지고 그러시는지?’라는 한 문장으로 모조리 반박되어 버리지 않는가?
‘이건 뭔가 잘못됐다.’
앞으로 맹은 더 많은 일을 겪어야 한다. 그러니 이쯤에서 확고한 체계를 잡을 필요가 있다. 다름 아닌 천우맹을 위해서 말이다.
“오늘 이렇게 다들 부른 이유는 앞으로의 일에 대해 좀 논의해 볼 필요가 있어서예요.”
청명이 모두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일단 대충 큰 문제는 다 끝난 것 같으니까, 이제부터 뭘 중점으로 해 나갈지를 같이 좀 이야기해 봐야 할 것 같아서.”
“음.”
당군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생각에는 맹도들의 수련에 대한 문제는 일차적으로 끝이 났다?”
“네.”
“……이날이 오긴 오는군.”
그 말에 모두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기나긴 동굴 속에서 마침내 광명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논의하자는 말은?”
“말 그대로예요.”
청명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지금까지야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죠. 좀 급한 일이기도 했고.”
“그렇지.”
청명이 닥치고 일을 추진할 때 의혹 어린 눈으로 그 과정을 지켜보던 이들도, 지금은 그게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는 것에 공감하고 있다.
원래대로라면 영원히 서로 섞일 수 없어야 했을 녹림과 남궁, 새외의 무인들과 중원인이 최근 들어서는 격의 없이 서로를 대하고 있지 않은가?
‘격의가 너무 없어서 문제기는 하지만.’
어쨌든 통합이 되었다는 건 분명 다행스럽게 여길 일이었다. 만일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맹을 이끌고 전장에 나섰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
당군악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는 이미 매화도에서 서로 다른 문파가 어우러질 때 내는 파괴력을 실감한 바가 있다. 만약 그때 당가가 화산의 뒤를 제대로 받쳐 주지 못했다거나, 화산이 당가를 보호하며 선두에서 길을 열어 주지 않았더라면 전투의 양상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단순히 지금 이 장원에서 서로 화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천우맹이 거쳐 나가야 할 일들을 위해서라도 그 숱한 훈련은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다. 그 과정이 지옥 같았다는 건 밀어두고라도 말이다.
“급한 불은 껐으니, 이제 다음에 뭘 할 건지를 생각해야죠.”
“음, 과연.”
그 말을 들은 이들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다.
첫 번째는 ‘과연 천우맹은 이런 일 하나도 서로 논의해서 추진하는구나’ 하고 감탄하는 이들. 대체로 빙궁이나 야수궁처럼 아직 화산을 많이 겪어 보지 못한 이들이었다.
두 번째는…….
“아니, 회의는 뭐 하러 하냐! 그래 봐야 결국에는 너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면서!”
오검처럼 청명이 여는 회의 자체에 불신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내가 언제?”
“언제? 언제? 지금 언제라고 했냐?”
“쯧쯧쯧. 이래서 생각이 짧은 것들이란! 나는 지금까지 회의를 통해서 모두의 의견을 편견 없이 수렴해 왔다니까?”
“사숙.”
“응?”
“제가 아는 편견과 저 새끼가 말하는 편견이 좀 다른 의미입니까?”
“뻔한 소리를 하는구나. 청명이가 하는 말 중에 우리와 같은 의미를 가진 것은 ‘저 새끼 대가리를 깨 버린다’밖에는 없단다.”
“아, 이제 좀 이해가 가네요.”
“근데 진짜 이 새끼들이?”
청명이 발끈하자 현종이 손을 쭉 뻗어 그의 뒷덜미를 잡아 누르고 제압했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외다.”
청명의 말에 심드렁하던 이들도 현종이 입을 열기 무섭게 표정을 진중히 가라앉혔다.
“말씀하시지요, 장문인!”
“아니! 태도 다른 것 보소! 너희 지금 사람 차별하냐?”
“……그래야 하는 거 아냐?”
“어? 어……. 맞지. 어, 그렇지. 차별해야지.”
아무리 그래도 내가 장문인과 같은 대접을 받으면 안 되지. 아암, 그렇고말고.
순식간에 납득하여 고개를 끄덕이는 청명을 보며 모두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 새끼는 대체 언제 철이 들려나.
현종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간 다들 고생이 많았습니다.”
“아닙니다, 맹주님!”
“다들 정신없이 달려오느라 사실 천우맹이 해야 할 일들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니, 이 기회에 다들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문제들을 꺼내 놓고, 다 같이 이야기해 봅시다. 앞으로 천우맹이 어떤 부분들을 고쳐 나가야 하는지 말이외다.”
“고칠 점이라기에는…….”
“그냥 사람 하나만 고치면 될 것 같은데요?”
“근데 저 사파 새끼가?”
“난 누구라고 이야기 안 했는데. 왜, 찔리십니까?”
“나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가는 처소 안에서 남궁도위가 당당하게 손을 들었다. 현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시지요, 소가주.”
“우선!”
남궁도위가 힘차게 말을 내뱉었다.
“제멋대로인 천우맹의 체계를 정비하고, 제대로 된 직위를 신설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는 주변에 있는 이들을 쭉 돌아보며 일갈했다.
“지금처럼 중구난방인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그 말에 속이 찔린 몇몇이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