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9화. 할 건 다 했는데 말이야. (4)
한 노인이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고 있다.
허리까지 내려온 백발과 가슴팍까지 길게 자라난 수염, 새하얀 눈썹과 전신에 두른 새하얀 의복까지. 선풍도골(仙風道骨)이라는 말을 절로 연상시키는 풍모였다.
또한, 그 노인은 평범한 사람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분위기마저 풍겼다. 지켜보는 이가 절로 경건해지는 고아한 분위기 말이다.
신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 해도 이 노인을 보게 된다면 세상에 신선이 존재한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리라.
조금 빛이 바랜 노인의 입술이 살짝 열리며 속삭이는 듯한 진언(眞言)이 흘러나왔다.
어두운 실내를 밝히며 흔들리는 무수한 촛불, 그리고 그 중앙에서 진언을 외고 있는 신선 같은 노인.
그 경건함을 깬 것은 낡은 문을 비틀어 여는 듯한 날카로운 경첩 소리였다.
끼이이이익.
거친 소리가 노인이 외는 진언 소리에 섞여들었다. 하지만 노인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한 듯, 흔들림 없는 자세로 진언을 외었다.
저벅. 저벅.
선명한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진다.
노인의 주변에 머무르고 있던 평화와 고요가 그 발소리에 이지러지는 순간, 노인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다녀왔다.”
이곳에 존재하는 이는 노인뿐이니, 분명 노인을 향한 말이리라.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그 말을 듣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보인 반응이라고는 노래하듯 외던 진언을 멈춘 것뿐이었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군. 빌어먹을 굼벵이 같은 놈들 때문에.”
목소리가 흘러나올 때마다 방 안의 촛불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하지만 가라앉은 노인의 마음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지시대로 놈은 죽였다.”
사람의 죽음은 어느 때고 결코 작은 일이 아니리라. 그럼에도 여전히 침묵하는 노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쓸데없는 짓을 한 것 같더군. 굳이 가지 않아도 될 뻔했다.”
들려오는 목소리에서 살짝 날카로운 감정이 묻어났다.
“내가 가지 않았어도 중원 놈들의 손에 죽었을 테니까.”
노인의 입에선 대답 대신 다시 진언이 흘러나왔다. 그 어떤 목소리도, 그 어떤 일도 노인의 평정을 깨뜨리는 것은 어려워 보였다.
“그 화산 놈의 손에 말이야.”
그리고 그 순간, 계속될 것만 같던 노인의 진언이 잦아들었다.
노인이 입을 굳게 다물자 두 사람이 존재하는 방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긴 침묵 끝에, 마침내 노인이 읊조리는 듯 아련한 목소리로 입을 뗐다.
“화산이라…….”
그는 눈을 감은 채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운 이름이로군.”
“흥.”
노인 뒤에 선 사내, 천살이 눈살을 찌푸리며 노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래도 그 귀에 화산이라는 말은 들리는 모양이로군.”
“그래. 그리운 이름이지. 그들이 아직 남아 있을 줄이야.”
노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맺혔다.
“가능하다면 한번 보고 싶은데. 그 화산이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마음 같아서는 과거 그대로였으면 좋겠군. 내게는 과거와 이어져 있는 것들이 그리 남지 않았으니까.”
그 말을 들은 천살의 입가가 살짝 비틀렸다.
“별로 변하지 않았어.”
“그건 반가운 소리군.”
“심지어 검존 같은 놈도 있더군.”
그 순간이었다.
이제껏 고정되어 내도록 움직이지 않던 노인의 고개가 천천히 뒤로 돌았다. 동시에, 굳게 닫혀 있던 노인의 눈이 뜨였다.
노인의 눈은 평범한 이들의 것과 너무도 달랐다.
핏빛처럼 붉고, 칠흑처럼 어둡다. 붉고 검은 색이 뒤섞인 듯한 눈이 새하얀 외양 가운데에 점 찍히듯 박힌 순간, 신선 같던 노인의 풍모가 순식간에 뒤바뀌어 버렸다.
지금 이 노인의 모습을 본 이는 더는 신선을 떠올리지 못할 것이다. 눈은 내면을 담는 마음의 거울이다. 한데 이자의 눈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짙고 짙은 어둠뿐이니까.
“……뭐라 했지?”
“쿡쿡쿡쿡.”
천살이 입을 가리고 웃어 대었다.
“이제는 귀까지 먹어 버렸나?”
“뭐라 했는지 물었다.”
“검존 같은 놈을 봤다고 했다.”
“검존?”
촛불이 떨리기 시작했다. 아니, 엄밀히 따지면 노인이 존재하는 전각 전체가 뒤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네가 말하는 검존이, 설마 그 저주받을 놈을 칭하는 것인가?”
“세상에 검존이 또 있었나?”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던 노인의 머리가 점점 거꾸로 치솟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천살이 하핫 소리 내어 웃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진정하지, 대주교. 그냥 느낌일 뿐이야. 애송이였다. 그래, 그저 애송이였어.”
“…….”
“하긴, 모르지. 한 오십 년만 지나면 진짜 검존 같은 놈이 될지도.”
“불가능하다.”
치솟았던 노인의 머리가 삽시간에 다시 가라앉았다. 평정을 되찾은 노인은 조금은 날카롭게 변해 버린 목소리로 일갈했다.
“세상에 그런 놈이 또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 말도 맞군.”
노인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화산이 부활했고, 다시 검존 같은 이를 키워 내고 있다는 거로군.”
“눈에 띄는 건 한 놈이지만…… 싹수가 보이는 놈들도 분명 있긴 하더군. 지긋지긋한 놈들이야.”
“그만큼 세월이 흘렀다는 거겠지.”
노인의 목소리에 회한이 묻어났다.
“백 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니까. 기틀조차 사라진 문파가 다시 꽃을 피워 내기에 부족한 시간은 아니겠지.”
“우리가 여기서 썩어 가고 있을 동안 말이지.”
그 말에 노인의 입가가 살짝 실룩였다.
“천살.”
“알고 있으니 고리타분한 이야기는 적당히 해 두라고. 백 년 동안 들었더니 이제 신물이 날 지경이니까.”
노인이 가만히 천살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린다. 그의 시선이 다시 앞으로 고정되었다.
“교도들은 어찌했느냐?”
“그 아둔한 놈의 지시를 따른 것뿐이라고는 하나, 지은 죄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 죄를 물어 마곡(魔谷)에 한 달 동안 들어가라고 했다.”
노인은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천살이 슬쩍 그의 등을 보며 퉁명스레 말했다.
“분명 나 역시 그 애송이 놈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만…….”
“…….”
“그놈이 했던 말 중 한 가지만은 동의한다. 너와 내 삶도 얼마 남지 않았어. 만약 천마께서 우리가 죽기 전에 재림하지 않으신다면…….”
“천마께서는 돌아오신다.”
“그렇겠지. 그래, 네 말대로겠지. 하지만 그분께서 우리가 죽기 전까지 스스로를 찾지 못하신다면, 그건 재림하지 않은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노인이 날카로운 눈으로 천살을 쏘아보았다. 그러자 천살이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나는 지금까지 그저 기다리는 것이 내 신심을 증명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 다른 생각도 들더군. 어쩌면 이곳에서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 안일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말이야.”
“누누이 말했지만…….”
“중원의 상황이 재미있게 돌아가더군.”
말을 멈춘 노인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천살은 더 이상 노인을 비웃지 않았다. 되레 노인보다 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큰 전쟁이 벌어질 확률이 높아. 중원 전체를 휩쓸 대전이 말이야.”
“…….”
“이해하겠나? 굳이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중원이 겁화로 뒤덮일 것이다.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겠지?”
노인의 입이 굳게 닫힌다. 하지만 그의 입술은 이전과는 달리 분명 미미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그분에게는 그것조차 작은 일에 불과하겠지. 하지만 우리에게는 아니야.”
천살이 살짝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런데도 정말 이렇게 그저 기다리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살심이 동했군.”
대화의 흐름을 끊고 들어오는 노인의 말에 천살의 표정이 굳어졌다.
“화산의 아이라고 했나?”
“지금 그 이야기는…….”
“새삼 더 궁금해지는군. 그래 봐야 백 년도 살지 못한 이에 불과할 텐데, 어떤 자이길래 너를 뒤흔들어 놓았는지.”
“…….”
“하기야, 그저 갖다 붙인 것에 불과하다 해도 검존이라는 이름은 아무에게나 들이밀 수 있는 게 아니겠지.”
검존을 가장 증오하는 곳은 교다.
그들이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대신 검존의 영혼에 조그마한 생채기라도 낼 수 있다면 교도들은 망설임 없이 그 일을 행할 것이다. 감히 훼손되어서는 안 될 절대의 신성을 훼손하고 무너뜨린 이가 바로 검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꾸로 검존을 세상에서 가장 인정하는 곳 역시 교다.
그들이 검존을 폄하하는 순간, 그 검존의 손에 목숨을 잃은 천마의 신성 역시 무너진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검존은 결코 훼손되어서는 안 되는, 절대적인 악으로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단순히 교리적인 문제를 제쳐 놓더라도 전쟁 당시의 검존을 겪어 본 이라면 차마 그 검존을 폄하할 수 없을 것이다. 욕하고 저주하며 울부짖을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내 말을 똑똑히 들어라, 대주교.”
“…….”
“싸우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다. 이곳이 지겨워져서 이러는 것도 아니야.”
“…….”
“그저 나는 걱정하는 것뿐이다. 그 전쟁에 수많은 이들이 휩쓸린다면, 아직 각성하지 못하신 위대하신 분 역시 안전을 장담할 수는 없을 터. 무언가 조치를 할…….”
“그분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뿐이다.”
“……지금 내 신심을 의심하는 건가?”
천살의 두 눈에 일순 살기가 솟구쳤다.
하지만 노인은 그저 담담한 시선으로 살기를 받아 낼 뿐이었다. 결코, 흔들리지 않는 고요한 호수처럼.
천살의 표정이 슬쩍 일그러졌다.
“얼마나 인내하고 기다릴 수 있는가가 신심의 척도가 되어 버린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다.”
“그건 변명이다.”
“아, 그래?”
천살의 눈이 묘한 호선을 그렸다.
“확실히…… 나도 궁금하긴 하군. 네가 그저 믿고 기다리자고 하는 것이 정말 그분께서 우리를 찾으실 거라 믿어서인지.”
그의 입꼬리 역시 천천히 뒤틀려 갔다.
“아니면…… 너 역시 그분이 재림하셨다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해 그저 두려워하는 것뿐인지 말이야.”
“잘도…….”
그 순간 노인에게서 어마어마한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새하얀 백의가 순식간에 검은빛으로 물들고 그의 몸 주위로 악령 같은 마기가 굶주린 아귀처럼 휘돌기 시작했다.
“아픈 데라도 찔리셨나?”
“천살!”
“그러니 나를 말릴 생각은 하지 말라고. 나는 너와 생각이 다른 것뿐이니까. 네가 생각이 다르다면 나는 내 나름대로 방법을 찾겠다.”
“그분께서는…….”
“마지막 순간에!”
천살이 돌연 울부짖듯 노인의 말을 잘라 냈다.
“내 숨이 끊기는 마지막 순간에, 직접 그분을 찾아 나서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죽고 싶지는 않다. 차라리 그분의 허락 없이 움직인 죄의 대가로 재림하신 그분의 손에 광영 어린 죽음을 맞는 쪽을 택하겠다.”
“…….”
“말릴 수 있다면 말려 봐라, 대주교. 하지만 나를 말릴 방법은 나를 죽이는 것 외에는 없을 거다.”
천살이 몸을 돌렸다.
“그것도 나름 나쁘지 않겠지. 오랜 친구여.”
천살이 미련 없이 대전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노인은 천살이 닫고 나간 문을 빤히 바라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중원에 발을 들여서는 안 되는 것을.’
그곳은 인간의 마음을 뒤흔든다.
그렇기에 다른 교도들을 보내지 못하고 천살을 직접 보냈건만 설마 저 천살마저 뒤흔들려 올 줄이야.
‘천마시여…….’
노인이 눈을 감았다.
“완전하신 당신께서 완전하지 못한 저희의 고통을 어찌 이해하시겠나이까? 부디…… 부디 하루빨리 재림하시옵소서. 부디…….”
노인의 입가에서 다시 진언이 흘러나왔다. 끊임없이 이어지며 노래처럼, 흐느낌처럼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