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8화. 할 건 다 했는데 말이야. (3)
“끝났는가?”
“조, 조금 남았…….”
“아니, 대체 마당 쓰는 일이 뭐 얼마나 대단한 일이라고 매번 이렇게 제시간에 못 끝낸단 말인가? 게으름이 너무 심한 것 아닌가?”
“아이고, 말도 마십시오. 시간 내에 끝낸다고 대강 했다간 불호령이 떨어집니다. 화산의 장로님이 오셔서 밥버러지라고 얼마나 역정을 내시는지!”
“……현영 장로님 말인가?”
“제가 함자는 정확하게 잘 모릅니다만, 그 꼬장꼬장한 분…….”
“맞군.”
“예. 여하튼 그분이…… 장원에 오가는 사람들도 많은데 깨끗하게 유지가 안 되면 보는 이들이 이곳에 모인 이들을 쉽게 본다시며…….”
“……그럼 쓸어야지.”
“예?”
“…….”
장원에서 일하는 이들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는 천우맹의 맹주인 현종도, 천우맹의 악귀인 청명도 아니었다.
현종이야 무학을 익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온화하다 못해 생호구……. 아니, 그…… 아무튼 한없이 따뜻한 사람이다. 청명은 양민이고 무인이고를 가려 가며 괴롭히는 이는 아니지만, 당장 먼저 괴롭혀야 할 이들이 있으니 다른 이들에게까지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런 이들에게 저승사자나 다름없는 이는 바로 화산의 살림꾼 현영이다.
“도사님이라고 다들 그…… 성격이 좋으시지는…….”
“어허, 이 사람! 어디 그런 말을 입 밖에 내는가! 날벼락 맞으려고.”
“죄, 죄송합니다.”
“그런 말은 조용히, 남들 안 보는 데서 하게나.”
“……예.”
조언을 했던 이가 불현듯 고개를 획 돌려 하늘을 확인했다.
“시간이 됐군! 빨리 비켜서게!”
“예!”
두 사람이 다급하게 옆쪽으로 비켰다. 매일 반복되는 일이 시작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어휴, 진짜.’
‘오늘도 그 꼴을 또 보네.’
전각들의 문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열리자 두 사람이 긴장으로 몸을 굳히며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오늘 펼쳐진 광경은 평소와는 확연히 달랐다.
“으라차차아!”
“아침이다!”
“가자! 연무장으로!”
사람들의 모습이 채 보이기도 전에 우렁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윽고 열린 문으로 병장기를 든 맹도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어엇? 뭐, 뭐야?”
언제나 반 시체처럼 흐느적대며 걸어 나오던 이들이 활기차게 뛰쳐나오니 놀란 인부들이 두 눈을 크게 부릅떴다.
‘뭐지?’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나?’
하지만 아무래도 잘못 본 건 아닌 모양이었다. 문밖으로 나온 이들이 힘차게 기지개를 켜며 히죽히죽 웃어 대는 모양을 보니 말이다.
“크으! 몸이 이렇게 가벼울 수가 있구나!”
“다들 왜 그렇게 영약, 영약 하면서 눈이 돌아가는지 이제야 알겠네!”
“온종일도 싸울 수 있겠어!”
“가자!”
“내가 먼저다!”
몰려나온 이들이 일제히 연무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벽에 바짝 붙은 두 사람은 제 앞을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이들을 보며 눈을 끔뻑거렸다.
“안녕하십니까!”
“예?”
“수고 많으십니다!”
“가, 감사합…….”
그간은 눈을 마주칠 일도 없었던 이들이 활기 가득 찬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물론 인사를 하기 무섭게 저 앞으로 스쳐 지나가 버렸지만 말이다.
“오늘 그래서 무슨 수련한다는데?”
“문주님들이랑 붙는 것 아닐까?”
“그래? 드디어 복수하는 날이구만!”
“에이. 그래도 문주님들인데 복수라는 말은 좀 그렇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 왜 빨리 뛰는데?”
커다란 먼지구름을 남긴 채, 맹도들이 연무장을 향해 사라졌다. 길가에 바짝 붙어 있던 두 사람은 얼이 빠진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자네…….”
“예?”
“……이거 처음부터 다시 쓸어야겠는데?”
엉망이 된 길을 바라본 이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푹 숙였다.
* * *
천우맹에 든 이들은 하나같이 많은 변화를 겪었다.
한 문파 안에서만 살아가던 이들이 다른 문파와 함께 공존해야 하다 보니 변화는 선택이 아닌 필연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하지만 천우맹에 속한 수많은 이들 중에서 가장 많이 바뀐 이는 의외로 무인이 아니었다.
“거기!”
추 부인의 입에서 커다란 호통이 쏟아졌다.
“솥을 들 때는 둘이서 들지 마시라고 했잖아요! 그거 생각보다 무거워서 사고가 난다고요! 셋은 붙어야 돼요!”
“예, 부인!”
“닭 아직 멀었어요?”
“아이고! 조금 더 삶아야 합니다. 이게 솥이 워낙 커서…….”
“불이 약하잖아요! 빨리 장작 더 가져오세요. 후원에 새로 들인 장작이 있을 거예요!”
“예! 예! 지금 가겠습니다!”
추 부인이 격하게 좌우를 살피며 놓친 것이 없는지 살필 때였다.
“부, 부인! 밥을 더 달라는데요?”
“방금 한 솥 나갔잖아요?”
“아이고오. 오늘 아주 날을 잡았는지 솥을 내려놓기 무섭게 다 사라졌습니다! 다들 뭔 아귀라도 들러붙었는지…….”
“떡! 밥은 아직 조금 더 있어야 하니까 일단 후식으로 내놓으려고 했던 떡부터 나르세요. 뭐라도 먹을 게 있으면 좀 기다리실 거예요! 저 뒤쪽 광주리에 있어요!”
“예, 예! 지금 바로 내겠습니다!”
“밥 한 솥……. 아니, 두 솥 더 올리세요! 아니야! 그냥 세 솥 올려 버려요! 빨리!”
“예, 부인!”
목이 쉬도록 지시를 내린 추 부인은 얼굴을 덮쳐 오는 열기 때문에 흘러내린 땀을 소매로 훔쳤다.
‘이게 뭔 난리래.’
장원의 식사 시간은 언제나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하지만 오늘은 유난히 더 난리가 난 모양이었다.
“부인! 밥이 없어요!”
“고기! 고기는요? 고기!”
“아, 닭 한 마리 더 있었으면 좋겠는데.”
주방 문을 통해 고개를 쏙 내민 화산파 제자들이 배고픈 아기 새……. 아니, 배고픈 어른 새처럼 울어 대기 시작했다.
추 부인은 그 모습을 보며 진저리를 쳤다. 하지만 그녀가 무어라 입을 떼기도 전에 그들의 뒤쪽에서 튀어나온 손이 닦달하는 이들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내가 주방에 들어가지 말랬지!”
“사, 사숙, 그게 아니라!”
“아이고, 내가 못 살아! 대체 왜들 이러는 거예요!”
“아니, 소소야. 배가 너무 고…….”
백천과 당소소가 화산 제자들을 질질 끌고 갔다.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민 윤종이 추 부인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마음은 착한 애들인데 그냥 조금, 아니. 많이 멍청해서…….”
“아, 아니에요. 빨리 가져다드릴게요.”
“천천히 해 주셔도 됩니다.”
“아, 사형! 천천히 하다간 식사 시간 내로 다 못 먹…….”
“넌 그 입 좀!”
뒤늦게 고개를 내미는 조걸의 정수리를 팔꿈치로 찍어 버린 윤종이 머쓱한 얼굴로 다시 고개를 까닥였다.
“그럼.”
두 사람까지 사라지자 추 부인은 이마에 흐른 땀을 다시 닦아 내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평소엔 밥을 많이 먹기는 했어도 하나같이 얼굴에 생기들이 없었다. 그런 이들이 갑자기 저리 신이 난 얼굴로 밥을 재촉하니, 몸은 힘들어도 어쩐지 덩달아 신이 나는 기분이었다.
“아귀 같은 놈들이 잘도 처먹어 대는구나.”
그때 옆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추 부인이 흠칫 놀라 고개를 획 돌렸다. 온몸에서 꼬장꼬장함이 흐르는 현영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오셨어요?”
“오늘은 특히 많이 먹을 게다. 고생 좀 해 주거라.”
“고생은 제가 하나요. 숙수 분들이 하시죠.”
“말은.”
현영이 못마땅한 표정을 짓더니 옆구리에 끼고 있던 무언가를 추 부인에게 불쑥 내밀었다.
“어머! 학이!”
현영이 내민 아이를 보고 추 부인이 깜짝 놀라며 받아 들었다.
“애는 왜…….”
“애가 자꾸 울어 젖혀서 시끄러워 죽겠구나! 잠깐 좀 달래라!”
“죄송합…….”
미안한 표정으로 아이의 상태를 살피던 추 부인이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장로님. 애 기저귀는 안 갈아 주셔도 된다고 제가…….”
“하도 빽빽 울어 대니 한 거지, 내가 뭐 애가 예뻐서 했겠느냐? 신경 쓰지 말거라.”
“그래도…….”
“잔말……. 이놈! 여기 애가 있는데 어디 칼을 들고 다가와!”
“죄, 죄송합니다, 장로님.”
생각 없이 옆을 지나려던 숙수 하나가 현영의 호통에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물론 숙수의 죄라기보다는 아이를 위험한 주방에 데리고 온 현영의 잘못이겠지만, 감히 그런 사실을 따져 물을 만큼 간이 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현영이 왜 굳이 아이를 이곳에 데리고 오는지 모두 알기에 더욱더 말을 할 수 없었다.
추 부인이 애를 달래 재우자 현영이 심드렁한 얼굴로 추 부인에게서 다시 학이를 받아 안았다.
“힘들지?”
“아니요. 힘들지는…….”
“일은 원래 힘든 게야. 삯을 받고 일하면서 힘이 들지 않으면 그게 도둑놈인 게지.”
현영이 심드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대신 힘들게 일한 삯은 모두 일한 사람의 몫인 거지. 누가 누굴 도와주고 말고 할 것 없는. 알아?”
“예, 장로님.”
“쯧.”
현영이 슬쩍 아이를 당겨 안고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벼락같이 다른 숙수에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거기! 바닥에 흐른 것 제대로 닦아야지!”
“예, 예! 죄송합니다, 장로님.”
“내일부터 식재가 두 배는 들어올 테니, 아침에 사람을 좀 빼서 정리하는 거 도우라고 해.”
“아이고오, 장로님……. 사람이 너무 부족합니다. 그거까지 하면 저희가…….”
“내가 언제 사람 뽑지 말라고 했어? 모자라면 더 뽑아야지. 이야기해서 사람 뽑아. 당장!”
“예, 예! 그리만 해 주시면…….”
걸음을 뗄 때마다 이곳저곳을 지적하며 현영이 멀어져 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추 부인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피어났다.
‘참…….’
힘든 일을 겪긴 했지만, 그 와중에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밥 멀었어요?”
“여기 지금 닭이 없는데요?”
“악! 녹림 새끼들이랑 남궁 새끼들이 고기 두고 싸웁니다! 고기! 여기 고기부터 좀 주세요! 빨리!”
“…….”
추 부인이 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아니.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아.’
저 아귀 같은 인간들…….
하지만 이내 추 부인이 번쩍 고개를 들고 소리쳤다.
“드릴 테니까 주방에서 나가요! 빨리! 거기 막고 있으면 더 오래 걸린다고 했잖아요!”
“아, 아뇨. 저희는 그냥…….”
“빨리요!”
“넵!”
쏙쏙 뒤로 빠지는 머리들을 보며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닭 다 삶았어요?”
“지금 갑니다, 부인!”
“빨리빨리 날라 주세요!”
소매를 걷어붙이는 그녀의 어깨가 힘차게 들썩였다.
난리가 난 식당 안을 지켜보던 청명이 닭다리 하나를 쭉 뜯었다. 애새끼들이 영단 하나씩 퍼먹더니 활기차지다 못해 아주 날뛰고 있었다.
‘생각보다 효과가 좋네?’
역시나 사람을 몰아붙일 대로 몰아붙여야 약발이 제대로 서는 모양이었다.
원래 사람은 없어 봐야 있을 때의 행복을 아는 법이다. 평소에는 딱히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체력의 소중함을 느꼈으니 이제는 알아서 단련할 것이다.
“그럼, 어디 보자. 이제 웬만큼 할 건 다 했는데 말이야.”
체계는 잡아 놨다.
그러니 이제는 과거 화산이 그랬던 것처럼 이들 스스로 자신을 몰아붙이기 시작할 것이다. 물길을 새로 열기 위해서는 땅을 파야 하지만, 한번 열어 둔 길로는 물이 끊임없이 흐르는 것처럼 말이다.
다시 말해 꽤 길고 험하며 지난했던 과정이 이제 끝이 난 것이다.
“그럼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겠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그가 뜯어 낸 닭다리를 입 안으로 우걱우걱 밀어 넣었다. 그리고 기름 묻은 손가락을 딱 소리 나게 튀겼다.
“문주님들 전부 식사 후에 모이시라고 해!”
여기저기서 반발이 쏟아졌다.
“입에 처넣은 거 다 먹고 말하라고!”
“튀잖아, 이 새끼야! 드러워 죽겠네.”
“…….”
애들 기가 너무 산 것 같기도 하다. 에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