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7화. 할 건 다 했는데 말이야. (2)
고요하다.
커다란 연무장에 무인들이 잔뜩 모여 있는 모습도 웬만해서는 보기 힘들지만, 그 많은 이들이 일제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운기를 하는 모습은 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귀한 광경이었다.
‘신기하군.’
당군악은 새삼스러운 마음으로 운기를 행하는 맹도들을 바라보았다.
강호인의 삶을 모르는 이들이 보기에는 그저 신기한 모습일지 모르겠지만, 강호인들의 특성을 이해하고 있는 이들이 본다면 의미가 남다른 광경일 수밖에 없다.
기본적으로 운기행공이란 타인의 눈을 피해 은밀한 곳에서 행해지기 마련이다. 이유? 너무도 간단하다. 무인들은 운기행공을 할 때 가장 취약해지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일격에 바위를 부수고, 걸음 한 번에 강을 뛰어넘는 이라 해도 운기를 하는 동안만큼은 어린아이의 발길질에도 주화입마에 들 수 있다.
그렇기에 무인들은 자신이 운기를 하는 모습을 친형제를 상대로도 잘 보여 주지 않기 마련이다. 산달이 다가온 짐승이 은밀한 굴을 찾듯이, 자신이 취약해진 순간을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것은 본능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는 수많은 이들이 모두가 지켜보는 연무장에서 운기를 행하고 있다.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그럴 리가. 평소의 이들이었다면 아무리 당군악의 명이나 청명의 지시가 있었다고 해도, 영단을 든 채 조용한 곳을 찾아들었을 것이다. 하다못해 최소한 자신의 처소에라도 들어가 운기를 했겠지.
그런 이들이 이 넓은 연무장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운기행공을 하고 있다는 것은, 이들이 더 이상 주변에 있는 이들을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를 일이야.’
당군악이 고개를 내저었다.
신뢰라는 말은 참 괴이한 말이다.
서로 간의 신뢰가 중요하다는 걸 모르는 이들은 없다. 문파를 이끄는 이들은 다들 제자들이 서로 간에 신뢰를 쌓기를 바란다. 그렇기에 수많은 예법으로 제자들 간의 위계를 쌓고, 수많은 규율로 제자들 간의 시시비비를 공정히 가리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쉽사리 쌓이지 않는 것이 신뢰다. 겉으로는 서로를 믿는 것처럼 굴어도 결정적인 순간에 다른 선택을 하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당가에서 내가 같은 일을 했다면 정말 다들 이렇게 운기를 할 수 있었을까?’
그 대답은 이미 알고 있다.
그렇기에 모를 일이었다. 이들이 그간 모여서 한 일이라고는 서로 미친 듯이 싸워 대고, 서로를 골탕 먹이고, 힘을 합쳐서 문주들에게 대항한 것밖에는 없다.
인간적인 교류라는 것은 오고 갈 여유조차 없지 않았는가? 그런데 대체 무얼 믿고 서로에게 등을 맡긴 채, 자신의 가장 취약한 부분마저 스스럼없이 내보이게 되었단 말인가?
당군악이 슬쩍 청명을 돌아보았다.
이럴 때마다 새삼 깨닫게 되었다. 화산검협은 그가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대체 언제가 되어야 저 사람이 보고 있는 걸 함께 볼 수 있게 될까?
“왜 그러세요?”
“조금 심통이 나서 말일세.”
“예?”
“…….”
“성격이 좀 나빠지셨네요. 아니, 옛날에 비하면 좋아지신 건가?”
“끙.”
당군악이 고개를 휘휘 저어 버렸다. 저 심성만 좀 어떻게 하면 더할 나위가 없을 텐데 말이다.
‘어쨌든 좋은 일이지.’
멀고 먼 길을 돌아왔지만, 이 광경이 그에게 말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화산검협이 그토록 공을 들여 만들어 내려던 천우맹의 ‘관계’가 이제 슬슬 확립되어 가고 있다고 말이다.
“그런데 잘도 저 아이들에게 모두 먹일 영단을 만들어 냈군.”
“끙. 그게…….”
청명이 턱을 긁적였다.
“사실 제대로 된 영단은 아니에요. 모든 영단이라는 건 적절한 양이 있는 거죠. 그런데 재료가 부족해서 크기를 줄일 수밖에 없었고, 제대로 된 자소단을 먹었을 때에 비하면 효과가 오분지 일도 안 나올 거예요.”
“오분지 일이나 된다는 건가?”
“음……. 그보다 좀 더 적을 수도 있고.”
“이번 자소단은 예전보다 더 잘 만들어졌다고 했었던가?”
“네. 그러니 오분지 일이라도 기대해 볼 수 있는 거죠.”
청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잘 먹여야 잘 싸우는 건데.”
“……항상 자네는 남들은 꿈도 못 꿀 일을 해 놓고 자신이 부족했다고 타박하는군. 자기 자신에게 너무 가혹해.”
“저한테 가혹한 게 아니라, 우리가 처한 상황이 그냥 가혹한 거죠. 그치만 역부족이었다고 순순히 뒈져 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어요?”
“반박하기 어렵군.”
대부분의 이들은 자신이 한 일의 성과에 주목한다. 하지만 청명은 그저 자신이 달성해야 할 목표에 얼마나 다가갔는가만을 확인할 뿐이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 보면 때때로 오싹해질 때가 있다.
당군악은 새삼 청명을 적으로 만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그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맹의 입장에서는 더없이 좋은 일이지만, 내 입장에서는 마냥 반길 일은 아니로군.”
“음? 왜요?”
“오분지 일이라고 해도 영단은 영단이 아닌가? 특히나 화산 자소단의 오분지 일이면, 웬만한 문파의 비전 영단 정도는 될 터인데…….”
당군악이 그답지 않게 앓는 소리를 내었다.
“내력도 높아지고 체력도 좋아질 텐데, 그런 놈들을 상대해야 한다니.”
아이들이 서로 끈끈해지고 영단을 통해 더 강해지는 것은 바라마지 않던 일이지만, 그런 아이들을 통제하는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면 또 마냥 반길 일만은 아니었다.
영단을 복용하지 않은 아이들을 상대하면서도 지쳐서 길바닥에 쓰러져 잠들 지경이었는데, 영단을 복용한 저들을 무슨 수로 감당하겠는가?
“에이. 별걱정을 다 하신다. 가주님 건 따로 챙겨 놨죠.”
“응?”
품을 뒤적인 청명이 잘 싸인 영단을 꺼냈다.
“제일 약효 좋은 부분으로 준비해 뒀어요. 가주님 거랑, 궁주님 거랑, 소백이 거 하고.”
당군악이 청명의 손에 들린 영단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아이들에게 나눠 준 것과는 크기부터 다른, 제대로 된 자소단이었다.
“이걸…….”
“괜히 애들한테나 더 나눠 주라는 말씀은 마세요.”
“예전이었으면 체면 때문에라도 그런 말을 해 봤겠지만, 내가 지금 그런 체면 차릴 처지는 아니네.”
“이건 챙겨 드릴 테니까 오늘 저녁에 따로 드세요. 아, 장로님들 것도 좀 작지만 준비해 뒀어요.”
확실히 이런 면에서는 빈틈이 없는 청명이었다.
“……잠시만. 나와 두 궁주님들 거라고? 그럼 그…… 녹림왕은…….”
“쉿.”
청명이 주위를 살피며 입에 검지를 가져다 대고 속삭였다.
“잘 챙겨 놨다가 남들 안 보는 데서 드세요. 아셨죠?”
“…….”
“욕심만 많은 사파 새끼가 아득바득 달려들면 귀찮아지니까요.”
당군악은 고개를 돌려 운기를 하고 있는 임소병을 바라보았다.
영단을 받았단 사실이 기쁜지 운기를 하면서도 히죽대는 모습이 퍽 기괴했는데, 그런 임소병을 보고 있자니 가슴속에서부터 안쓰러움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어쩌다 사파에서 태어나서…….’
아니, 정확하게는 어쩌다 사파에서 태어난 이가 청명을 만나선…….
치유가 불가능한 청명의 뿌리 깊은 사파 혐오증을 알고 있는 당군악은 군말 없이 받은 영단을 품 안 깊은 곳에 갈무리했다.
“……알겠네.”
“네, 히히.”
청명이 고개를 돌려 운기를 하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슬슬 끝날 때가 됐을 텐데.”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배어났다.
우우우웅.
내면 깊은 곳으로 침전하고 또 침전하던 남궁도위가 기운을 백회혈로 밀어 올렸다. 기맥으로 파고든 기운들이 단번에 위로 또 위로 솟구쳤다. 마치 승천하는 용처럼 말이다.
쿠우우우웅!
동시에 머리 안에서 커다란 종이 울리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남궁도위의 코와 입에서 검게 죽은 피가 줄줄이 흘러나왔다. 내상을 입은 것이 아니라 긴긴 수련에 상했던 탁한 것들이 죽은 피와 함께 몸 밖으로 배출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콰아아아아아앙!
다시 한번 솟구쳐 오른 기운이 그의 백회에 맞닿으며 화려한 폭발을 일으켰다. 몸 곳곳으로 퍼져 나간 기운이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활력을 만들어 냈다.
“후…….”
남궁도위가 천천히 눈을 떴다. 동시에 그가 본 것은 앞쪽에서 뒷짐을 진 채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청명의 모습이었다.
‘이때여야 했구나.’
몸 안에 넘쳐나는 기운들이 말해 주는 것 같다. 이 영단을 수련을 시작하기 전에 먹었다면 지금만큼의 효과를 보는 것은 불가능했었다는 것을 말이다.
영단의 약효는 내력을 올려 준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있다. 영단을 복용하는 순간만은, 평소라면 절대 운용할 수 없는 커다란 기운을 활용할 기회를 얻게 된다는 점.
그 천재일우 같은 기회를 어떻게 살리는가가 중요하다.
끊임없이 싸우고 또 싸우고, 자신의 한계와 부족한 점을 절감한 이들은 본능적으로 그 기운을 어떻게 써야 할 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벽 하나는 넘었다.’
영단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지 알 수 없다. 적절한 시기에 주어진 영단이 그 시간을 비약적으로 단축시켜 준 것이다. 이건 몸 안에 새로이 쌓인 내력 따위는 별것 아니라고 느낄 만큼의 쾌거였다.
그는 자신감 가득 찬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두 눈에서 더없이 맑은 정광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가 몸을 일으킨 지 얼마 되지 않아, 당패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 역시 남궁도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또 하나. 그리고 또 하나.
가부좌를 틀고 있던 이들이 하나둘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채 반 시진이 지나기 전에 운기에 들었던 이들이 모두 일어나 그 자리에 도열했다.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은 당연히 앞에 선 청명.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는 몰랐지만, 이 순간 그들이 바라봐야 할 이가 누군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청명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을 받으며, 모두가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청명이 입을 열었다.
“일단…….”
“…….”
“우욱!”
“……응?”
갑자기 헛구역질한 청명이 코를 잡고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좀 가서 씻고 와라, 제발…….”
모두가 움찔하며 제 몸뚱이를 살폈다. 모공에서 빠져나온 노폐물이 들러붙고 엉겨서 의복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어…….”
“끄응. 이게 무슨 냄새야.”
“우웩!”
그제야 제 몸에서 흘러나오는 고약한 악취를 맡은 이들이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한 손으로 근엄하게 코를 막은 당군악이 우렁우렁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강으로 가라. 빨리!”
“…….”
“아, 가라고!”
대단한 무언가를 기대하던 이들이 머쓱한 얼굴로 장강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그 후로 며칠간, 장강 유역에 사는 이들이 단체로 복통을 일으켰다. 그로 인해 관리들이 역병의 조짐이 아닌지 조사를 나오는 사소한 문제가 있었지만…….
어쨌거나 장강은 그저 도도히 흐르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