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5화. 그건 가져오셨어요? (4)
“다 쓸었는가?”
“아니요. 이거…… 조금 더 쓸어야…….”
“나오게. 나와! 시간이 됐네!”
“아니, 벌써?”
전각 사이로 난 길을 쓸던 이가 떠오르는 해를 보고는 재빠르게 길가로 물러섰다. 바짝 긴장한 그들의 시야에 또다시 그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벌컥! 벌컥!
밤새 쥐 죽은 듯 고요했던 전각들의 문이 동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일제히 열렸다. 길을 쓸던 이들이 그 모습을 보고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윽고, 그 열린 문으로 사람들이 비척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생기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사람이라기보다는 시신이나 귀신이라고 부르는 쪽이 차라리 조금 더 적절해 보이는 이들이 맥없이 걸어 나왔다.
“아이고…….”
길을 쓸던 이들은 그 모습을 보며 진저리를 쳤다.
근래 들어서야 매일같이 보는 광경이지만,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된다. 시신들이 걸어 다니는 것 같은 이런 광경에 어떻게 적응을 할 수 있겠냐 이 말이다.
꾸물꾸물 움직인 이들은 반 시진쯤 삶은 미역 같은 몰골로 연무장으로 몰려갔다.
‘뭔가 빛이 좀 바랜 느낌까지 들어서 소름 돋는다니까.’
처음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처음에는 연무장으로 향하던 이들이 너무 활기가 넘쳐 문제였다. 서로 삿대질도 해 대고 심한 경우에는 치고받고 뒤엉켜 싸우기까지 했으니까.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다들 그냥 반쯤 넋이 나간 채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연무장으로 움직였다. 저렇게 싫은데도 꾸역꾸역 가는 게 더 신기할 노릇이다.
‘이건 대체 언제까지 계속되는 거지.’
‘오금이 저려 못 살겠네.’
물론 이 모습을 지켜보는 이들도 힘들겠으나, 아무리 그래도 그 몰골이 되어 버린 당사자들과 비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도살장……. 아니, 연무장으로 향하는 이들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은 단 하나뿐이었다.
‘죽을 것 같다…….’
‘딱 한 시진만 더 잤으면 좋겠다…….’
‘진짜 사람이 이러고도 안 죽나? 진짜?’
수도 없이 듣기는 했다. 진짜 전쟁이 터지면 열흘은 물론이고, 잘못하면 한 달 내내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고 싸우게 된다는 소리를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이 뭘 의미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이는 거의 없었다. 직접 겪어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우리는 그래도 잠은 자는데…….’
‘이걸 어떻게 계속해?’
이제는 서로에 대한 감정이고, 그들을 닦달하는 문주들에 대한 분노고 뭐고 아무것도 남아 있질 않았다. 남은 것이라고는 그저 어떻게든 눈을 붙이고 쉬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구뿐이다. 그나마…….
“죽겠습니다, 소가주님.”
“……매화도 때보다 더 심한 것 같은데요?”
“말을 함부로 하는구나. 그곳에서 죽어 가신 분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죄송합니다.”
짧게나마 한 번 비슷한 일을 겪어 본 남궁은 확실히 다른 이들에 비해 쥐꼬리만큼이라도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난다.
차라리 비교할 대상이 없다면 속 시원하게 욕이라도 했을 것이다. 이따위 수련을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저 망할 남궁 놈들이 희미하게나마 쌩쌩한 모습을 보이니, 이 수련의 효능이 뭔지를 눈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그러니 대놓고 욕도 하지 못하면서 고통은 고통대로 받는 억울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게다가…….
“아우, 빌어먹을. 그냥 차라리 깔끔하게 죽이지.”
“……말 함부로 하지 말아라. 청명이가 들었으면 정말 그러려고 했을 거다.”
“그냥 뒈지는 게 낫지, 이게 뭡니까?”
“원하는 대로 해 주고 있잖느냐?”
“예?”
“이걸 계속 당하다 보면 결국 뒈질 테니까.”
주변에 있는 이들이 청명과 오랜 시간을 보낸 화산을 힘없이 돌아보았다. 단 하나의 의문이 떠올랐다.
‘그런데 저 새끼들은 왜 안 지치지?’
‘저놈들은 저게 지친 거라는데?’
‘화산 놈들은 만년설삼을 간식으로 씹나? 화산이 명산이라더니, 알고 보면 거기서 나는 산나물들이 다 영약인 거 아냐?’
‘근데 저 새끼들 고기밖에 안 먹던데?’
‘도사가 그래도 돼?’
물론 당가와 녹림이 받는 타격도 만만치 않았지만, 이 상황에서 가장 어처구니가 없는 이들은 다름 아닌 야수궁과 빙궁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야수궁이나 빙궁이라 해서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겉으로야 자존심 때문에라도 중원의 명문 거파와 한번 붙어 볼 만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무위가 중원의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에 미칠 급은 아니라는 걸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무위’라는 측면에 한해서였다.
그들을 단단히 받쳐 주고 있었던 것은 척박하고 험난한 자연과 싸워 온 그들의 체력과 정신력에 대한 자부심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겪어 보니 알게 되었다. 그 자부심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었는지 말이다.
‘정신력만은…… 정신력만은 뒤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물론 그 말을 청명이 들었다면 ‘정신력은 수련할 때나 써먹는 거고, 실전에서는 처먹은 만큼 뱉는 거지! 평소에 놀고먹던 새끼들이 목에 칼 들어오면 갑자기 없던 힘이 솟아나나? 어?’라고 일갈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 어떤 이들에게는 당연하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힘겨움을, 그리고 누군가는 힘겨움과 상처를, 그리고 또 누군가는 미묘한 울분을 품었지만, 내심이야 어떻든 모든 이들이 생기를 잃은 얼굴로 연무장에 도착했다.
‘먼저 나와 있네.’
‘잠깐이라도 쉬자, 이 망할 놈들아.’
‘저 새끼는 어떻게 날이 갈수록 쌩쌩하냐? 어떻게?’
이미 연무장에 자리를 잡은 청명을 발견한 순간 모두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도통 모를 일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들이 힘든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그들을 맞아 싸우는 이들이 더 힘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실제로 청명의 옆에 서 있는 당군악과 맹소의 얼굴에는 피로한 기색이 완연했다. 사람들 앞이라 자세야 꼿꼿하게 세우고 있지만, 거칠어진 피부와 얼굴에 드리워진 음영만은 숨길 수 없었다.
그런데…….
‘왜 저 새끼는 저렇게 반질반질하냐고.’
청명의 얼굴에서는 광이 나고 있었다. 심지어 처음 그들이 수련을 시작한 때보다 지금이 더 쌩쌩해 보이는 느낌이다.
‘진짜 요괴 아냐?’
‘정기라도 빨아먹나?’
‘꿈에 나올까 무섭네, 진짜…….’
인생이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 법.
그간 청명의 패악질에 처절히 당하는 화산을 보며 낄낄댔던 천우맹도들은 그 웃음의 대가를 처절하게 받는 중이었다.
‘근데 오늘은 또 왜 저렇게 자리를 잡고 있냐.’
‘이번에는 또 뭘 시키려고……. 제발 하던 것만 하자……. 제발…….’
모두가 불안한 눈으로 청명과 그 좌우에 선 문주들을 바라보던 그때였다.
“크흠.”
청명이 그답지 않게 주먹으로 입을 가리며 점잖게 헛기침했다.
화산파 제자들은 이게 청명이 놈이 뭔가 거창한 것을 시작할 때 보이는 전형적인 동작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들의 얼굴에 불안이 먹구름처럼 몰려왔다.
“다들…….”
청명이 모인 이들을 쭉 훑어보고는 입을 열었다.
“영 매가리가 없네.”
그 말을 들은 이들이 일제히 울컥하여 청명을 노려보았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태연하게 저런…….
“쯧쯧쯧쯧.”
하지만 청명은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듯이 대놓고 혀를 찼다.
“뭘 했다고 벌써 기운이 빠져서 헉헉대! 내가 너희 나이 때는, 어?”
“네가 제일 어려, 이 새끼야!”
“아, 맞다.”
발끈한 조걸의 외침에 청명이 아차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하튼!”
청명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모두를 보며 말을 이어 갔다.
“그…… 여튼 뭐, 너희들이 힘들어서 헉헉대는 꼴이 보기 안쓰러워서는 아니고, 그러니까…… 여튼 너희가 그…… 힘을 좀 내면 수련의 능률도 올라가고……. 수련의 능률도 올라가야 써먹기도 좋고. 어? 그래서 그런 건데…….”
‘뭐라는 거야?’
‘어디서 개가 짖나?’
‘또 뭘 시키려고 저 지랄이지?’
뭔가 어색하게 중언부언 말이 이어지자 당군악이 결국 참지 못하고 한숨을 푹 내쉬더니 끼어들었다.
“화산검협.”
“네?”
“……빨리하세. 서 있는 것도 힘드네.”
청명이 말없이 입을 삐쭉거렸다. 그리고 이내 뒤에 내려놓았던 보따리를 죽 잡아끌어 와 풀기 시작했다.
“장로님들, 이거 애들 나눠 주세요.”
“알겠네.”
“한 알씩이에요! 중간에 꿍치다 걸리면 손모가지 날아갑니다!”
장로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다가와 보따리 안에 든 환약을 받아 들었다. 그러더니 제자들에게 다가가 한 알씩 분배해 주었다.
“……뭐야?”
“뭘 주는 거야?”
뒤쪽에 서서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던 이들이 주춤주춤 앞쪽으로 몰려들었다.
뭔가 사건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워낙 사람이 많다 보니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파악하기 쉽지 않았다.
‘뭐지?’
야수궁의 문도 하나가 제 쪽으로 다가오는 야수궁의 장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뭐 대단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대단한 걸 나눠 준다면 야수궁과 빙궁을 끼워 줄 리가 없지 않은가?
단순히 중원과 새외의 차별을 논하기 이전에, 야수궁과 빙궁은 천우맹의 논공행상에 낄 만한 자격이 없는 곳들이다. 그러니 애초에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받아라.”
“뭘…….”
그의 앞까지 다가온 장로는 들고 있던 환 하나를 어정쩡하게 내민 그의 손 위에 두말없이 올려두었다.
“이게 뭔…….”
살짝 자색을 띤 환을 본 야수궁도가 고개를 갸웃하려다 벼락이라도 맞은 듯 움찔했다.
코끝으로 밀려드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청아한 향기가 이게 무엇인지를 말보다 더 확실하게 설명해 주고 있었으니까.
“여, 영…… 영약?”
영롱한 자색을 띤 환을 두 눈으로 다시 한번 확인한 순간,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혹여 떨림 때문에 약이 바닥에 떨어질까 싶어 재빨리 양손으로 받쳐 든 야수궁도는 기겁하여 주변을 돌아보았다.
“어, 엄마야. 이게 뭐야?”
“영단?”
“이, 이걸 갑자기 왜 주는 건데? 아니, 그 전에 영단이 이렇게 많아도 되는 거야? 사기 아니야?”
다른 이들의 반응도 대동소이했다.
애초에 영단이라는 게 어떤 물건인가? 한 문파 내에서도 극소량만이 만들어져, 문파를 이끌어 갈 핵심 인재나, 큰 공을 세웠다고 모두가 인정하는 이들만이 구경할 수 있는 물건이다.
물론 전생에 나라를 구한 이들은 산을 타다가도 인형하수오(人形何首烏)나 백년설삼(百年雪蔘)같은 영약을 발견해 뜯어먹기도 한다지만, 그거야 십 년에 한 번 벌어지면 다행일 정도로 희귀한 일이고.
천하에서 가장 부유한 문파라는 소림에서도 대환단은 물론이고 소환단조차 평생 한 번도 구경해 보지 못하는 이들이 구 할을 넘는다는 게 정설 아니던가?
그런데 그런 영단을 무슨 집에서 키우는 누렁이 간식 주듯이 나눠 준다는 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다행히도 이곳에는 그들의 이런 의문을 풀어 줄 이가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사천당가의 소가주 당패 쪽으로 획 돌아갔다. 그는 멍하니 영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넋을 놓았던 그가 이내 영단을 코 가까이에 대고 킁킁거렸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진짜 영단이네. 그것도 최상급이야.”
사위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