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4화. 그건 가져오셨어요? (3)
“자네 어제 봤는가?”
“뭘?”
“저기, 그…… 천우맹 분들이 거처하는 장원 말이야.”
“아. 그 말이구먼. 뭘 새삼스럽게 그 이야기를 하는가? 거기가 지금 구강의 명물이 된 지가 언젠데.”
말을 들은 이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말대로 화산이 거하는 장원은 이미 구강에서 무척이나 유명해져 있었다.
“말도 말게. 이번에 그…… 장씨가 앓아누웠다는군.”
“또?”
“또는 무슨 또인가? 내가 그 양반더러 진즉에 사람 좀 더 구하라고 했는데 안 듣더니.”
“안 듣다니, 이 사람아. 사람은 구했지. 구한 이들이 사흘을 못 버티고 도망가서 그렇지!”
“그건 그렇지.”
“아이고. 그 양반이 또 드러누웠구먼. 아주 돈을 갈퀴로 쓸어담네, 그려.”
“어허, 돈이 문제인가? 우선 사람이 살아야지.”
“끌끌끌. 나는 죽어도 좋으니 그만큼 벌어 봤으면 좋겠네.”
이들이 말하는 장씨는 다름 아닌 구강에서 가장 큰 식자재점을 운영하는 이다. 장원에 자리한 화산이 그에게 식자재 조달을 의뢰하면서 그에게 화복이 동시에 찾아왔다.
“아니, 대체 뭔 밥을 그렇게 먹어 대는가?”
“몸 쓰는 무사님들 아니신가? 평범한 사람들과 먹는 양이 다를 수밖에 없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양반들이 먹을 양이면 구강 전체가 먹고도 남네. 거기에 사람이 그리 많을 것 같지도 않은데…….”
“모르지. 강호의 무사님들이 어찌 사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딱히 대외적으로 무언가를 할 필요도 없었다. 장원으로 들어가는 어마어마한 양의 고기와 곡식만으로도 화산이 거하는 장원은 구강의 명물이 되기에 충분했으니까.
“그리고 유씨도 앓아누웠다는군.”
“유씨는 왜? 유씨는 식자재랑 관련이 없잖은가?”
“에이, 이 사람 자꾸 멋모르는 소리를 하는군. 유씨가 하는 일이 뭔가? 꼴 베는 일 아닌가?”
“그렇지?”
“그 장원에 운남에서 온 짐승들이 넘쳐난다던데, 그 짐승들이 먹어 치우는 풀의 양이 장난이 아니라고 하네.”
“아아, 그래서 유씨가 저번에 인부들을 대대적으로 모집했구만……. 아니, 잠깐만? 그런데 그때 적어도 스물은 넘게 고용을 했을 텐데. 앓아누웠다고?”
“스물이 뭔 말인가? 서른이 넘은 지가 한참 됐네. 그중 반은 지금 몸져누웠다는군. 낮이고 밤이고 할 것 없이 풀을 베어 대서 지금 구강 주변 산들이 온통 민둥산이 될 판이네.”
“허……. 허허. 거참.”
말을 들은 이가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참 괴이한 일들이었다.
“그렇게 잘들 드시는데, 왜 그 앞을 지날 때마다 보이는 사람들의 몰골이 그 모양인가. 나는 천우맹에 개방이 가입한 줄 알았네.”
“큭큭큭. 그렇지, 그렇지. 듣자 하니 먹은 것보다 더 격하게 수련을 한다고 하시는군.”
말을 하던 이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나는 그 대단한 명문정파 분들은 하늘 위의 고고한 학 같아서 감히 우러러볼 수도 없는 분들인 줄 알았더니, 그분들이 수련하는 걸 보고 나니 이제는 부럽지도 않더군.”
“부럽기는! 나는 공짜로 입문을 시켜 준다고 해도 도망갈 걸세. 그게 어디 사람이 할 짓인가?”
“그렇고말고.”
강호의 대문파들이 아무리 양민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해도 그 거리는 쉽사리 좁혀지지 않는다. 평시에도 칼을 차고 다니는 이들에 대한 거부감을 웬만해서는 떨쳐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어도, 언제든 한 칼에 자신을 베어 낼 수 있다는 공포심이야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지금 천우맹은 그들조차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양민들과의 거리감을 좁히고 있었다.
“이번에 숙수도 대량으로 고용했다면서?”
“말도 말게나. 이번에 새로 들어간 숙수만 서른이네. 그것 외에도 장원을 관리하는 사람에, 짐승들 돌보는 사람들까지 뽑았다네.”
“허허. 거참.”
“다행이지. 얼마나 다행인가. 저 수적 놈들이 날뛰면서 고기 잡으러도 못 나가서 반쯤 빌어먹는 이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그런 양반들이 지금 다들 저 장원으로 가서 일을 하고 삯을 받고 있지 않나? 덕분에 구강도 좀 숨통이 트였지.”
“그런데…… 천우맹이 그렇게 돈이 많은 곳인가? 듣자 하니 식재에 건초에, 사람들 품삯까지 돈이 여간 드는 게 아닌 것 같은데?”
“쯧쯧. 이 사람아.”
“응?”
“천우맹은 당연히 돈이 많지. 그 쟁쟁한 문파들이 모였는데 돈이 없기야 하겠는가?”
“그건 그렇지만…….”
“그리고 자네 생각만큼 돈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닐세.”
“응? 그건 무슨 소린가?”
말을 하던 이가 낄낄대며 웃었다.
“야, 이 사람아. 말이야 바른말이지, 천우맹이 우리에게 해 준 것이 좀 많은가? 다 망해 가던 구강을 구해 주셨지. 저 마교놈들이 북상하는 것도 막아 주시지 않았는가?”
“뭘 뻔한 소리를 하고 있는가? 구강 사람치고 천우맹에 고마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나? 어디 그뿐이야? 수적 놈들과 사패련이 날뛰어 오갈 데 없어진 장강 유역에서 사람들을 구해 주기도 하셨잖은가?”
“그렇지, 그렇지. 그런데 제 삯을 다 받고 일하고, 제 돈을 다 받고 물건을 팔면 그게 어디 사람 새낀가?”
“그래서?”
“일하는 이들은 다들 삯을 반만 받겠다고 하고, 그 장씨랑 유씨는 인부들 삯 외에는 이문을 남기지 않고 팔고 있다는군.”
“허허. 그래? 거참 생각이 있는 이들이군. 그래서? 화산에서 좋아하던가?”
“좋아하겠나? 난리가 났지.”
“……왜 또 난리가 나는가?”
“화산의 장문인이신 현종진인께서 왜 돈을 제대로 안 받느냐고 길길이 날뛰셨다고 하는군. 제 삯을 받고, 제대로 이문을 취하라고 말일세.”
“허어……. 역시 화산의 장문인이시군.”
“그러게 말일세. 그래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장문인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빌었다더군.”
“뭐, 뭐라고 말인가?”
“제 삯을 다 받고, 이문을 취하면 다른 구강 사람들에게 맞아 죽는다고 했겠지. 사실 뭐 틀린 말은 아니잖은가? 나만 해도 가만히 있지 않았을 걸세.”
“허허허허. 그거참 웃기는 일이군. 돈을 안 받겠다고 빌어야 한다니.”
“장문인은 절대로 안 된다고 하셨지만, 결국에는 사람들의 뜻을 꺾지 못한 모양이네. 제값을 치르면 일을 안 하겠다고 하고, 일을 할 사람은 급한데 뭐 어쩌시겠는가? 그 신선 같은 분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지.”
“좋게 생각하자면 우리 구강인들이 신선 분을 이겼군?”
“말하자면 그렇지.”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보며 낄낄 웃었다.
화산을 비롯한 천우맹이 장강 유역에 거하기 시작하면서 죽어 가던 도시에 활기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저만한 대문파가 하나도 아니고 여럿이 거하고 있다 보니 자잘한 범죄나 사고마저도 눈 녹은 듯 사라지는 부차적 효과도 있었고 말이다.
“그런데, 이런 뻔한 이야기를 하려고 말을 꺼냈는가?”
“아이고. 말이 샜군. 그래서, 자네 못 봤는가?”
“아까부터 대체 뭘 못 봤느냐고 하는 건가? 그 장원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는가?”
“아니, 며칠 전부터 밤만 되면 그 장원에서 괴이한 빛이 새어 나오더라고. 진짜 못 봤는가?”
“내가 해만 떨어지면 바로 자는 사람이다 보니…….”
“쯧쯧쯧. 오늘 밤에는 꼭 보게. 내가 며칠 동안 지켜봤는데, 밤이 깊어 가면 갑자기 장원에서 자색의 휘황찬란한 빛이 번쩍인단 말일세. 세상에, 그 빛이 뿜어나올 때는 이 세상 것이 아닌 것 같은 짙은 향이 같이 나는데……. 내 살다 살다 그런 광경은 처음 봤네.”
“진짜인가?”
“내가 비싼 밥 먹고 실없이 농이나 치겠는가? 당장 오늘 밤에 확인해 보면 될 일 아닌가?”
“그렇지. 사실이라면 정말 놀라운 일이로군. 대체 저 장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자색 빛에 향기라니…….”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던 사내가 아, 하고는 손뼉을 짝 쳤다.
“혹시 그…… 화산 분이 등선하는 것 아닌가?”
“에라, 이 사람아! 아무리 거기 계신 분들이 대단하신 분들이라지만, 등선이라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아니지. 아니지. 말이야 바른말로 천하에 누가 있어 등선을 할 수 있겠는가? 등선이야 모름지기 신선이 될 풍모를 갖춘 분만이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거랑 이게 무슨 상관인데?”
“생각을 해 보라고. 그 무당 장문인 놈이 등선을 하겠는가? 그 망할 소림의 방장 놈이 해탈을 하겠는가?”
“…….”
“천하에 신선이라 불릴 분이야 화산의 현종진인 말고 더 있는가? 나는 내일 당장 그분이 등선을 하신다고 해도 조금도 놀라지 않을 걸세…….”
“아, 아니. 그 현종진인께서 훌륭한 도인이신 건 맞지만…… 그건 다른 이야기…….”
“뭐? 자네 지금 현종진인을 무시하는 건가?”
그 말이 흘러나온 순간, 지나던 이들이 모두 그들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누가?”
“어떤 새끼가 감히 현종진인을 무시했어?”
“어느 정신 나간 놈이 감히 구강에서!”
살벌한 눈빛이 쏟아지기 무섭게 몇몇 장정들이 팔을 걷어붙이며 다가왔다. 그 모습을 본 사내가 기겁을 하여 소리쳤다.
“아니! 아닙니다! 오해입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화산의 현종진인이야 말로 천하에서 가장 훌륭하신 분이지요! 암요! 암!”
얻어맞지 않기 위한 이의 처절한 비명이 거리에 울려 퍼지던 그 때, 그들이 칭송하는 현종은 말 그대로 등선 직전에 몰려 있었다.
“끄으으응.”
털썩.
현종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주, 죽겠…….”
“장문인! 괜찮으십니까?”
“끄으…….”
혈색이 검게 죽은 현종의 입에서 연신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옆에는 이미 현상과 현영이 넋이 나간 채 뻗어 있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여, 여기 물 있습니다, 장문인!”
“끄으응…….”
현종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연신 새어 나왔다.
‘쓸데없이 내력은 높여 놔 가지고.’
저 망할 놈이 시시때때로 몸보신하라고 영약을 퍼먹이길래, 그래도 이놈이 존장을 챙기는 마음은 있구나 했다. 그런데 그걸 여기다 알뜰히도 써먹네, 알뜰히도!
“그 장문인……. 벌써 오 일째인데.”
“……거의 다 됐을 거다.”
현종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새하얀 김이 연신 새어 나오는 문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번쩍!
굳게 닫힌 문 사이로 눈부신 자색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됐다아아아아아!”
동시에 안에서 들려온 커다란 목소리가 채 잦아들기도 전에 누군가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왔다.
쾅!
“크으!”
현종은 문을 박차고 나온 청명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제 몸뚱이보다 더 커 보이는 커다란 보따리를 등에 두른 그는 입에서 자색 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연단도 몇 번 해 보니 실력이 느네! 자소단이면 다 똑같은 건 줄 알았는데.”
“끄응. 청명아. 다 됐느냐?”
그 말에 청명이 짊어진 보따리를 툭 쳤다.
“완벽해요! 이번 자소단은 효능이 전보다 훨씬 좋을 거예요. 히힛!”
“……그럼 다행이구나.”
늙은 놈들을 오 일 밤낮으로 갈아 넣었는데, 효능이 좋아야지…… 망할 놈아.
“흐흐흐흐. 어디 이걸 처먹고도 구시렁댈 수 있는지 보자. 다 죽었어, 이 새끼들!”
청명이 낄낄대며 잽싸게 몸을 날렸다.
“처, 청명…….”
순식간에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현종이 반쯤 뻗은 손을 힘없이 내렸다. 그리고 슬 고개를 돌려 장로들을 바라보았다.
“……다들 고생 많았다.”
“……썩을.”
“…….”
아련한 욕설이 은은한 자소단의 향기와 함께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