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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143화 (1,144/1,567)

1143화. 그건 가져오셨어요? (2)

방 안으로 들어선 황종의가 본 것은 익숙하다면 익숙한 광경이었다.

중앙에 앉은 현종과 그 좌우로 자리한 화산의 장로들. 확실히 그건 화산에서도 자주 보던 광경이니까.

문제는…….

‘저분은 누구…….’

한쪽 벽에 기댄 채 물 먹은 솜처럼 늘어져 있는 거대한 체구의 사내를 본 황종의가 눈을 끔뻑였다.

‘어디서 본 듯한데……. 아!’

그 커다란 솜의 정체가 과거 천우맹의 개파식 때 보았던 야수궁주라는 것을 알아챈 황종의는 순간 흠칫하며 몸을 떨었다.

대체 무슨 일을 겪었으면 저 철탑 같아 보이는 사내의 몸에서 기운이 모조리 빠져 버렸단 말인가. 평범한 이가 늘어진 모습과 저런 이가 늘어진 모습은 보는 느낌 자체가 달랐다.

게다가 분명 황종의가 기억하기로, 야수궁주는 겉보기와 다르게 예의가 무척 바른 사람이었는데…….

‘얼마나 힘들면…….’

청명 도장과 화산에 얽히면 야수궁주고 당가주고 할 것 없이 모조리 지옥으로 처박힌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되었다.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겠지.’

뭐? 화산이 그리워?

생각해 보면 화산이 섬서를 비웠던 요 몇 개월만큼 평안했던 적이 또 있었던가? 사람이 술에 중독이 되면 취한 게 당연한 건 줄 알게 된다더니, 뭔 생각으로 이들을 그리워했었단 말인가?

“오, 단주님!”

방 안으로 들어온 황종의를 본 마두의 우두머리……. 아니, 화산의 장문인 현종이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체 없이 다가와 황종의의 두 손을 덥석 잡은 현종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단주님. 이게 대체 얼마 만입니까? 이 먼 곳에서 단주님을 만나니 기쁘기가 한량없습니다.”

“예. 그…… 예. 장문인, 저도 뵙게 되어…….”

화산의 장문인쯤 되는 이가 이리 반가움을 표해 주면 없던 고마움도 절로 피어날 만하건만, 괴이하게도 자꾸 마음이 떨떠름해졌다.

‘아니지. 장문인을 탓할 일이 아니지.’

현종의 손을 잡고 있으면서도 황종의는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이 모든 사태의 원인임에 분명한 이를 찾아서 말이다.

만악의 근원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이 모든 일이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듯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생각보다 늦으셨네요?”

그 먼 섬서에서 이곳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이에게 할 말은 절대로 아니었지만, 황종의는 그런 사실을 딱히 기분 나쁘게 여기지 않았다. 겨우 저런 발언으로 일희일비하기에는 너무 많은 걸 겪어 버렸다.

“잘 지내셨는가?”

“여기에 뭐 별일이 있겠어요? 당연히 잘 지냈죠.”

“끄응.”

“어휴.”

청명이 대답하기 무섭게 사방에서 탄식과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 모든 반응의 이유를 능히 짐작한 황종의는 그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래도…….”

청명의 태연자약한 모습을 보며 농이라도 쳐 보려 했던 황종의가 문득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으응?”

“왜 그러세요?”

잠깐 고민하던 황종의가 슬그머니 청명을 향해 다가갔다.

“자네, 한번 일어나 보겠나?”

“네?”

청명이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일단 시키는 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종의가 바짝 다가서자 청명이 뭐 씹은 얼굴로 슬그머니 물러났다.

“저는 이런 취향은 없…….”

“자네 키가 조금 큰 것 같은데?”

“예? 정말요?”

그 말에 청명의 눈이 확 커졌다.

청명을 위아래로 훑어본 황종의가 다시 봐도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네.”

“오?”

청명이 황종의 옆으로 바짝 다가서서 제 머리와 황종의의 머리 높이를 손으로 그어 가며 비교해 보았다. 주변에서도 동의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네. 좀 큰 것도 같고.”

“……아직 자랄 때인가.”

“크으! 하늘이 나를 버린 게 아니었구나! 이제는 안 클 줄 알았는데!”

이놈의 몸뚱이는 과거의 몸에 비해서 짤따란 편이라 불편한 게 많았는데, 다행히 아직 더 클 가능성이 있는 모양이었다.

“어쩐지 최근에 칼 쓰는데 뭐가 시원시원하더라. 기다려라, 천마 새끼!”

“……좋아하는 부분이 조금 이상한 것 같은데?”

“키가 커지면 팔도 길어지고, 팔이 길어지면 검 쓰는 데 좋은 점이 많거든요. 물론 과하면 안 되지만, 지금은 좀 짜리몽땅이라서요. 조금 더 큰 게 좋죠.”

황종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여간 이 사람은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바뀐 게 없다. 사람이 이토록 초지일관할 수 있다는 것도 대단한 일이다.

“아, 맞다. 그건 가져오셨어요?”

“누구의 말이라고 받들어 모시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연히 가져왔네.”

“크으. 역시 믿을 사람은 단주님밖에 없다니까요.”

“……그 말에 진심이 한 푼이라도 들어가 있으면 좋겠네.”

“헤헤. 전 언제나 완벽히 진심만을 말하죠. 그래서 어디에 있어요?”

“자네는 나보다 물건이 더 반가운 모양이군.”

“에이. 그럴 리가요. 그냥 확실히 하자는 거죠, 확실히.”

그 말에 황종의가 피식 웃고 말았다.

“안에는 가져 들어오기 어려운 물건이라 저 문 앞에 뒀네.”

“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청명이 눈을 빛내며 문 쪽으로 쪼르르 달려가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대체 뭘 가져오라 시켰길래 이놈이 이리 반응하는지 궁금해하던 이들도 기웃거리며 문 앞에 놓인 물건을 확인했다.

“솥?”

“저건 뭔가?”

문 앞에 놓인 건 거무튀튀한 솥이었다. 이를 본 이들이 의아해했다. 방 안에 있는 이들 중에선 화산파 사람들만이 그 물건의 정체를 알았다.

“한철 솥이군.”

“한철 솥? 한철이라고 하셨습니까?”

“만년한철로 만든 솥입니다. 그러고 보니 저걸 은하상단에 보관해 뒀었군.”

그 말에 화산파가 아닌 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귀한 만년한철로 솥을 만들었단 말인가? 돈이 썩어 나자빠지는 것도 아니고.

“아니, 미친!”

특히 당군악은 격하게 뛰쳐나가 놓여 있는 솥을 살폈다. 그러더니 이내 넋을 잃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진짜 만년한철이네……. 아니, 저번에는 화산 놈들 검을 모조리 한철로 만들더니……. 화산에 무슨 한철 광맥이라도 있나? 이제는 하다 하다 솥을 만드네…….”

넋을 놓아 버린 당군악을 보던 현종이 청명을 향해 속삭였다.

“당가주께서는 저걸 모르셨더냐?”

“그러고 보면 말해 준 적이 없는 것 같긴 하네요. 뭐 굳이 말할 이유도 없었고.”

“그렇긴 하지.”

“그런데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청명의 물음에 황종의가 쓴웃음을 지었다.

“저게 어디 보통 물건인가? 화산이 들고 다닌다면 별문제가 없지만, 우리가 옮기다가 강도라도 만난다면 문제가 커지지 않겠는가? 호위할 무사들을 수배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네.”

“아……. 내가 그 생각을 못 했네. 그럴 줄 알았으면 놀고 있는 산적 놈들 보내서 가져오라고 할걸.”

“…….”

황종의는 생각을 하는 걸 포기했다. 천우맹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애초에 그의 사고 범주에서 벗어나 버린 지 오래니까.

“여하튼 고생이 많으셨어요.”

“끄응.”

그때 비척대며 자리에서 일어난 맹소가 문밖에 놓인 솥을 보더니 헛웃음을 흘렸다.

“저건 왜 가져오라고 한 것인가?”

“쓸데가 있거든요.”

“쓸데라니?”

“애들이 요즘 영 비실비실한 것 같아서.”

“그게 누구 때문인데!”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병 주고 약 주고 한다잖아요. 병을 줬으니 이제 약을 줘야죠.”

“……그건 그럴 때 쓰는 말이 아닐세.”

“에이. 중원 말은 궁주님보다 제가 더 잘 알겠죠. 이럴 때 쓰는 말 맞을걸요?”

야수궁주의 거대한 머리가 아래로 축 처졌다. 그 모습을 보며 모두가 안쓰러움을 느꼈지만, 차마 누구도 그를 옹호하고 나서지 않았다. 청명과 말을 섞어 봐야 입만 아프다는 건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진리니까.

“그런데 약이라니?”

“재료는 있는데 깜빡하고 솥을 안 가져왔더라고요. 이제 솥도 왔으니 애들 보약 좀 먹여야죠.”

그 말에 현종이 감탄한 듯 청명을 바라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에 맹도들이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슬슬 다시 말려 봐야 하는 게 아닌가 고민하던 참이었다.

“그렇구나. 좋은 생각이다.”

현종이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맹소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황급히 물었다.

“자, 잠깐! 누구한테 뭘 준다고?”

“애들한테 약이요.”

“누구한테?”

“애들한테 준다니까요? 궁주님도 기가 많이 쇠하셨네요. 말을 못 알아들으시네.”

맹소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청명을 빤히 보았다.

“……애들이라면 화산의 제자들을 말하는 건가?”

“아니, 다 줄 거예요. 여기 있는 애들 전부 다.”

그 말에 맹소의 눈빛이 흔들렸다.

“야수궁도 말인가?”

“당연하죠. 제일 중요한 재료를 야수궁이랑 빙궁이 가져왔는데, 둘을 빼놓으면 안 되죠.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맹소의 입이 굳게 닫혔다. 한참을 고민하는 듯 입을 닫고 있던 그는 이내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치에 맞지 않네.”

“네?”

“재료와 완성된 영약의 가치는 비교조차 할 수 없네. 아무리 우리가 재료를 가져왔다지만, 그 대가로 영약을 받는 것이 정당한 거래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걸세.”

“…….”

“그런데 그걸 아무 대가 없이 베풀겠다는 건가?”

이건 너무 과한 일이다. 천우맹이 맹도들과 소속된 문파를 차별 없이 대하겠다고 공표한 건 사실이지만, 정말 그게 가능하리라 생각한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심지어 천우맹의 핵심 중 하나인 맹소조차도 그런 걸 진정으로 바라진 않았다. 그런데 지금 청명은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진짜 할 작정으로 보이지 않는가?

당황한 맹소의 목소리에, 청명은 피식 웃었다.

“대가가 없다뇨. 무슨 그런 말씀을.”

“……으응?”

청명의 얼굴에 사악한 미소가 피어났다.

“소를 부려도 여물을 잘 먹여야 일을 잘하는 거고, 말을 타도 당근을 잘 먹여야 시키는 대로 가잖아요?”

“…….”

“한낱 짐승도 그럴진대, 사람은 더 잘 먹여야 소나 말처럼 일하지 않겠어요?”

“…….”

“안 그래도 요즘 이 새끼들, 힘드니 어쩌니 말이 많던데 어디 그 입에 영약을 쑤셔 박아 줘도 불만이 나오나 보자. 사람이 최소한의 양심이 있으면 군말 없이 구르겠지. 낄낄낄낄!”

맹소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표정을 본 청명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세요. 문주님들이랑 장로님들도 한 알씩 드릴 거니까요.”

“우, 우리도?”

“요즘 애들 상대하느라 영 힘드신 것 같은데, 영약 먹고 날뛰는 애들을 무슨 수로 상대하시겠어요. 안 그래도 나이가 있어서 기력이 달리실 텐데.”

“…….”

“어르신들도 잘 드셔야 소나 말……. 아니, 팔팔한 젊은 애들을 상대하시기 수월하지 않겠어요? 다 생각해서 드리는 거예요. 다 생각해서.”

……참 좋은 말이다. 그 귀한 영약을 공짜로 준다는 말이 어찌 나쁜 말일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 말을 어떤 상황에서 누가 하느냐에 따라 나쁜 말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곳에 있는 모두가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었다.

“잘 먹고 잘 커야지. 이거 한 알 먹여 두면 앞으로 못해도 몇 달간은 힘들다는 소리 입 밖에도 못 내겠지!”

청명의 눈알이 점점 번뜩이자 맹소가 슬그머니 엉덩이를 뺐다.

“나, 나는 안 먹어도 될 것 같…….”

“드세요.”

“아니, 정말 괜찮…….”

“드세요.”

“……예.”

문밖에 놓인 솥을 바라보는 청명의 입가에 흐뭇하고 뿌듯한 미소가 번졌다.

“자소단까지 처먹이고 나면 지금보다 좀 더 굴려도 되겠지? 안 그래도 답답했는데, 딱 좋은 시기에 왔구나. 낄낄낄낄.”

그 말을 들은 모두의 안색이 시커멓게 죽어 갔다. 시커먼 암운이 천우맹이 머무는 전각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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