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2화. 그건 가져오셨어요? (1)
“이곳인가?”
황종의가 눈앞에 보이는 커다란 장원을 바라봤다.
“예. 단주님. 제가 알기로는 이곳에 화산 분들이 계십니다.”
총관의 말에 황종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겨우 도착했구나. 멀었어.”
“굳이 단주님께서 직접 오시지 않았어도…….”
“모르는 소리 하지 말게.”
황종의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젓는다.
“화산은 은하상단의 친구기도 하지만 가장 큰 고객이기도 하네. 거래를 트고 있다고 해서, 친분이 있다고 해서 고객에게 소흘하다 보면 가까웠던 사이조차 멀어지는 법이지.”
“아…….”
“그리고. 여기에 어디 화산만 있던가? 은하상단의 가장 큰 거래처인 북해빙궁과 남만야수궁도 함께 있지 않은가? 상단의 가장 큰 고객이 한곳에 모여 있는데 내가 어찌 와 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장강이 아니라 서역이라 해도 직접 와야지!”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총관이 감탄한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황문약이 죽은 이후 한동안은 그 빈자리에 허덕이던 황종의였지만, 최근에는 생전의 황문약이 무색할 정도로 상단을 완벽하게 이끌고 있었다.
상단의 모두가 이대로라면 은하상단이 황종의 대에 천하제일상단으로 도약하는 것도 꿈이 아니라는 말을 공공연히 할 만큼 말이다.
“아버님께서 늘 말씀하셨지. 상인에게 중요한 것은 신뢰, 그리고 사람이라고. 나는 그저 선친의 말씀을 따를 뿐이라네.”
단단한 얼굴로 장원을 바라본 황종의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화산 사람들을 보고 싶은 마음도 컸지. 지치고 힘들 때마다 그들을 보고 있으면 힘이 나거든. 사실 그들만큼 활기찬 사람들도 잘 없지 않은가?”
“하하하핫. 너무 활기차서 문제지요. 화산 사람들이 산을 비우니 화음은 물론이고 섬서도 조용해진 느낌입니다.”
“그러게나 말일세.”
황종의가 쓴웃음을 지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더니.
‘그만큼이나 섬서에서 화산이 중요한 곳이 되었다는 의미겠지. 불과 몇 년 만에 말이야.’
말하자면 입만 아프다.
화산이 다시 살아나기 이전 섬서의 대표 문파는 종남이었고, 그런 종남이 난데없이 봉문에 들어간다고 했을 때는 많은 이들이 우려를 보였었다.
하지만 화산은 그런 종남의 빈자리를 완벽하다 못해 차고 넘치게 채워 주었다. 그리고 이제는 단순히 섬서에 머무르지 않고 중원 전체, 더 넘어 새외까지 그 영향력을 떨치고 있었다.
그러니 화산이 잠시 자리를 비운 것만으로도 섬서 전체가 활력을 잃어 가는 것이다.
“저도 화산 분들을 뵌다니까 왠지 신이 납니다.”
“어디 자네만 그렇겠는가?”
황종의가 피식 웃고는 장원의 문을 가리켰다.
“들어가세나.”
“예. 단주님.”
황종의가 장원을 향해 나아간다.
“문을 지키는 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만?”
“딱히 필요하겠는가? 화산과 당가, 그리고 새외오궁 중 두 문파가 머무르는 곳인데,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는 이라면 감히 경거망동할 수 없겠지.”
“하기야 그것도 그렇습니다.”
“들어가세나. 문을 열고 들어왔다고 예를 논할 만큼 꽉 막힌 이들이 아니니.”
“예.”
황종의의 말에 총관이 앞으로 나가 문을 열어젖힌다. 문 안으로 들어간 황종의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묘하게 화산에 온 것 같은 기분이군.’
도가 특유의 고요함과 청명 특유의 활기가 뒤섞인 화산의 분위기가 이곳에서도 느껴진다. 화산이 있는 곳은 다 그렇겠지.
“저 사람은?”
황종의가 앞에 가는 이의 뒷모습을 보고는 반색했다. 오자마자 반가운 이를 만나게 되니 기분이 확 좋아진다.
“조걸 도장! 조걸 도장이 아니시오!”
화산의 제자들은 다들 같은 무복을 입고 있으니 뒷모습만으로는 누가 누구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운 법이지만, 조걸은 특유의 곱슬머리 때문에 뒷모습으로도 알아보기 쉬운 편이었다.
반색한 황종의가 조걸 쪽으로 다가가 미소를 짓는다.
“오랜만이외다. 조걸 도…… 엄마야!”
조걸이 고개를 돌려 황종의를 바라보자 황종의가 기겁을 하여 뒤로 물러났다.
“조, 조걸 도장?”
“아…….”
조걸이 황종의를 알아보고는 고개를 푹 숙인다.
“소단주님……. 아니, 단주님 오셨네요.”
“무, 무슨 병이라도 걸린 거요?”
“……예?”
“얼굴이 왜 그렇소? 얼굴이?”
조걸이 힘없는 동작으로 제 얼굴을 쓸어 낸다.
“……좀 상했지요.”
좀 상해?
황종의가 할 말을 잃고 조걸을 바라보았다.
‘무덤을 파 시신을 꺼내도 이 꼴은 아니겠다.’
이걸 새하얗게 질렸다고 해야 하는지, 아니면 시커멓게 죽었다고 해야 하는지.
핏기가 없어 창백한 피부는 차라리 나무껍질이 더 부드럽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푸석푸석해져 있었고, 눈 밑의 검은 음영은 마치 먹으로 그린 것처럼 진했다.
일부러 분장을 해도 이렇게까지는 못할 것 같은 느낌이다.
“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무슨 일이라니, 그게…….”
그때였다.
“단주님 아니십니까?”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황종의가 고개를 홱 하고 돌렸다.
“……누, 누구?”
“예? 단주님, 저 윤종입니다.”
“유, 윤종 도장?”
황종의가 두 눈을 연신 끔뻑거렸다.
윤종의 꼴 역시 조걸과 그리 다를 게 없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조걸보다 더 심해 보였다.
“사패련이라도 쳐들어 왔습니까?”
그 말을 들은 윤종이 어울리지 않게 피식 웃는다.
“사패련……. 상대가 사패련이면 힘들 것도 없지요. 그냥…… 그냥 패 죽여 버리면 되는 일이니까.”
“…….”
“문제는 화산에 사패련보다 더한 사람이 있다는 거지요.”
“처, 청명 도장이겠지요?”
사람을 이 모양 이 꼴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청명밖에 더 있겠는가?
하지만 황종의의 말을 들은 윤종과 조걸이 동시에 고개를 내젓는다.
“청명이가 낫지.”
“걔는 그래도 사람이었지.”
“……예?”
두 사람이 대답 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도무지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 못 한 황종의가 막 되물으려는 찰나.
“이놈들이! 수련장으로 오라고 했을 텐데, 왜 거기서 시간을 끌고 있느냐!”
노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오자 윤종과 조걸이 움찔하고 목을 움츠린다. 동시에 둘의 얼굴이 참혹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황종의 역시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소리친 이를 바라봤다.
“배, 백천 도장?”
“아니. 단주님 아니십니까?”
황종의를 본 백천이 정중하게 포권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예. 예……. 백천 도장.”
“지금 도착하신 겁니까?”
“예. 그리되었습니다.”
“먼 길이었을 텐데, 정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장문인께서도 반가워하실 겁니다.”
괴이하게도 다른 이들은 다 죽어 가고 있었지만, 백천은 그가 알던 백천의 모습에서 그리 달라진 것이 없었다.
아니 되레…….
‘묘하게 반질반질한 것도 같고.’
백천만 수련을 하지 않은 건가? 아니, 저 사람 성격에 그랬을 리가 없을 텐데?
“가시지요. 장문인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 예.”
“잠시.”
황종의를 향해 한없이 온화한 표정을 지어 보인 백천이 슬쩍 윤종과 조걸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동시에 그의 표정이 황종의를 바라볼 때와는 완벽하게 달리 바뀌었다.
“수련 시간이 다 되었는데! 여기서 뭘 하고 있느냐!”
“……지금 가고 있었어요.”
“그……. 단주님을 뵈어서 잠시.”
윤종과 조걸이 고양이 앞의 쥐처럼 움츠러들었다. 영 마음에 안 든다는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본 백천이 눈을 확 찌푸렸다.
“빨리 가라. 나는 단주님을 모셔다드리고 오겠다.”
“예.”
“예!”
두 사람이 백천과 황종의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는 종종걸음으로 연무장으로 향한다.
“아니, 진짜 왜 저러는 거예요. 얼마 전까지는 같이 욕했으면서!”
“난들 알겠느냐…….”
“차라리 청명이가 났지. 어휴! 배분도 높은 양반이 눈 까뒤집으니까 어떻게 하지도 못하겠고.”
“쉿. 들리겠다.”
“애들 다 죽습니다. 왜 우리만 추가 수련을 합니까.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잔말 말고 가자. 얼른.”
“끄응.”
두 사람이 연무장으로 뛰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황종의의 뒷덜미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뭔가 떨떠름한 기분으로 고개를 돌려보자, 백천은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가시지요.”
“……예.”
이 양반 생각보다 무서운 사람이었구만.
백천이 안내하는 대로 장원을 걷던 황종의가 슬쩍 입을 열었다.
“다른 문파 분들도 다들 이곳에 계십니까?”
“예. 지금 막 오후 수련이 끝나서 다들 쉬고 있거나, 식사를 하러 갔을 겁니다.”
“아.”
황종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화산은 남다른 면이 있습니다. 모두 함께 있는 곳에서 다른 문파들보다 수련을 더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아, 그런 건 아닙니다.”
“예? 조금 전에는 다른 문파들은 쉬는데 화산만 수련을 한다고…….”
“아. 그게.”
백천이 머리를 긁었다.
“저기 있네요. 보시면 아실 겁니다.”
“예?”
백천의 말에 황종의가 고개를 들어 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
“…….”
커다란 장원 사이로 나 있는 공간에 흙투성이가 된 이들이 말 그대로 널브러져 있었다.
‘거지 굴인가?’
아니, 이건 거지 굴이라기보다는 뭐랄까…… 패잔병 무리?
어디서 흠씬 두들겨 맞고 겨우 목숨만 살아 돌아온 패잔병들이 엎어져 있는 모습 같았다.
가장 앞에 흙바닥에 머리를 처박은 채 게거품을 물고 있는 이들을 보며 황종의가 진절머리를 친다.
“노, 녹림 분들인 모양이군요.”
“아닙니다.”
“예? 녹색 옷…….”
황종의가 입을 닫았다.
녹의를 입고 있어서 당연히 녹림이라 생각했다. 녹림이 아니고서야 저리 체통이고 뭐고 다 집어 던지고 엎어져 있을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는 보고 말았다.
널브러져 있는 이들의 가슴팍에 새겨져 있는 당(當)이라는 글귀를.
“당가 분들입니다.”
“…….”
당가? 이 사람들이?
눈을 끔뻑인 황종의가 체통이고 나발이고 모조리 내동댕이친 채 흙바닥에 엎어져 있는 이들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거지꼴인데?’
그것도 그냥 거지가 아니라 보름은 굶은 상거지 꼴이다.
대체 언제부터 당가가 개방으로 소속을 바꿨단 말인가?
“무, 물 좀…….”
“괘, 괜찮으십니까?”
“주, 죽…… 죽…….”
“죽? 죽을 달라고요?”
“죽어요…….”
“…….”
황종의가 망연한 얼굴을 하자 백천이 힐끔 황종의를 돌아보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매일 있는 일이니.”
아니, 이 미친 인간아!
이런 일이 매일 있으면 안 되지! 그게 어디 사람 사는 곳인가?
“저, 저 백의……. 아니 누런 옷을 입은 분들은?”
“남궁입니다. 음, 오늘 남궁은 상태가 괜찮군요.”
“…….”
아, 저 사람들이?
그 창천남궁세가? 천하에서 가장 반듯한 명문세가인 창천남궁세가?
그 뒤로도 거의 역병이 돈 마을 같은 몰골을 보며 진저리를 치던 황종의는 마른오징어처럼 담벼락에 걸려 있는 임소병을 보고는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포기해 버렸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자.’
청명이 있는 곳에서는 항상 벌어지는 일들이 아닌가?
그가 있는 곳을 상식적으로 재단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니까 침착하고…….
“이곳입니다. 음?”
장문인의 처소에 도착한 백천이 눈을 찌푸렸다.
“저기, 일어나십시오.”
그가 황종의를 두고 장문인의 처소 앞 벽에 널브러져 있는 이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린다.
‘저 사람은……. 응?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당가주님. 여기서 주무시면 안 됩니다. 일어나십…….”
“거기 당가주가 왜 있어!”
황종의의 입에서 결국은 큰소리가 터져 나오고 말았다.
왜 당가의 가주가 남의 처소 앞에서 동네 거지처럼 널브러져 있냐고! 왜!
“으, 으음. 백천 도장인가?”
“예. 가주님.”
“……맹주님을 뵈러 가다가 잠시 쉰다는 게 모양이군.”
“그러지 마시고 처소에 가서 조금 쉬시는 게.”
“아니네. 음? 은하상단의 단주시로군.”
“그,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가주님?”
“강녕해 보이는가?”
“…….”
그 묘하게 날이 서 있는 목소리를 들은 황종의가 고개를 푸욱 숙였다.
“들어가세나.”
“……예.”
당군악이 앞장서서 처소 안으로 들어간다.
그 모습을 본 황종의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오지 말 걸…….’
정말로 화산이 있는 곳에 왔다는 실감이 뼈에 사무치도록 밀려오는 황종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