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1화. 그래도 뭘 어쩌겠어. (6)
우거진 수풀 쪽으로 조용히 다가간 백천이 자세를 조금 낮추었다. 병장기 맞부딪히는 소리가 좀 더 가까이서 선명하게 들려왔기 때문이다.
‘둘인가?’
여럿이서 싸우는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기척을 최대한 줄인 그는 조심스레 앞으로 나아갔다. 소리가 들리는 곳 지척까지 다가가서 울창하게 우거진 수풀을 조심스레 옆으로 젖혔다.
‘어?’
그 순간 눈앞에 보인 의외의 광경에, 백천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소리가 나오려는 순간.
“쉿.”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겁한 백천이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다가온 손이 빠르게 그의 입을 덮었다.
“쉬잇.”
“…….”
본디 백천쯤 되는 이가 다른 이에게 순순히 얼굴을 허용할 리는 없겠지만, 이 사람은 예외였다. 입을 틀어막은 이가 다름 아닌 유이설이었기 때문이다.
“조용히.”
백천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유이설이 입에서 손을 떼 주었다. 그녀의 등장에도 의문은 많았지만, 지금 당장은 이쪽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일단 시선을 돌려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채애애애앵!
검과 검이 맞부딪힌다.
새하얀 무복을 입은 젊은 청년이 뒤로 튕겨 사정없이 나뒹굴었다.
“끄윽!”
청년의 입에서 참지 못한 신음이 흘러나왔지만, 엄살을 부릴 틈 따윈 없었다. 청년은 반사적으로 몸을 옆으로 틀었다.
쿠우우웅!
직전까지 청년의 얼굴이 있었던 곳에 발이 떨어지며, 땅에 선명한 족적이 남았다. 만약 몸을 틀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너무도 뻔한 상황.
하지만 채 안심하기도 전에 땅을 내밟은 이가 몸을 튼 청년의 등을 그대로 걷어찼다.
쾅!
청년은 아이에게 걷어차인 개구리처럼 날아가 커다란 나무줄기에 처박혔다.
쿠우웅!
처박혔던 몸이 아래로 스르르 미끄러지며 떨어졌다. 그 모습을 무심하게 바라보던 이, 청명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일어나.”
“…….”
“왜? 이제 할 만큼 했어?”
그 말을 들은 청년, 설소백의 손끝이 움찔했다.
“쿨럭!”
마른기침을 하니 피가 섞여 나왔다. 설소백은 비틀대며 몸을 일으켰다. 몸에 힘이 모조리 빠져나갔는지 몇 번이고 휘청댔지만, 검을 지팡이 삼아 어찌어찌 지탱하고 섰다.
“반응이 늦어.”
청명이 무심한 눈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힘이 달리는 건 어쩔 수 없지. 내력이 부족하니까. 속도가 늦은 것도 어쩔 수 없어. 근력이 부족하니까. 하지만 반응 자체가 늦는 건 전적으로 네 문제야.”
검을 잡은 설소백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청명의 말에 충격을 받아서가 아니다. 순전히 체력이 완전히 바닥나도록 지쳐서 떨리는 것이다.
그의 상태는 이미 엉망이었다.
북해의 눈처럼 새하얬을 무복은 흙먼지로 뒤덮여 황톳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군데군데 검은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원래도 하얗던 얼굴은 희미한 핏기마저 사라져 거의 시신처럼 창백해 보였다.
“왜?”
청명이 그런 설소백을 보며 차게 물었다.
“여기까지 할까?”
“아, 아닙니다, 도장님!”
설소백이 떨리는 손으로 검을 꽉 움켜잡았다.
“그만하고 싶으면 그만해도 돼. 너는 충분히 했어.”
“아니요!”
설소백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도장님이 말씀하셨잖습니까. 충분히 했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자신이 결정하는 거라고!”
“…….”
“저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더 해야지요!”
청명이 피식 웃었다.
“그 꼴로?”
“…….”
“솔직하게 말해 보자. 굳이 이러지 않아도 돼. 네가 약하다고 해서 널 무시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적어도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북해의 누구도 너를 건드리지 못할 거야.”
설소백이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봤을 때, 너는 충분히 노력했어. 누구도 너에게 편히 지냈다고 말하지는 못할 거야. 그러니까 몸 상하기 전에…….”
“아니요!”
설소백이 버럭 소리를 치며 청명의 말허리를 끊었다. 흡사 비명 같은 목소리였다. 그의 핏발 선 눈이 청명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충분히 했다, 열심히 했다!”
이 가는 소리가 으드득,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결국 의미를 가지는 건, 제가 빙궁의 수련에도 참가하지 못할 정도로 약해 빠졌다는 것뿐입니다!”
“당연한 것 아닌가? 너는 무학을 익히기 시작한 시기도 늦었고, 애초에 강해서 궁주가 된 것도 아니잖아.”
“그게 왜 당연합니까!”
설소백이 역정을 내듯 외쳤다.
“그딴 것을 이해해 주는 적도 있습니까? 빙궁의 궁주가 나약해서야 어떻게 궁도들을! 그리고 북해의 주민들을 지킬 수 있습니까?”
“…….”
“어리다는 걸로는 책임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나중에 가면 강해질 거란 말은 위로가 아닙니다! 그건 결국 지금의 제가 약하고, 지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다는 소리 아닙니까!”
설소백이 땅에 박혀 있던 검을 고쳐 잡고 뽑았다.
“강해질 겁니다. 저도 빙궁주로서, 다른 문주님들처럼 빙궁을 이끌 수 있을 자격을 갖출 겁니다. 하루라도 빨리!”
“하여튼 이 미련한 놈이…….”
“누구에게 배운 덕분에요.”
그 순간 청명이 단번에 설소백에게 쇄도해 검을 휘둘렀다. 설소백이 재빠르게 검을 들어 막아 냈지만, 그 순간 그의 몸은 여지없이 튕겨 나가 버렸다.
반응은 제때 했지만 청명의 검에 실린 힘을 버티지 못한 것이다.
“우웩!”
심하게 나뒹군 설소백이 결국 시뻘건 피를 토해 냈다. 그 모습을 보며 청명이 심드렁한 얼굴로 다가섰다.
“불공평하지?”
“…….”
“분명히 반응했는데, 힘에서 밀린다. 이건 내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럼 나는 대체 어떻게 이기라는 말인가? 계속 그냥 지기만 하라는 건가?”
설소백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저 말이 그의 심정을 그대로 대변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이야. 강호는 원래 그런 곳이야. 억울하고, 또 한없이 불공평하지. 노력? 노력한다고 해서 정당한 보상을 받는다는 보장도 없어. 하지만…….”
청명이 작게 웃었다.
“그래도 뭘 어쩌겠어. 할 수 있는 게 노력하는 것밖에 없으면 그거라도 해야지. 안 그래?”
설소백이 떨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쿨럭!”
힘겹게 기침을 토해 내면서도 꿋꿋하게 다시 자세를 잡았다. 청명은 그 모습을 보다 담담히 물었다.
“알고 있지? 이번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 네가 한 사람 몫을 할 만큼 성장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한 사람의 궁주로서 제 역할을 할 가능성은 더욱 없지.”
설소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할 거냐?”
“예!”
“무의미해도?”
“예!”
설소백의 대답에는 단 한 치의 망설임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 강렬한 눈빛을 본 청명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덜 맞은 모양이네. 그럼 어디 더는 못 하겠다는 소리가 나올 때까지 패 볼까?”
청명이 일직선으로 설소백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순간 설소백도 이를 악물고 청명을 맞아 땅을 박찼다.
대련, 아니. 대련을 가장한 일방적인 구타를 지켜보던 백천이 고개를 돌려 유이설을 바라보았다.
“사매.”
“네.”
“……언제부터 저러고 있었던 거야?”
“언제?”
유이설이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그 말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처럼. 하지만 백천이 재차 부연하기 전에 그녀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첫날인가…… 다음 날부터.”
“다음 날?”
“빙궁이 온 다음 날부터요.”
백천은 순간 움찔하며 다시 설소백을 보았다.
‘오늘이 처음이 아니야?’
그럼 저 청명이 놈은 낮에는 그들을 때려잡고, 밤에는 설소백을 끌고 나와 수련을 시키는 생활을 이제껏 해 왔다는 건가?
아니, 아니다. 그게 아니지.
‘빙궁이 언제 왔더라?’
그럼 빙궁주는 밤마다 저렇게 일 대 일로 얻어맞으면서도 버티고 있었다는 건가?
‘미쳤어…….’
딱히 이상한 광경은 아니다. 그도 언제나 설소백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청명에게 굴려졌으니까. 하지만 애초에 그와 설소백은 경지가 다르지 않은가?
백천도 버티기 버거운 저런 수련을 저 어린 궁주가 버텨 낼 리가 없다.
‘하지만 버티고 있잖아?’
백천은 이 광경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내심 혼란했다. 그때 유이설이 무심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성장해요.”
“……응?”
“하루가 다르게. 놀랄 만큼 빠르게.”
유이설은 사람에 대한 평가가 후한 이가 아니다. 그런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는 건, 정말 설소백이 빠르게 강해지고 있다는 뜻이겠지.
‘재능인가?’
아니. 그건 아닐 것이다.
물론 재능이 없지는 않겠지만, 유이설이 이렇게 말한다는 건 재능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무엇인지는 굳이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
설소백이 청명을 향해 달려들었다. 제대로 닿기는커녕 쓰러지지 않고 저기까지 갈 수나 있을까 싶은 상태로 말이다.
그 모습을 본 백천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저렇게까지…….’
과할 정도로 노력해 왔다. 그리고 과할 정도로 열심히 해 왔다. 누구도 백천이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 백천은 스스로 깨닫고 말았다.
‘나도 그걸 알고 있었구나.’
충분할 정도로 열심히 했고, 노력할 만큼 했고, 이 이상은 하기 어렵다고, 내심 그리 생각해 버린 모양이다.
발을 질질 끌면서도 검을 한 번이라도 더 휘두르겠다고 악을 써 대는 설소백을 보고 있으니 느껴졌다. 어느새 백천도 누군가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이가 되어 버렸다는 게.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문 백천이 고개를 돌려 유이설을 바라보았다.
“사매는 왜?”
“……처음에는 우연히.”
아마 그랬겠지.
유이설은 예전부터 개인 수련을 남에게 보이기를 싫어했다. 화산뿐 아니라 다른 문파까지 함께 있는 장원에서는 수련하기 무척 껄끄러웠을 것이다.
‘아니, 그 말은…… 사매는 그만큼을 하고도 개인 수련을 또 해 왔다는 건가?’
백천마저도 최근에는 하고 있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 뒤로는…….”
유이설이 무어라 말하려다 입을 닫았다. 정확한 이유를 말하기 어렵다는 의미겠지.
하지만 백천은 왜 유이설이 이 광경을 지켜보려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쾅!
청명이 설소백의 옆구리를 걷어차 날려 버렸다. 그리고 쓰러져 있는 설소백을 향해 고저 없이 입을 열었다.
“사람을 끌어간다는 건 그리 쉬운 게 아니야.”
“…….”
“앞에 서는 건 어렵지 않지. 하지만 끌어간다는 건 앞에 서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야. 누구보다 노력해야 하고, 결코 뒤처져서는 안 돼. 그리고 자신이 명확히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확신까지 가져야 해.”
“……예.”
“확신은 고민에서 나온다. 내가 생각한 게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에서 나오고. 언젠가는 너도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내린 결론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으니 나는 여전히 옳다는 착각에 빠져드는 순간을 맞이하게 될 거야. 그저 지금까지 하던 대로만 하면 될 거라고 착각하는 순간이.”
그 말을 들은 백천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기억해 둬.”
청명이 싸늘하게 말했다.
“서는 자리가 달라지면 옳았던 것도 틀려지고, 틀렸던 것도 옳아진다. 그리고 그때가 언제 올지는 아무도 몰라. 어쩌면 일 년 뒤일 수도 있고, 어쩌면 내일일 수도 있고, 어쩌면 어제였을지도 몰라.”
“…….”
“그러니 틀리고 싶지 않다면 끊임없이 고민하고 의심할 수밖에 없어.”
설소백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끈다는 건 그래. 힘든 일이지. 하지만 네가 만약 그걸 해낼 수만 있다면…….”
청명이 검을 쥔 채 한 바퀴 휙 돌렸다.
“빙궁은 정말 제대로 된 궁주를 얻을 수 있겠지.”
“……당연히 그렇게 될 겁니다.”
“말이야 누가 못 해. 와 봐.”
“예!”
설소백이 이를 악물고 청명을 향해 또다시 달려들었다.
청명은 검을 내린 채 설소백을 지켜보고, 설소백은 전력을 향해 앞으로 나아간다. 그들 위로는 밝은 달이 떠 있었다.
백천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아 버렸다.
‘정체된 게 아니었구나. 그냥 내가 제자리에 멈춘 거였어.’
그는 흡사 자신의 몸 같은 검을 움켜잡았다. 너무도 익숙해진, 그렇기에 이제는 편안해져 버린 그 검의 감촉을 처음부터 하나하나 다시 느끼며, 내면으로 점점 더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