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0화. 그래도 뭘 어쩌겠어. (5)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벅찬 숨이 거의 토해지듯 연신 후욱, 후욱, 쏟아졌다. 윤종은 검을 부러져라 꽉 움켜잡았다.
‘저놈도 지쳤다. 한 번만 운 좋게 검이 들어가면!’
그의 두 눈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다.
“우라야아아아앗! 죽어어어엇!”
혼신의 힘을 다해 검을 휘두르며 앞으로 짓쳐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 모든 힘을 쏟아내는 상황에서도 윤종은 내심 알고 있었다.
그 ‘한 번만 운 좋게’는 절대로 필요할 때 터져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파아앗!
섬전처럼 뻗어 나온 청명의 검이 날아드는 윤종의 검을 단번에 튕겨 냈다.
그리고.
투우우우우웅!
연이어 날아든 암매검의 손잡이가 윤종의 턱에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끄윽…….”
윤종의 시야에 어둑어둑해진 하늘이 그득 들어왔다.
‘썩을…….’
털썩.
결국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윤종이 썩은 짚단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청명은 암매검을 검집에 밀어 넣고는 짧게 혀를 찼다.
“까불고 있네.”
“…….”
“뭐? 복수? 복수우우우? 이 새끼들이 강호가 만만해! 대충 포진 하나 잡고 의욕 넘치게 달려들면 결과가 바뀔 것 같아? 그럴 것 같으면 수련은 뭐 하러 해!”
널브러진 이들에게 연설을 늘어놓은 청명이 헹 하고 코웃음을 쳤다.
“백 년은 멀었다! 애송이들아!”
“…….”
“에이, 발전 없는 것들.”
청명이 몸을 획 돌렸다. 굳은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두 문주와 장로들이 그와 함께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보무도 당당하게 연무장에서 이어진 장원의 모퉁이를 돈 순간, 그들은 일제히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이고…….”
“진짜 지는 줄 알았네.”
심지어는 맹소와 당군악도 몸을 가누기 힘든지 장원의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위험했군.”
“이번에는 진짜 위험했소.”
당군악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겉으로 보기에야 평소처럼 무난하게 승리한 것으로 보이겠지만, 이번에는 정말 쉽지 않았다. 수가 적은 만큼, 한 번이라도 기세를 넘겨주었다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을 터. 까딱했으면 저곳에 널브러져 있는 건 바로 그들이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그들은 참 잘 싸웠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런데, 화산검협.”
“네?”
그들과는 달리 여전히 쌩쌩하게 대답하는 청명을 보며 당군악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진짜 끝을 모르겠군.’
체력이야 그렇다 치지만, 이렇게 싸우고 또 싸우는 일이 이어지다 보면 사람의 정신이 깎이지 않을 도리가 없을 텐데. 저렇게 평정을 유지하는 정신력은 대체 어디서 나온다는 말인가?
“내 생각이네만…… 오늘은 차라리…….”
“져 주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고요?”
“음.”
당군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지는 것을 좋아하는 무인은 없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결국은 이기고 싶어 하는 것이 무인이다. 그러니 상대가 자신의 제자들이든, 천우맹의 맹도들이든 당군악 역시 일부러 져 주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저들은 아마 오늘 큰마음을 먹었을 것이다. 그동안 치고받고 싸웠던 이들과의 묵은 감정을 미뤄 두고 대승적으로 결단을 내리지 않았는가? 그런데 결과가 달라진 게 없으니 의욕이 꺾일 만도 하다.
보통 이럴 때는 서로가 남 탓을 하게 된다. 사람이란 잘 풀릴 때에는 모든 것이 즐겁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았을 때는 남 탓부터 하게 되는 법이니까.
“내 생각도 그렇네. 져 주는 건 그렇더라도, 서로 힘을 합쳐 싸우는 게 의미가 있었다는 인식을 줘야 하지 않았겠나.”
맹소가 턱을 쓰다듬으며 당군악의 말에 힘을 보탰다.
그 말을 들은 청명이 히죽 웃었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는데요.”
“음?”
“자기 제자들을 너무 나약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네요. 제가 구박을 해서 그렇지, 사실 쟤들이 어디 내놓았을 때 빠지는 건 아니거든요?”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직접 보세요.”
청명이 턱짓으로 연무장 쪽을 가리켰다. 당군악과 맹소가 슬그머니 장원 모퉁이로 다가가 고개를 슬쩍 내밀었다.
“애초에 포진이 잘못되었다니까요! 야수궁으로는 못 버틴다니까!”
“아니, 야수궁이 시간을 끌어 준 것은 사실이잖아요!”
“시간을 끌면 뭐 합니까, 결국은 무너지는데! 저 괴물 같은 양반들을 막으려면 포진을 두텁게 쌓아야 한다니까! 화산이나 빙궁 중 하나는 공격을 포기하고 수비로 돌리는 게 맞습니다!”
“그럼 저쪽에서는 위기감 없이 편하게 공격만 할 수 있잖습니까! 그래서는 시간만 끌 뿐이지 궁극적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최선의 수비는 공격이라는 말도 모르십니까?”
“그거야 이상론이고!”
널브러져 있던 이들이 어느새 중앙에 모여 격하게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맹소와 당군악의 입에서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아오, 빌어먹을. 얻어맞은 턱이 아직 쑤시네.”
“그런데 하도 많이 맞아서 그런가, 이제는 맞아도 좀 버틸 만합니다.”
“……그거 자랑 아닌 것 같은데.”
“어쨌든 간에!”
조걸이 눈에 불을 켰다.
“오늘 당가주님 헉헉대시는 것 봤습니까?”
“봤지!”
“숨이 아주 턱 끝까지 차오르셨던데? 곧 넘어갈 것 같았다니까? 크크크큭!”
당군악이 발끈하여 몸에 힘을 주자 맹소가 슬쩍 어깨를 잡으며 말렸다.
“야수궁주님은 어떻고? 이야! 사람이 크니까 어깨만 들썩여도 무슨 산사태 난 것 같더라!”
이번에는 당군악이 슬며시 손을 뻗어 부들대는 맹소의 팔목을 가만히 붙들었다.
“딱히 대단하게 한 것도 없는데, 오늘은 진짜 해볼 만했어.”
“이대로면 정말 제대로 한 방 먹이는 날도 머지않았다 이 말이야!”
“그러니까 다시 뭉쳐 봐! 일단은 저 쓸모없는 녹림 놈들부터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보자고!”
“자, 잠깐만. 화산검협은 어떻게 할 거요? 그게 제일 문제 아닌가?”
“그거야 화산 분들이 어떻게든 하겠지. 우린 생각하지 말자고요.”
“아니, 그걸 왜 우리한테 떠넘깁니까! 저걸 우리더러 어쩌라고!”
격해져 가는 대화를 듣고 있던 당군악과 맹소가 슬그머니 몸을 뒤로 뺐다. 몸을 돌린 그들의 얼굴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맞죠?”
“허…….”
당군악보다 오히려 맹소가 더 놀란 듯했다.
‘저놈들이…….’
어느새 야수궁도들이 저들과 자연스레 어울리고 있었다. 야수궁은 운남에서도 워낙 외진 곳에 위치해 있다. 그러다 보니 평범한 이들과는 왕래가 잘 없다. 짐승만 벗 삼아 살아서 외부인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게 야수궁의 고질적인 문제점 아니었던가?
그런 궁도들이 지금 운남인들도 아니고 중원인들과 격의 없이 대화를 하고 있다. 반쯤 퍼질러 앉은 채로 말이다.
‘알 수가 없군.’
청명이 무슨 요술이라도 부린 건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원래 부모는 자기 자식을 잘 모르고, 스승은 자기 제자를 잘 모르는 법이죠. 잘 알아야 하는데 이상하게도요.”
웃는 청명을 보며 당군악과 맹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쟤들 걱정할 시간에 본인들 걱정부터 하시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까딱하다가는 망신당하실 것 같던데.”
“그럴 일은 없네.”
“말도 안 되는 소리!”
낄낄 웃어 댄 청명이 몸을 돌리며 기지개를 켰다.
“뭐, 그건 봐야 아는 일이고.”
휘적휘적 걸어가는 청명을 보며 맹소와 당군악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 * *
“아이고. 몸이 성한 곳이 없네.”
“걸아……. 식당에서 웃통 까지 마라.”
“남자끼리 있는데 뭔 문제라도 있습니까?”
“소소도 있잖으냐?”
“에이, 소소야 가족인데.”
“사형.”
“응?”
당소소가 생글생글 웃었다.
“사형 같은 동생 둔 적 없어요.”
“…….”
“사형 같은 동생이 있었으면 진즉에 내 손으로 묻었지. 사형은 당가에 안 태어난 걸 다행으로 아세요.”
“……그건 항상 감사하고 있어.”
진심으로.
그때 백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걸이 획 시선을 주며 물었다.
“응? 사숙, 어디 가십니까?”
평소 백천은 식사를 먼저 마쳐도 나머지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갑자기 식사 중에 일어나니 궁금증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별일 아니다. 잠시 들를 데가 있어서 그런다. 식사해라.”
“예, 사숙.”
백천이 조용히 식당을 빠져나갔다. 남은 이들은 별로 신경을 기울이지 않고 이내 저들끼리 떠들기에 바빴다.
백천은 천천히 강을 따라 걸었다. 그의 시선은 무심하게 흘러가는 강에 닿아 있었다.
“후우.”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온다.
굳이 시간을 내서 강가로 나온 이유는 최근 그가 느끼는 답답함이 꽤 커졌기 때문이다.
‘저놈은 이걸 다 어떻게 한 거지?’
그간 화산은 청명이 이끌어 왔다. 하지만 최근에 청명은 화산 내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딱히 입을 떼지 않고 있다.
물론 청명은 천우맹 전체의 일을 처리해야 하니 일일이 화산의 내부 사정에 신경 쓸 상황이 안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백천은 안다. 청명이 그런 식으로 움직이는 놈이 아니라는 것을. 필요를 느끼면 잠을 줄이는 한이 있더라도 해야 할 일은 하는 놈이 청명이다.
그런 놈이 이토록 관심을 끊고 있다는 것은…….
‘이제 알아서 하라는 무언의 압박이겠지.’
백천이 다시 한번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화산을 이끌어 나가는 것 자체에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가 청명처럼 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애초에 그는 청명이 놈만큼 많은 일을 할 필요가 없으니까.
게다가 그는 혼자서 화산을 이끄는 게 아니다. 사제들과 사질들이 그를 도와주지 않는가? 게다가 혜연 스님까지 은근히 그에게 쏟아지는 일이 과하지는 않은지 신경을 써 주고 있는 마당이니…….
‘우는소리 늘어놓는 게 민망할 정도지.’
그러니 확실히 화산에서 대제자 역할을 하는 것에는 딱히 부담이 없다. 원래 그가 했어야 할 일이다. 청명에게 잠시 맡겨 두었던 일이 이제야 제자리를 찾아오는 것뿐이다.
그건 문제가 아니다. 백천을 갑갑하게 만드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백천이 슬쩍 제 검의 손잡이를 가만히 움켜잡았다가 힘없이 손을 뗐다.
‘정체됐어.’
문제는 바로 그 자신이다.
폐관을 했던 삼 년간, 그는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수많은 일을 겪었음에도 실력이 늘고 있다는 실감을 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딱히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이건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니까. 하지만 어느 순간 백천은 알게 되어 버렸다.
‘시간이 없어.’
주교를 상대하는 청명과 장일소를 보며, 백천은 뼈저리게 깨닫고 말았다. 저들이 서로 목숨을 걸고 싸울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올 것이라는 걸.
그리고 그 순간이 왔을 때, 백천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리란 걸 말이다.
“후우.”
숨을 길게 내쉬어도 갑갑한 마음은 가시질 않았다.
백천은 강하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는 분명 강하다.
남궁의 모든 기대를 한 몸에 받은 남궁도위도, 당가의 다음 가주로 확정된 당패도 솔직히 그의 상대는 아니다.
지금이라면 진금룡조차도 열 수 이내에 제압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만큼 백천은 같은 배분에서는 적수를 찾아볼 수 없는 강자로 성장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갑갑함을 느끼는 이유는 그 정도 실력으로는 이 거대한 진영들이 맞붙는 전투에서 딱히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실력은 부족한데, 시간은 없다. 이러다가는 언젠가 눈앞에서 다른 제자들이 죽어 가는 모습을 두 눈 뜨고 지켜봐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그 시간은 그의 생각보다 가까이 있을 수도 있다.
그 걱정과 초조함이 백천을 이곳으로 이끌었다. 탁 트인 강을 보면 마음이 조금 편해질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흐르는 강을 봐도 마음은 조금도 편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갑갑해져 오기만 했다.
그는 연거푸 한숨을 쉬며 강변을 따라 내도록 걸었다. 그렇게 무작정 걸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응?”
백천의 걸음이 문득 멎었다. 고개를 갸웃거린 그는 귀를 기울였다.
‘뭐지? 이 소리는…….’
그의 두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
이런 야밤에 이런 곳에서?
삽시간에 기척을 죽인 백천은 병장기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빠르게 달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