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8화. 그래도 뭘 어쩌겠어. (3)
모든 이들이 임소병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그 모습을 본 임소병이 더없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백천 역시 덩달아 흐뭇하게 웃었다. 이 모습이야말로 그동안 갈등과 분열의 길을 걷던 천우맹이 진정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다는…….
“왜 다 와? 정신 사납게.”
“……예?”
“조무래기는 꺼지시고! 대가리만 모여! 대가리만!”
백천은 저도 모르게 흠칫하여 주변을 돌아보았다. 임소병이 말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마치 청명이 말을 하고 간 것 같은 기묘한 기시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일단 거기 소가주 둘이랑.”
“예.”
“으음.”
“빙궁이랑 야수궁도 대표 하나씩 앞으로 보내시고. 화산은……. 끙, 화산은 그냥 다섯 다 오쇼.”
그때 당패가 손을 번쩍 들었다.
“뭡니까?”
“왜 화산은 다섯입니까?”
그 말에 임소병의 눈가가 실룩였다.
“애들 있는 데라서 말을 안 하려 했는데, 그래서 당가의 소가주님께서는 저 다섯이랑 일 대 일로 붙어서 이길 자신 있으신지?”
당패가 조용히 입을 닫았다.
“최대 전력은 따로 대우해 줘야 할 것 아니냐고! 이런 것까지 일일이 말씀드려야 됩니까?”
“죄송합니다.”
“쯧.”
임소병이 영 답답하다는 듯이 부채로 제 얼굴을 파닥파닥 부쳤다.
“그리고 그…….”
“예?”
“소림 대표도 오실?”
혜연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녹림왕 시주께서 조금 오해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저는 소림의 대표가 아닙니다.”
“그럼 화산의 여섯 번째로 합류하시죠.”
그 말에 혜연의 얼굴에 깊은 고뇌가 피어났다.
소림의 대표라는 자리도 말이 안 되지만, 그가 화산의 여섯 번째로 합류한다는 것도 모양이 많이, 아주 많이 이상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는 중이 아니던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의혹과 잡념을 다스린 혜연이 단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시주!”
“예?”
“……말이라도 다섯 번째로 합시다.”
“…….”
“그래도 저 인간보다 뒤라는 건 좀.”
“와……. 스님. 저한테 왜 그러십니까?”
혜연의 노골적인 시선에 조걸이 발끈하며 세상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를 제외한 모두는 그런 혜연의 마음을 십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섯 번째로.”
“아니, 그냥 이렇게 결정하는 겁니까? 내 의견은?”
“걸아. 시끄럽다.”
“……각박한 세상.”
여하튼 임소병의 주변으로 모두가 모여들었다. 어쨌거나 이곳에서 한 문파를 대표할 만한 신분을 가진 이는 임소병뿐이다. 그리고 임소병은 비공식적으로나마 천우맹의 군사로 인정받고 있는 이. 당연히 모두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임소병이 모두를 모으고 꺼낸 첫마디는 책략을 기대하고 모인 이들을 순식간에 멍하게 만들었다.
“어쩔 겁니까?”
“…….”
“…….”
모여든 이들이 서로 다른 감정을 담아 임소병을 보았다. 임소병은 ‘뭐 어쩌라고?’ 하고 묻는 듯한 얼굴로 부채를 살랑살랑 부쳐 댔다.
“저기 그…… 녹림왕.”
“예.”
“대책이 있는 게 아니셨……?”
“대책?”
임소병이 코웃음을 쳤다.
“패는 대로 죽어라 처맞기만 했는데, 나한테 대책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대책이 있었으면 미리 썼지. 내가 뭐 맞는 걸 대단히 좋아해서 참고 있었던 것 같습니까?”
“……그건 맞는 말인데…….”
모두가 점잔을 뺄 때 필요한 이는 역시 조걸이었다.
“아니, 머리 좋잖아요! 뭔가 생각이 있었을 것 아닙니까?”
“아, 머리?”
“예, 머리!”
임소병이 코웃음을 치며 조걸을 바라본다.
“그러니까 니들은 지금까지 처맞기만 했는데, 이제 더 맞는 건 좀 그렇고, 머리 굴리기도 귀찮으니까 여기 있는 사파 새끼가 알아서 머리 굴려 가지고 이제 안 얻어맞을 만한 기가 막힌 계책을 짜내라?”
“그, 그렇게까지는…….”
“니들 같은 것들 때문에 책사들이 죽어나는 거야!”
임소병이 발끈해서 달려들려고 하자 유이설과 윤종이 자연스레 그를 좌우에서 잡아 눌렀다. 분명 처음 하는 일인데도 무척이나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책략? 이 양반들은 책략이 뭐 그때그때 뚝딱뚝딱 만들어지는 건 줄 아나? 나는 무슨 책략을 책략 주머니에 넣어 다니다가 그때그때 꺼내 쓰는 사람이야? 야, 이 인간들아! 책략이 그렇게 만능일 것 같으면 애초에 책사들을 우대해 주든가! 평소에는 칼 못 써서 머리나 굴려 댄다고 무시하다가 이럴 때는, 뭐? 제때 책략을 못 꺼내면 쓸모없어?”
“아, 아무도 그런 말은 안 했…….”
“이 양반들은 책사가 뭔 신선쯤 되는 줄 아나! 그래서 제갈공명이 북벌 성공했냐고! 그 양반도 못 한 걸 왜 나한테 난리야!”
“아무도 난리 안 쳤…….”
“더러운 칼잡이 놈들 같으니!”
허망한 눈으로 임소병을 바라보던 이들이 저도 모르게 녹림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할 말을 잃은 그들과는 달리, 녹채의 녹림도들은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저 인간 또 병 도졌구나.’ 하는 얼굴로 하품이나 해 대고 있었다.
“거…… 한 번씩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슈.”
“…….”
모두가 순간 궁금해졌다. 저 인간들은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건지 말이다.
“크흠.”
백천이 헛기침해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러니까 결론은…… 지금 딱히 대책이 없다는 말씀이시지요?”
“대책이 있으면?”
“예?”
임소병이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대책이 있으면 내가 시키는 대로 따르실 수는 있고?”
“그야 당연히…….”
임소병이 고개를 돌려 야수궁도들을 보았다.
“그쪽이 몸이 튼튼하니 대충 얻어맞으면서 화산검협의 팔다리를 잡고 늘어지쇼. 물론 뭐 그 과정에서 머리 좀 깨지고, 팔다리가 부러지기는 하겠지만, 이기기는 할 거요.”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야수궁도들이 버럭 고함을 쳤다.
“왜 우리가 그래야 하는 거요!”
그러자 임소병이 뚱한 얼굴로 백천을 돌아보았다.
“들으셨죠?”
백천이 참담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생각해 보면 화산은 몰라도 다른 문파들은 임소병을 전적으로 신뢰할 이유가 없다. 아니, 설사 신뢰한다 해도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자신이 더 큰 피해를 감수할 이유가 없다.
‘진짜 어렵구나.’
새삼 백천은 깨달았다.
각 문파의 실리와 명분을 조율하고 그들을 하나로 엮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말이다. 겪으면 겪을수록 이게 정말 가능하긴 한 일인지 의심이 될 정도다.
사람이란 그저 거창한 대의를 내세우고, 누구나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걷는다고 해서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따르지 않는다. 그런 게 현실에서 가능했다면 세상에 왜 다툼이 가득하겠는가?
“쯧쯧.”
임소병이 슬쩍 백천을 바라보고는 혀를 차 댔다. 그 모습에 의아함을 느낀 백천이 막 고개를 갸웃하려 할 때, 임소병이 툭 말을 던졌다.
“답은 이미 나와 있는 것 아닙니까?”
“예?”
“도장은 지금까지 뭘 하셨소?”
“뭘 했냐니. 그야…….”
때리고, 걷어차고, 잡아 뜯고…….
‘……싸움박질밖에 안 했는데.’
새삼 죄스러움이 밀려 올라오네.
“하아……. 도장은 왜 매번 반만 갑니까?”
“예?”
“그게 도장이 하고 싶어서 하신 거요? 이 모든 수작질을 벌인 마귀가 누구요?”
“그야…….”
청명이지.
굳이 ‘이 모든 수작질을 벌인’이라는 말을 앞에 붙일 것도 없이, 지금 천우맹 내에서 마귀라고 불릴 놈은 애초에 청명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럼 그 양반이 왜 이런 상황을 조장했다고 생각합니까?”
그 대답은 즉각적으로 튀어나왔다. 백천이 아닌 그 주변에 모여 있는 오검에게서.
“성격이 더러워서.”
“우리가 처맞는 꼴을 보려고.”
“괴롭히려고.”
“원래 그렇게 생겨 먹은 놈이니까.”
임소병이 움찔하며 뭔가 말하려는 순간 당패와 남궁도위가 슬그머니 말을 보탰다.
“맞는 것 같은데.”
“사실 그분에게는 딱히 이유란 게 필요 없죠.”
임소병은 할 말이 궁해진 듯 침묵했다. 논리와 언변으로 뒤집어야 하는 상황인데 이 말을 깰 논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긴 하지만, 예……. 뭐, 그럴 수 있……. 아니, 그게 당연한데. 원래 그런 인간인데.”
그렇지 않다고 하기에는 그가 당한 게 너무 많다. 너무.
“여하튼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닐 것 아닙니까?”
“억지로 좋게 생각해 주자면 그렇겠죠.”
“그럼 그 마귀 새……. 아니, 청명 도장이 대체 왜 이런 일을 벌였냐 이 말입니다! 생각을 하십시오! 생각을.”
“그야…….”
백천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서로 맞붙어 싸우게 한 이유? 솔직히 그건 잘 모르겠다. 서로 감정이 얼마나 쌓여 있는가를 알아보라는 건가?
“그럼 거꾸로.”
“예?”
“그 치고받고 싸운 덕분에 뭘 알게 되었습니까?”
백천이 답을 찾고 말을 고르느라 침묵하는 사이, 옆에 있던 조걸이 심드렁하게 입을 뗐다.
“알긴 뭘 압니까? 내가 안 거라고는 저 인간들의 성질이 얼마나 더러운가 하고, 어떻게 해야 저 인간들을 좀 더 잘 조질 수 있는지밖에 없는데.”
“그겁니다.”
“예?”
또 핀잔을 들을 거라 예상했던 조걸이 깜짝 놀라 임소병을 보았다. 어처구니없게도 임소병은 대답을 잘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바로 그겁니다, 그거!”
“……뭐가요?”
“어떻게 해야 서로를 더 잘 조질 수 있는가?”
“…….”
“그건 거꾸로 말하자면 다른 문파가 어떤 약점을 가졌는지, 그리고 내가 어떤 강점을 가졌는지를 파악했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내 강점으로 적의 약점을 치는 것은 병법을 논할 것도 없는, 기본 중의 기본이니까요.”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 이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야? 내가 지금 잘한 것 같은데?”
필사적으로 외치는 조걸의 말은 깨끗하게 무시한 채로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은, 내가 뭘 할 수 있는지도 알 수 있다는 겁니다. 그동안 얻어맞고 때리면서 느꼈을 것 아닙니까?”
“…….”
“화산검협 같은 이가 달려들 때 당신들은 뭘 할 수 있습니까? 뭘 하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이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야…….”
고민에 빠진 이들을 보며 임소병이 얼굴을 가린 부채 뒤에서 슬쩍 미소를 지었다.
‘고민해라.’
누군가 지시하는 것을 그저 따르는 걸로는 안 된다.
그들이 앞으로 싸울 전장에서는 누구도 즉각적인 지시를 내려 줄 수 없다.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상황 속에서 곁에 있는 이들의 능력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재빠르게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시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
적을 알기 전에 먼저 자신과 자신의 문파를 비롯하여, 함께 싸울 이들의 역량과 특성을 먼저 알아야 한다.
“당가는…….”
당패가 뭔가 말을 하기 전에 야수궁도가 툭 말을 내뱉었다.
“달려들어서 다리를 잡고 늘어지는 건 자신 없지만, 적당히 시간을 끌어 주는 건 야수궁이 제일 잘할 수 있소.”
“호오?”
임소병의 부채가 기분 좋게 흔들렸다.
시선이 집중되자 야수궁도는 조금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우리가 좀 우락부락해서 다들 착각하기 쉽지만, 사실 짐승의 움직임을 모방한 우리의 무학은 누군가의 공격을 피하는 데 효율이 좋소. 자연이란 그런 것이니까.”
“그러고 보니…….”
야수궁을 가장 많이 상대했던 빙궁이 납득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임소병이 부채를 촤악 소리 나게 접었다.
처음으로 말이 나온 것도 좋은 일이지만, 늘 한 발 뒤로 물러나서 ‘너희가 얼마나 우리를 인정해 줄지 지켜보자’라는 태도를 견지하던 야수궁이 먼저 말을 꺼냈다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었다.
이건 그가 한 말을 저들이 이해했다는 뜻이니까.
“당가도 도울 수 있습니다. 달려드는 이들을 저지하는 건 당가가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이니까. 야수궁이 앞에서 날뛰면 공격하기 좀 어려워지는 면이 있지만…… 야수궁 쪽과는 몇 번 교류해 본 적이 있으니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당가는 접근하면 취약해지잖습니까? 너무 가까이 가는 건…….”
“그건 우리 빙궁이 막아 드릴 수 있소. 방어에는 우리도 일가견이 있다고 자신하니까!”
“아니, 빙궁을 방어로 쓰는 건 좀 낭비 같습니다. 빙궁의 검은 공격에 좀 더 어울리지 않습니까? 차라리 우리 남궁이 막아 주는 게…….”
“빙궁보다는 화산이 공격을 해야…….”
일단 시작되니 순식간에 여기저기서 숱한 의견들이 쏟아졌다. 가장 중앙에 모여든 이들뿐 아니라 그 뒤로 서 있던 이들도 저마다 한마디씩을 보태기 시작했다.
때로는 격하게, 또 때로는 부드럽게 쏟아지는 말의 홍수 속에서, 임소병은 슬쩍 부채로 입을 가렸다.
‘단순해졌군.’
본디 하나의 목표가 정해지면 사람은 이리되는 법이 아니던가?
슬쩍 웃은 임소병은 부채를 쫙 접으면서 입을 열었다.
“이리되면 아무리 저들이라고 해도…….”
“그럼 녹림을 방패막이로 내세우면 되겠네!”
“사실 쓸데가 없긴 하잖아! 고기 방패가 딱이지!”
“그래! 야수궁보다는 녹림이 맷집이 좋은 거 아닌가? 그냥 일단 밀어 넣고!”
말문이 막힌 듯 그 소리를 듣던 임소병이 두 눈에 귀화를 피워올렸다.
“뭐? 사파 새끼들은 고기 방패나 하라는 거냐! 이 더러운 정파 놈들아!”
그렇게 천우맹도들이 다투고 싸우고 소리치는 대화의 장은 그날 새벽까지 이어지고 또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