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7화. 그래도 뭘 어쩌겠어. (2)
연무장을 채운 이들의 표정이 일순 얼떨떨해졌다.
‘아, 아니…….’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뜬금없다? 아니면 황당하다? 그게 아니면 영 이상하다?
지금까지 화산을 조금이라도 겪은 이들은 알고 있다. 화산을 대표하는 이는 누가 뭐라고 해도 청명이다. 밖에서 보기에나, 안에서 보기에나 청명이라는 이는 화산이라는 문파에 말도 안 되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화산을 웬만큼 가까이서 오래 겪어 본 이들의 시선은 조금 달라진다.
화산이라는 문파의 중심은 청명일지 모르나, 화산에 소속된 제자들의 중심은 백천이다. 청명은 그저 이들을 이끌 뿐, 그들의 생각을 하나로 조율하고 실질적으로 통제하는 건 누가 뭐라고 해도 이 헌앙한 청년인 것이다.
화산의 장문인 현종조차도 제자들에게 무언가 전해야 할 것이 있을 때는 청명이 아니라 백천을 통하지 않는가?
단순히 청명이 바쁘기 때문에 택한 차선책이 아니다. 화산의 큰 방향을 이끄는 것은 청명이지만, 화산의 제자들을 이끄는 이들은 백천이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합의의 결과이다.
그런 백천이, 확정적인 후대의 화산 장문인이자 현 화산의 제자들을 대표하는 백천이 그들의 앞에 뜬금없이 고개를 숙인 것이다.
당패가 멍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다른 이라고 다를 게 없어서 모두 입을 뗄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그중 움직인 게 당패뿐이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적임자라고 여겼기 때문인지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모였다.
암묵적인 압박을 받은 당패는 결국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도장……. 갑자기 왜 이러시는 겁니까?”
그제야 백천이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당패를 비롯한 모두에게 시선을 고루 주었다.
그 순간 백천의 머릿속엔 여러 가지 말이 떠올랐다. 점잖은 말, 적당히 어르고 달래는 말, 상대가 미안해하게끔 더 깊이 사과하는 말 등등.
하지만 그런 것들은 결국 순식간에 사라졌다. 지금은 적당히 체면치레하면서 봉합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결국 입에서 나온 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지금 우리는 어디서 모실 수도 없는 절대 고수들을 상대로 수련하고 있습니다. 한순간, 한순간이 어느 것과도 비할 수 없이 귀합니다.”
그 말에는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수련을 버텨 내는 게 힘든가 아닌가는 둘째치고, 이게 웬만해서는 다시 올 수 없는 기회라는 것만은 모두가 공감했다.
사천당가의 가솔이라 해도 가주와 맞상대해 볼 기회가 일생에 몇 번이나 있겠는가? 야수궁의 궁도라 해서 야수궁주와 진지하게 싸워 볼 기회가 있었겠는가?
그런 이들이 하나도 아니고 셋이나 날뛰는 상황을 대체 어디서 경험해 보겠는가?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이 기회를 말입니다.”
“…….”
“천우맹을 생각하고, 나아가 강호를 생각하고, 솔직히 그런 거창한 건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는 이 귀한 시간을 이런 식으로 낭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분들을 상대하는 것에 모든 힘을 집중해야 할 시간에 해묵은 감정을 끼워 넣고 싶지 않습니다.”
몇몇 이들, 특히 남궁도위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부탁드립니다. 힘을 모아 주십시오.”
당패가 살짝 언짢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게 대의를 위한 길이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백천이 딱 잘라 말했다.
“그게 화산에 도움이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백천의 시선이 당패에게 꽂혔다.
“소가주께서도 그렇지 않으십니까?”
당패의 입매가 살짝 굳어졌다.
지금 백천은 그에게 묻고 있다. 그 별것도 아닌 악감정 때문에 가솔들이 이 좋은 기회를 그저 얻어맞는 시간으로 날려 버리길 원하는가? 아니면 자신을 발전시킬 시간으로 삼기를 원하는가?
‘말은 잘하네.’
순간적으로 울화가 치밀었다. 애초에 이 모든 일의 발단은 저 화산이 당가를 농락하듯 두들겨 패면서 벌어진 일이고, 화산 소속의 화산검협이 모두를 지독하게 괴롭혀 쌓인 일이다.
그런데 가해자나 다름없는 이들이 입바른 소리를 해 대니 열이 치솟을 수밖에.
살인은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그 말을 이미 살인을 저지른 이가 복수를 당하는 와중에 설파해 댄다면 배알이 뒤틀리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화산이 그런 말을 입에 담는 게 어처구니가 없군요.”
백천이 변명 없이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괜히 한번 트집을 잡아 봤던 당패는 그 모습에 앓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지만…… 자문의 제자들을 생각하는 게 도장뿐이라고 생각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지금 당패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다름 아닌 당군악의 눈빛이었다.
제 손으로 얻어 내지 않아도 뭐든 주어졌으니 마음이 급할 이유도 없고, 간절할 이유도 없다는 그 말 말이다.
‘틀린 말이 하나 없다.’
지금 가장 간절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당가다. 그들은 훨씬 우월한 입장에 있었으면서도 화산의 제자들을 당해 내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러니 그들이 더 급해야 하고 그들이 더 안달복달해야 한다. 지금 백천이 하고 있는 일을 당패가 먼저 했어야 한다.
하지만 당패는 그저 드러누워 있었을 뿐이고, 급할 이유가 없는 화산이 먼저 고개 숙였다.
간절하다면 움직여야 한다. 내심으로만 애를 태우고 움직이지 않는 것은 진정으로 간절한 게 아니다.
“감정이고 뭐고, 일단 뭐라도 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저분들이 우리에게 하시는 일이, 얻어맞고 맷집이나 키우라는 의도는 아닐 테니까 말입니다.”
백천이 단호하게 고개를 주억거린다.
“저도 동의합니다.”
그 순간 재빠르게 남궁도위가 입을 열었다.
“이대로는 일 년이 지나도 달라지는 게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방해가 되어서는 절대 상대할 수 없습니다. 의지로, 수련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건 남궁도위 자신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수 있는 발언이었다.
그는 남궁의 가주나 마찬가지다. 소가주들이 뭉치지 않으면 가주를 상대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가주인 이가 다른 가주를 상대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천하제일 세가라 불리는 대 남궁세가의 가주로서 입에 담을 만한 말은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남궁도위는 자신의 한계를 순순히 인정했다. 과거의 그라면 죽어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을 말이지만, 지금의 그는 자신의 한계를 부득부득 인정하지 않는 게, 더욱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같이 싸울 수 있는 길이 있을 겁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방해가 되는 게 아니라,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이 분명 있을 겁니다. 그것부터 찾아보는 게 어떻습니까?”
남궁도위의 말에 당패가 단호히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그때였다.
“잘나셨네.”
상황을 지켜보던 야수궁도 하나가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중원의 잘난 문파 셋이서 아주 대단하신 결정을 하셨어.”
세 사람이 굳은 얼굴로 말을 꺼낸 이를 보았다. 다른 이들이 입을 열기 전에 백천이 선수를 쳤다.
“언짢으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 뭐 언짢을 게 있습니까? 대단하신 세 문파 분들께서 그리 결정하셨으면 저희는 그냥 따라가는 거지. 천한 야인 놈들이 어디 그 말에 반기를 들겠습니까.”
그저 성격이 뒤틀린 사람 하나가 노골적으로 비꼬고 있다고 단순히 받아들일 일은 아니었다. 말을 꺼낸 이는 하나였지만, 그 뒤에 앉은 이들의 눈빛이 모두 비슷했다. 심지어 야수궁도들뿐 아니라 빙궁도들도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저희는 그럴 의도가…….”
“의도야 좋으시겠지요.”
이번에는 빙궁도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어떤 일이 있을 때마다 천우맹의 방향을 결정하는 건 화산과 당가, 남궁세가 아닙니까? 그리고 저희에게 돌아오는 건 그저 통보뿐이고.”
“…….”
“그러니 이번에도 받아들이겠다는 건데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이 말에는 백천도 꺼낼 대답이 궁색했다.
느닷없이 싸잡힌 남궁이야 조금 억울할 일이지만, 사실 그간 천우맹의 대소사를 결정해 온 것은 화산과 당가였고, 다른 이들은 그저 통보를 받았을 뿐이라는 말은 부정하기 어려웠다.
확실히 그건 천우맹을 처음에 만든 의도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그게 백천의 잘못은 아니라고 해도, 모두가 있는 곳에서 당가와 남궁이 당연하게도 먼저 나서 버리는 상황은 저들이 쌓아 왔던 불만을 건드리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 부분은 죄송합니다. 다만 저희는 그럴 의도가…….”
“아닙니다, 백천 도장. 불만이 있는 게 아니라는데 왜 그리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희는 그저 말씀하시는 대로 따라가면 될 일이지요.”
백천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정직하게 공격해 오는 이들에 대해서야 얼마든지 대처할 수 있지만, 이런 식으로 빈정거리며 나오는 건 퍽 상대하기가 어려웠다. 화산의 대제자라는 그의 입장에서는 무슨 말을 해도 착한 척 이상이 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대체 어찌 말을 해야 할까 백천이 고민하는 와중에, 짜증 섞인 목소리 하나가 까랑까랑 울려 퍼졌다.
“더럽게 비꼬네, 망할 오랑캐 새끼들이.”
순간 빙궁과 야수궁의 문도들이 발끈하여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말한 이를 본 순간 그들의 반쯤 열렸던 입이 도로 닫혔다.
처참하게 구겨진 학창의를 입은 임소병이 상체만 겨우 세운 채, 짜증이란 짜증을 다 담아 모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일순 모두가 숙연해졌다.
“너희들이 차별을 받아 봐야 사파 새끼들만큼 받았겠냐? 우리는 남궁세가가 합류하기 전에도 화산에 노예처럼 굴려졌는데, 지금까지 여기서 이러고 있다!”
임소병이 역정을 내자 빙궁도와 야수궁도들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나는 녹림왕이라고, 이 새끼들아! 녹림왕! 너희 궁주가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니들이 잘도 참았겠다, 이 새끼들아! 내 꼴 보이냐?”
한쪽 눈이 시퍼렇게 물든 임소병이 대놓고 화를 내자 차마 그 누구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막말로 다른 문파의 문주가 저 꼴을 당했으면 그날로 연맹이고 나발이고 전쟁이 났겠지.
하지만 임소병은 그런 대접을 불만 한마디 없이 감내하고 있었다. 임소병과 녹림이 당한 것에 비하면 새외는 귀빈 대접을 받아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잖은가?
“이래서 중원이고 새외고 그냥 인간들은 하나같이 염치가 없다니까. 너희가 지금까지 천우맹을 위해서 뭘 했다고 챙겨 달라고 난리야! 몇 년 동안 노비 노릇을 한 우리도 아직 그런 말을 못 하는데!”
“……아니, 뭐…….”
“크흐흠.”
반사적으로 ‘너희는 사파니까.’라고 대답할 뻔했던 이들이 황급히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건 새외인들이니 차별을 받아도 된다는 말과 그리 다르지 않으니까.
“불만 늘어놓을 거면 삼 년은 처구르고 와서 지껄여.”
“…….”
“빌어먹을.”
지쳐 버린 임소병이 하늘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쉰다.
“백천 도장.”
“예, 녹림왕.”
“맞을 만큼 맞았잖습니까.”
“……맞습니다.”
임소병이 눈에 불을 켜고 말했다.
“나도 이제 짜증 나서 더 맞기 싫으니까, 방법을 마련해 봅시다. 이젠 댁들이 맞는 걸 봐도 재미가 없거든요.”
그 말에 백천이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동감하는 바입니다.”
“그러니까.”
임소병이 귀화가 불타는 눈으로 청명과 다른 이들이 사라져 간 곳을 노려보았다.
“저 잘난 체하는 양반들한테 반란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말해 주자고! 황제고, 가주고, 그냥 죽창 한 방이면…….”
“거, 거기까지!”
그건 선 넘었지, 사파 놈아!
“다들 모여 봐!”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한 임소병의 지시에, 널브러져 있던 이들이 슬금슬금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백천이 피식 웃었다.
‘나는 할 만큼 했다, 망할 놈아.’
아마 어디선가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청명에게 마음속으로나마 말을 건넨 백천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임소병을 향해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