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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134화 (1,135/1,567)

1134화. 같이 한번 친해져 보자! (4)

“하…….”

청명이 한없이 개운한 얼굴로 기지개를 켰다. 얼굴마저 반질반질해 보일 정도였다.

“이제 좀 살 것 같네.”

“…….”

“그러니 적당히 좀 하지 그랬어, 사숙.”

청명이 흘끗 내려다보며 하는 말에, 백천의 눈가엔 눈물이 맺혔다.

‘네가 하라며, 이 새끼야.’

인정사정 봐주지 말고 패랄 땐 언제고, 이제는 또 과했단다.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추란 말인가?

물론 뭐…… 백천도 속으로 켕기는 게 없는 건 아니었다. 조금 과하긴 했지. 좀…… 아니, 사실 많이 과하긴 했다.

“여하튼 칼 쓴다는 것들은 정도를 몰라요. 풀어 주면 풀어 주는 대로 기어오른다니까.”

우둑. 우둑.

청명이 목을 좌우로 꺾으며 널브러진 이들을 둘러보았다.

처참하게 널브러진 모양새들을 보고 있으니, 뭔가 굉장한 걸 해낸 것 같아 절로 뿌듯해졌다.

만일 이들이 모두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아무리 청명이 다른 문주나 장로들과 손을 맞췄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깔끔(?)하게 쓸어 버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미친놈들은 거의 열흘에 가까운 시간 동안 잠도 안 자고 서로 치고받기를 반복해서 누가 옆에서 톡 건드리기만 해도 넘어갈 상황이었다. 그러니 느긋하게 구경하면서 체력을 보존한 강자들을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특히 너! 너 이 새끼야!”

청명이 제 발치에 쓰러진 이를 툭툭 걷어찬다.

반쯤 혼이 나가 버린 임소병이 청명이 차는 대로 맥없이 굴러갔다.

“해도 적당히 해야지! 사람 자는 데다 불을 질러?”

“화공……은 고대로부터…… 쓰던 전략…….”

“이게 기운이 남았네. 끈질기기도 하지. 죽어, 좀!”

임소병을 뻥 차 버린 청명이 후련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당군악이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청명이 인사를 건넸다.

“고생하셨어요.”

“으음.”

당군악이 그답지 않게 의혹 가득한 얼굴로 볼을 작게 긁적였다.

“자네가 하란 대로 하긴 했지만…… 이게 정말 잘한 짓인지는 모르겠군.”

“그런 것치고는 상당히 즐거운 표정이신데요.”

당군악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했다. 물론 지금이야 이런 생각을 하지만, 조금 전 당가 놈들을 향해 엽전을 날려 댈 때는 속이 다 시원하긴 했다.

“원래 애들은 좀 맞아 가며 크는 거죠.”

“애들이라…….”

당군악이 미묘한 얼굴로 널브러진 이들을 바라본다. 사가에서라면 벌써 가정을 이루고 애를 낳았을 나이들이다. 이런 녀석들을 애라고 할 수 있을까…….

“뭐 우리가 감정을 앞세워 한 것도 아니고, 수련의 일종이지 않소.”

“……그렇긴 합니다.”

맹소의 말에 당군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 감정을 앞세운 건 아니라는 말에는 조금 찔렸지만 말이다.

“다들 잘 들어.”

기절한 이들이 잘 들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청명은 신경 쓰지 않고 소리쳤다.

“내일도 똑같이 수련할 테니까. 엄살 부리지 말고 다들 나와.”

“…….”

“힘이 남아돌아서 풀 데가 없는 모양인데, 내가 아주 제대로 풀게 해 줄 테니까. 이상!”

“…….”

“가죠.”

“그, 그러지.”

“아이고, 속이 시원하다. 낄낄낄낄.”

청명이 각문의 수장들을 대동하고는 연무장에서 멀어져 갔다.

먼지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처박혀 있던 조걸이 그 모습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개새끼.”

모두가 마음속으로나마 그 말에 격렬하게 동의했다.

“정말 괜찮겠는가?”

“뭐가요?”

“다들 지금 한계를 넘은 것 같은데 이런 상황에서 같은 수련을 반복한다는 건…….”

당군악이 걱정하는 건 다른 게 아니다.

청명이 말한 같은 수련은 저들끼리 해 대는 대련을 칭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내일부터는 청명과 다른 문주들, 그리고 장로들이 저들을 몰아붙이는 수련을 하겠다는 의미다.

“무슨 문제라도?”

“……쉴 틈을 줘야 하지 않겠는가.”

“에이. 가주님도 자신감이 과하시네.”

“음?”

“쟤들이 저 상태가 아니면 우리가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요?”

당군악이 살짝 생각에 빠진 듯 말이 없다 안색을 굳혔다.

“쉽지는 않겠지.”

“바짝 털어 놔야 앞으로도 털어 먹기 좋은 거죠.”

“……의도가 좀 불순한 것 같은데.”

청명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그게 핵심이니까요.”

당군악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청명이 피식 웃었다.

“이제 다들 같이하는 이들이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추고 있는지는 파악했을 거예요. 서로 주먹다짐해 가며 바닥까지 봐 버렸으니까.”

“그렇지.”

좀 과하게 봐 버렸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말이다.

“거기까진 뭐, 생각했거든요. 생각보다 좀 과해서 그렇지……. 좀, 음. 네, 좀 많이.”

“아주 많이겠지.”

“……솔직히 저렇게까지 미친놈들일 줄은 몰랐어요. 화산이야 그렇다 쳐도 당가는 왜 그런데요?”

“근묵자흑이라는 말을 들어 보았는가?”

“하기야 당가가 좀 시커멓긴 하지.”

말을 잃은 당군악이 떨떠름한 얼굴로 돌아보자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튼 거기까진 가야죠. 원래 사람이란 어설픈 예의 속에서는 서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잖아요.”

“하지만 악감정만 남지 않았는가?”

“그러니까 이어질 수련이 필요한 거죠.”

“응?”

청명이 씨익 웃었다.

“사람이 진짜 동료가 필요할 때가 언제인 줄 아세요?”

“……글쎄.”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은 없는데, 나 혼자서는 어찌할 수 없는 적이 눈앞에 있을 때.”

청명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때는 정말 누구라도 간절해지죠. 그게 어제 주먹다짐을 했던 놈이건, 평소에 원수처럼 여기던 놈이건 간에, 그렇게 반갑고 고마울 수가 없거든요.”

당군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경험한 적이 없지만 이해할 수는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매화도에 갇혀 있었던 남궁세가가 화산에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만 생각해 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가?

그 이후로 남궁세가는 화산을 세상에 둘도 없는 은인으로 여기고 있다.

“그렇게 되면 알아서 뭉치게 되어 있어요.”

“……그 말인즉…….”

청명의 말을 이해한 당군악이 살짝 눈을 가늘게 떴다.

“사람이 뭉치는 데는 공공의 적이 필요하다는 말이로군.”

“네. 어찌해 볼 엄두도 나지 않는…… 강대한 적이요.”

청명이 슬쩍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처음 마교가 나타났을 때, 중원은 말 그대로 사분오열이 되어 있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교와 전쟁을 치르는 초기에도 엉망진창이긴 마찬가지였다.

굳이 이유를 찾을 필요도 없다. 당대의 강호인들에게는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알 수도 없는 미친놈들보다는 그동안 서로 으르렁대던 옆집 놈들이 더 껄끄러웠던 것이다.

화산이 전장에서도 종남과는 자리를 같이하지 못했던 것도 그래서이지 않았던가.

하지만 전쟁이 이어지고, 마교가 가진 힘의 크기를 실감할수록, 그리고 무엇보다 천마라는 놈이 어떤 놈인지 이해할수록 서로 간의 관계는 어느 정도 봉합되었다.

전장이 아닌 곳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전장의 선두에 선 이들은 의심 없이 자신의 등을 원수 같은 문파의 문도들에게 내맡겼다.

동료 의식이란 그렇게 생겨나는 것이다.

‘뭐…… 그랬던 놈들은 십만대산의 정상에서 싸그리 뒈져 버렸지만.’

아마 그 후대의 강호가 개판이 되고 화산이 박살이 난 건 이 영향도 컸을 것이다. 단 일 할의 생존자라도 남겼다면, 그들은 강호의 영웅이 되었을 것이고, 훗날의 강호를 이끌었을 텐데.

그 결사대의 참가하지 못한 겁쟁이와 무능한 놈들만 살아남아 강호를 이끌게 된 게 모든 사태의 원인이겠지.

어쨌든 결론은, 사분오열되어 있던 강호를 겉으로나마 한곳으로 뭉치게 만들어 준 게 다름 아닌 천마의 존재였다는 의미다.

“이번에도 결국 그렇게 되기는 하겠죠. 장일소가 있고, 천마 그 새끼도 돌아올지 모르니까.”

“음.”

“하지만 그때 뭉쳐 보려 하면 늦어요. 그때는 지금처럼 얻어맞는 게 아니라 목숨으로 대가를 치르게 될 테니까.”

강호가 한뜻으로 움직이기까지 얼마나 숱한 희생을 치르고,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던가?

“미리 경험해야죠. 아군의 밑바닥을 보는 것도, 강대한 적을 상대로 싸워 보는 것도, 으르렁대고 싸우던 이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상황도.”

“…….”

“직접 겪는 것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어요?”

청명이 고개를 돌려 당군악과 맹소를 바라보았다. 맹소가 청명이 입을 열기 전에 선수를 쳤다.

“하려면 제대로 하라는 거로군. 나중에 가서 궁도들을 잃고 후회하지 말고 말이야.”

“예.”

청명이 씨익 웃었다.

“뭐…… 원망이야 좀 듣겠지만, 원망을 듣는 게 애들이 죽어 나가는 걸 보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그런 의도에서 꺼낸 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말은 더없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당군악과 맹소를 찔렀다.

청명의 말대로, 한 문파의 문주가 가장 우선시해야 할 일은 문도들을 지키는 것이다. 원망을 들을까 겁내고, 권위가 추락할까 발을 빼는 게 아니다. 욕을 먹고, 문도들이 들고일어나는 꼴을 보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을 살길로 이끌어야 한다.

그래. 응당 그래야 했다.

하지만 이때까지 당군악과 맹소는 그러지 못했다. 그저 자신들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그건 화산만 가능한 일이라고 발을 뺐을 뿐이다.

“……이쪽이었군.”

“무슨 말씀이신지.”

의뭉스레 딴청을 부리는 청명을 보며 당군악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저 아이들에게 화가 난 줄 알았더니.’

실제 청명의 분노가 향했던 곳은 각 문의 문주들이었던 모양이다. 오늘 저 아이들을 두들겨 팬 것은, 저들의 방종에 대한 징죄이기도 하겠으나 결국은 상황을 이렇게까지 방조한 각 문주들에 대한 경고기도 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네.”

당군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당가 역시 변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앞으로 그들이 겪어야 할 일들을 생각하면 이대로는 살아남기 어려울 테니까. 하지만 머릿속에 그렸던 그 변화의 대상에서 어느새 그 자신을 빼고 있었던 모양이다.

청명이 당가의 아이들을 잘 이끌 수 있다면 당가 역시 달라지리라 믿었다.

‘그럴 리가 없지.’

윗물이 맑지 않은데, 어찌 아랫물이 맑아지겠는가? 생각해 보면 너무도 당연한 것을.

“부끄럽군.”

“영문 모를 소리만 하시네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어깨를 으쓱하는 청명을 보며 당군악은 쓰게 웃었다. 맹소 역시 당군악과 생각이 같은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녹림왕과 남궁 소가주를 저들과 같이 취급한 건 벌이 아니었군.’

그들은 굳이 따로 채찍질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미 다른 이들과 섞여 달라지려 노력하고 있었으니까.

그 의미를 이해하고 나자 그 모습을 보며 웃어 댔던 자신이 얼마나 한심했는지 실감이 났다. 새삼 얼굴이 화끈거렸다.

바뀌려고 노력하기에 같은 대접을 받는 이를, 스스로 정체되어 있기에 함께하지 못하는 이가 비웃었으니 얼마나 꼴사나웠을까?

오늘 얻어맞은 것은 아이들이지만, 실제로 벌을 받은 것은 당군악과 맹소였다.

“크흠.”

크게 헛기침을 한 당군악이 결심을 굳히고 청명을 바라보았다.

“……자네 말대로라면 우리가 더없이 강대한 적이 되어 주어야겠군. 조금 악감정이 쌓이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네.”

“자기들끼리 싸우는 것보다는 그게 낫겠지.”

당군악과 맹소가 이해한 듯 말하니 청명이 씨익 웃었다.

“할 거면 확실하게 부탁드릴게요.”

“알겠네.”

“맡겨 두게나.”

고개를 끄덕이며 당군악은 새삼스레 한 가지를 느꼈다.

‘결국 이 모든 수련은 모두가 한마음이 되는 데 있었던 게 아니로군.’

반목하고, 싸우고, 사소한 이견으로 으르렁댄다. 그리고 더없이 강대한 적을 맞이하여, 어제까지 싸우던 이들과 힘을 합쳐 대항한다.

이건 언젠가 그들이 저 마교를 상대로 겪어야 할 일이다. 청명은 바로 이 장원에서 훗날 천우맹이 겪게 될 아픔을 훨씬 온건한 방식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그 귀찮고 번거롭고 속 타는 과정을 굳이 겪게 한 이유는 너무도 명확했다.

청명의 모든 행동 원리는 하나다. 화산의 제자들을 단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 내는 것. 이제는 그 살려야 할 대상이 화산뿐만이 아니게 된 것이다.

그저 말뿐이 아니라, 진심으로.

“……내가 자네를 조금 오해했군.”

“네?”

“부끄럽지만 나는 정말 자네가 열받아서 아이들을 두들겨 팬 건 줄 알았네. 다 생각이 있는 건 줄도 모르고.”

“…….”

“이제 보니 오늘 저 아이들을 혼낸 것도 다 자네의 계획대로…….”

당군악이 말을 하다 문득 멈추었다.

청명이 눈을 뒤룩뒤룩 굴리며 시선을 피했기 때문이다.

“……자네?”

“하……. 하핫! 그럼요! 원래 오늘이었죠! 다 생각이 있었다니까요!”

“…….”

“아이고오, 이게 들키네. 쑥스럽게.”

몸을 획 돌려 멀어지는 청명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당군악은 이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못 말리겠군.”

고개를 내저은 그가 어깨를 쫙 폈다.

청명의 의도는 이해했다. 그럼 이제 그가 해야 할 일도 명확하다.

“그럼 한동안은 마귀 가주가 되어 볼까.”

의욕을 한껏 드러낸 당군악이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뼈마디 두둑이는 소리가 영문을 모르고 있을 천우맹도들의 미래를 말해 주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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