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0화. 여기가 지옥이오, 여기가. (5)
청명의 난동은 현영은 물론이고, 현종까지 나선 뒤에야 진압되었다. 구석에서 동아줄에 칭칭 묶인 채 쓰러진 청명을 보고 있자니, 문주들의 뒷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현종이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모두를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들 통제가 안 되는 겁니까?”
“…….”
“대련 중에 싸우는 건 이해하기로 했으니 넘어갈 일입니다. 하지만 평소에도 서로 싸움박질해 대는 건 문제가 크지 않습니까?”
다들 그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현종은 그 반응이 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면 각 문주님들께서 상황을 정리해 주셔야지요. 왜 자꾸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겁니까?”
“크흠.”
문주들이 다들 말없이 딴청을 피웠다.
“속 시원하게 말씀들을 좀 해 보십시오.”
“아니. 그게…….”
“크흠…….”
현종이 재촉했음에도 문주들은 그저 헛기침만 연발할 뿐이었다. 현종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자 결국 당군악이 쓴웃음을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이건 이해의 차이에서 벌어진 문제 같습니다만…….”
“이해의 차이라고 하셨습니까?”
여기서 서로 이해가 다를 게 뭐가 있단 말인가?
“맹주님께서는 저희가 마음만 먹으면 저들을 통제하는 것이 손쉬울 거라고 생각하시지만…… 사실 저희의 권위는 맹주님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강하지 않습니다.”
“……예?”
그 말을 들은 현종이 멍한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이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남궁이나 당가쯤 되는 곳이 권위가 약하다니요. 이게 무슨 말입니까? 제가 아는 명문세가나 새외오궁은 문주의 권위가 더없이 강한 것으로 알고 있소만.”
당군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게 문제입니다.”
“예?”
“……그 권위에 대한 인식이 문제라는 것이지요. 세상에서 가장 권위가 강한 이가 누구입니까?”
“그야…… 황제 폐하시지요.”
“그 황제조차도 백성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잖습니까?”
현종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말이야 맞는 말이니까.
천하에서 가장 강대한 권위를 가진 황제조차도 백성들의 심기를 살피고, 그들에게 환심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물론 저희의 힘으로도 한두 번은 그냥 찍어누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만이 쌓였는데 풀어 주지는 못하고 같은 일이 되풀이되면 결국은 권위가 약해질 수밖에 없지요.”
“아, 아니, 그게 대체…….”
현종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다른 문주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다른 문주들 역시 그 말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현종이 다시 묻자 당군악이 한숨을 푹 내쉰다.
“이래서 말씀드리기 곤란했던 겁니다. 맹주님께서 이해하실 만한 일이 아니지요.”
현종은 잠깐 침묵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저 몰아치기에는 조금 민감한 부분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제자들에게 싸움박질하지 말라고 명하는 것조차 껄끄럽다고 하시는 건…….”
“장문인.”
“예.”
“당가 가주의 권위가 강하겠습니까? 소림 방장의 권위가 강하겠습니까?”
“그야…….”
현종이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당군악에게는 조금 듣기 좋지 않은 말이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당가의 가주와 소림의 방장을 비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소림의 방장은 단순한 소림의 우두머리가 아니라 강호의 대표격으로 인정받는 직위가 아니던가?
당연히 그 문파 내에서의 권위도 강할 수밖에 없다.
“일전에 들으셨겠지요? 소림의 제자들이 법정의 명에 반발한 끝에 이탈하여 본산으로 돌아갔다는 말 말입니다.”
“……듣긴 하였습니다만.”
그거참 쌤통이라 생각……. 아니, 그…… 소림에도 생각이 있는 이들이 좀 있구나 했었지.
“생각해 보십시오, 장문인. 막말로 강호에서 가장 막강한 권위를 가진 소림의 방장조차도 그런 일을 당합니다. 몇 번의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다고 제자들이 항명하고 본산으로 돌아가 버리지 않습니까?”
“…….”
“그런 판에, 저희가 뭐 그리 대단할 게 있다고 손짓 하나로 제자들을 부리겠습니까?”
현종의 입이 슬그머니 벌어졌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인 것도 같고……. 아니, 그래도 말이 안 되는 것도 같고.
혼란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현종을 보며 당군악이 쓰게 웃었다.
“그러니 맹주님……. 아니, 장문인께서는 이해하기 어려우실 거라 말씀드린 겁니다.”
“……어째서입니까?”
“이유야 간단하지요. 장문인과 저희가 처한 입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화산은 강호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장문인의 권위가 강한 문파이니까요.”
“화산이요?”
“예.”
“화산?”
“……예.”
“화산이요?”
현종이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냐?’ 하고 묻는 듯한 표정을 짓자 문주들이 다들 쓰게 웃었다.
물론 현종이 듣기에는 이상한 소리일지도 모른다. 확실히 현종은 다른 문주들과 달리 제자들과 마치 친구처럼 지내고 있으니까. 그렇기에 때때로 화산의 제자들은 현종을 상대로 다른 문파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언행을 내질러 버리고는 한다.
하지만 친근한 것과 그 권위가 강한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당군악이 보기에 화산은 장문인의 권위가 상상을 초월하는 문파다.
만약 각 문의 문주가 전혀 승산이 없어 보이는 전선에 제자들을 투입하는 상황이 벌어진다고 해 보자. 명분도 없고 실리도 없어 보이는 싸움에 말이다.
그럼 과연 당가인들이 당군악의 말에 따라 제 목숨을 기꺼이 내던질 것인가?
글쎄. 당군악은 회의적이었다.
아마 그 순간만큼은 당군악의 명보다 자신의 목숨을 우선시하게 될 것이다. 당군악이 가진 힘은 명분과 직위에서 나오는 것이지 가주에 대한 믿음과 신뢰에서 나오는 게 아니니까.
모르긴 몰라도 이곳에 있는 다른 문주들의 생각 역시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화산은, 화산만은 아니다.
화산의 제자들은 현종의 명이라면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목숨을 걸고 달려들 이가 못해도 반수는 넘을 것이다.
‘그게 권위라는 거지.’
권위란 그런 것이다. 평소 아무리 목을 빳빳하게 쳐들어도, 결정적인 순간에 발휘되지 못하는 것은 결국 권위가 아니다.
현종은 무척 이해하기 힘들어하면서도 일단은 어떻게든 고개를 끄덕였다.
“끄응. 그러니까…… 제자들이 반발할까 싶어 쉽사리 제지할 수 없다는 것이로군요.”
“음. 조금 부끄러운 이야깁니다만.”
“부끄럽긴 뭐가 부끄럽습니까?”
그 순간 임소병이 ‘이래서 정파 놈들이란.’ 하고 말하는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댁들이야 그래도 욕이나 먹는 수준에서 끝나고 뚱한 눈길이나 받는 거지. 우리는 수틀리면 자는데 칼이 날아온다고요, 칼이!”
“…….”
“그리고 댁들이야 무위도 가장 센 편이니 애들이 들고 일어나도 어떻게 제압 가능하겠지만, 나 같은 놈은 순식간에 송장 되는 겁니다! 송장.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이미 반은 송장 같은데?”
“……그래도 완전 송장보다는 반만 송장인 게 낫지.”
임소병이 투덜거렸다. 그리고 심드렁하게 말을 이었다.
“애초에 손가락질 하나로 문도들이 싫어하는 일을 시키는 게 가능한 문파는 천하에 두 곳밖에 없단 말입니다. 하나는 화산이고, 다른 하나는…….”
“소림인가?”
“예? 소림은 얼어 죽을. 사패련입니다, 사패련! 굳이 하나 더 끼자면 마교겠죠.”
듣고 있던 현종의 얼굴이 굉장히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 듣기에 따라서는 화산이 사패련이나 마교 같은 곳이라는 소리로 들리기도…….”
“솔직히 뭐 그리 다른 것도 없잖습니까? 다들 장문인이 명령만 했다 하면 눈에 핏발을 세우고, 강 위든, 강남이든 생각도 않고 달려드는데. 그게 어디 제정신 박힌 인간들이 할 짓입니까? 정상이 아니지요.”
현종은 침묵했다. 뭔가 굉장히 억울한데 말로 반박하기가 굉장히 힘들었다. 이런 기분은 예전에 청명이 놈이 궤변을 늘어놓던 때 이후로 참 오랜만이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임소병에게 다시 물었다.
“그래서 그…… 결론은, 문주님들도 막기가 어렵다는 겁니까?”
“막으려고 해도, 좀 식을 만하면 누가 불씨에다 기름을 붓는데 그걸 무슨 수로 막겠습니까? 어설프게 건드렸다가는 다 타는 거죠.”
“심지어 불씨를 가져온 본인도 탔습니다.”
“저기 아주 바짝 탔네.”
문주들이 구석에 묶여 있는 청명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들이 보기에 저건 제 몸에 기름을 끼얹은 채 불을 지르고는 아프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대는 짓거리였다.
“그럼 대체 이걸 어떻게…….”
그때, 한이명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는 솔직히 이런 회의를 왜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애초에 문파가 서로 쉽사리 섞일 수 있는 것이었다면 뭐 하러 각 문의 이름을 나누고 의복으로 제자들을 구분하겠습니까? 아무런 의미도 없는 합동 훈련, 그것도 대련을 빙자한 패싸움을 왜 하고 있는 겁니까?”
모두가 허망한 눈으로 한이명을 바라보았다.
‘우리도 그게 의문이지.’
‘언제는 이해하고 했나. 그냥 하라니까 했지.’
‘저 양반 먼 데서 오더니 영 상황 파악이 안 되는군.’
다른 문주들의 표정을 채 읽지 못한 한이명이 역정을 내듯 말했다.
“여러 문주님들이 계신 곳에서 감히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냥 이 훈련을 중단하고, 각 문파의 처소를 분리해 버리면 끝날 문제 아닙…….”
“으라차아아아아아!”
그 순간 청명이 제 몸에 칭칭 감긴 동아줄을 단숨에 끊어 내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뭐? 분리해?”
“…….”
“어디서 약한 소리를 하고 있어요!”
문주들이 다들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태로 인해서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청명이다. 하지만 지금 청명은 제가 편히 갈 수 있는 길을 죽어도 거부하고 있다.
저 대쪽 같은 면이야말로 화산을 여기까지 이끈 화산검협의 원동…….
“그럼 내가 지는 거잖아! 빌어먹을!”
……력이 아니었네. 어……. 그냥 성격이 나쁜 거네.
“끄응. 화산검협.”
당군악이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자네의 마음은 알겠지만, 지금 상황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네. 겨우 진정되던 상황이 야수궁과 빙궁이 끼어들면서 완전히 뒤틀려 버리지 않았는가? 의욕은 알겠지만 때로는 과한 의욕이 독이 될 때도 있네. 우선은 조금 진정시키고…….”
“진정이요?”
“…….”
“누가? 쟤들? 아니면 제가요?”
“어…….”
원래는 쟤들을 진정시켜야 한다고 말하려 했는데…… 보아하니 자네가 좀 진정해야 할 것도 같고…….
“어. 무슨 말인지 알았어요.”
“으응?”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는 안 된다 이거죠?”
“…….”
“그…….”
맞는데……. 맞기는 한데……. 아무래도 자네가 내 말을 전혀 다른 식으로 이해한 것 같은…….
“이해했어. 맞아요. 내가 물렀죠.”
청명이 두 눈이 광기로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그럼 진짜 제대로 해야지.”
“……뭘 하려고?”
“뭘 할 것 같은데요?”
“…….”
“진짜 알고 싶어요?”
아니. 정말 알고 싶지 않군. 당군악이 학을 뗐다.
청명이 실성한 사람처럼 낄낄대며 웃기 시작했다.
“내가 정신이 나갔었지. 대체 내가 언제부터 참고 살았다고! 이게 아닌데!”
“…….”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저것들 정말 완벽하게 단합시켜 줄 테니까!”
“…….”
문주들의 등골에 식은땀이 배어나기 시작했다. 뭔가, 못 볼 꼴을 보게 될 것 같은 예감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스멀스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