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9화. 여기가 지옥이오, 여기가. (4)
“아니이이이이!”
임시 장문인 처소에서 목청껏 내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소 앞을 지나던 이들이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또 시작이네.”
“하여튼 청명이 저놈은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다니까.”
“저것도 재주다. 재주야.”
웃음과 우려가 섞인 시선이 잠깐 처소 쪽으로 쏟아졌지만, 그뿐이었다. 놀란 이는 없었다. 이건 화산에서는, 그리고 화산이 머무는 곳에서는 항상 벌어지는 일상이니까.
“이게 말이나 되는! 어?”
터져 나오는 고함에 쓴웃음을 지으며 발걸음을 재촉하려던 이 중 하나가 갑자기 멈칫하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잠깐. 이거 청명이 맞나?”
“응? 그게 뭔 소리야? 청명이가 아니면 누구라고.”
“목소리가 다른 것 같은데?”
“목소리?”
그 말을 들은 이들이 현종의 처소를 다시 바라보았다. 귀를 기울일 필요도 없이 어마어마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내가 승질이 뻗쳐서! 어? 내가!”
“…….”
순간 모두의 얼굴이 요상해졌다.
“그렇지?”
“그러네. 이, 이거 청명이 목소리 아닌데?”
“그럼 누군데?”
“자, 장문인 목소리 아냐?”
“어?”
모두가 화들짝 놀라 멍하니 처소 쪽을 바라보았다.
“말을 좀 해 보십시오, 말을!”
“크흠.”
“으음.”
“끄응.”
현종의 앞에 모여든 이들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당군악도, 맹소도, 임소병도, 남궁도위도, 그리고 어쩐 일인지 설소백을 대신해 자리한 한이명조차도 현종과 시선을 감히 마주치지 못했다.
“애들이 치고받고 싸우고, 난장을 부리면!”
“…….”
“문파의 수장 되는 사람들이 말려야지! 그걸 구경만 하고 있습니까!”
“……그, 음…… 맹주님.”
맹소가 머쓱한 웃음을 흘렸다.
“그건 화산검협이 하기로 한 일이라…….”
“말씀 잘하셨습니다!”
“예?”
“저기 안 보입니까? 저기?”
눈을 반쯤 까뒤집은 현종이 격하게 옆으로 손가락질했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그새 시체처럼 퀭해진 청명이 벽에 기댄 채 늘어져 있었다.
‘저, 저게 뭔……. 열흘은 굶었나?’
‘눈 밑 음영이 어떻게 턱까지 내려왔지?’
‘저러다 죽는 거 아닌가?’
“저게 사람 몰골입니까, 저게? 주교를 때려잡고 왔을 때도 낄낄대며 두 발로 걸어 들어왔던 놈입니다! 그런데 지금 애 몰골이 어찌 되었는지를 보시란 말입니다!”
“…….”
“남의 집 귀한 아들내미를 저 꼴로 만들어 놔? 이 인간들이 보자보자 하니까!”
“지, 진정하십시오, 장문인.”
팔을 걷어붙이는 현종을, 현영이 식은땀 흘려 가며 말렸다.
“뭘 진정해!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이 기묘하기 짝이 없는 상황을 보며 백천이 입을 쩍 벌렸다.
‘살고 볼 일이다. 이런 모습을 볼 날이 올 줄이야.’
현종이 청명이 놈 편을 들며 역정을 내고, 그 역정을 현영이 말리는 상황이라니. 세상이 거꾸로 뒤집히지 않고서야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현종은 붙들고 늘어지는 현영을 밀어 냈다. 그리고 눈을 희번덕대며 당군악을 노려보았다.
“말씀을 좀 해 보십시오, 당가주님!”
“크, 크흠.”
“대련에서 독을 쓰는 건 이해합니다! 그런데! 대련도 아니고 시비가 붙었다고 독을 써요? 지금 화산이랑 한번 해보자는 겁니까?”
“그…… 그 부분은 제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독은 절독도 아닌 데다가 이미 해약을 드렸…….”
“아아. 사람을 패 놓고 치료해 주면 그만이다?”
“그런 말은 아닙니다만…….”
당군악이 할 말이 없는지 슬쩍 도로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아니, 설마 대련도 아니고 식당에서 싸움박질하다가 독을 풀어 버릴 줄 그라고 알았겠는가?
다른 문파와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사생결단이 나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당한 이들이 화산이다 보니 이 정도로 넘어가는 거지.
“그리고, 야수궁주님!”
“예, 맹주님.”
“대체 짐승들 관리를 어떻게 했길래 민가에 들어가서 난장을 부립니까, 대체!”
“아하하하핫!”
맹소가 별일 아니라는 듯 껄껄 웃었다.
“그러니 짐승 아니겠습니까? 그걸 지킬 줄 알면 사람이지요.”
하지만 현종은 그런 너스레로 넘어가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두 눈에 핏발을 세운 현종이 대놓고 맹소를 노려보았다.
“지금 웃음이 나오십니까?”
맹소가 슬쩍 시선을 내리깔았다.
“말 참 잘하셨습니다! 짐승이 그런 것들인 줄 아시면 관리를 해야 할 것 아닙니까, 관리를! 궁도들은 대체 뭐 하느라고 짐승들이 날뛰는 걸 보고만 있었던 겁니까?”
“그건 드릴 말씀이…….”
“그놈들이 민가에 들어가서 사람들이 먹을 곡식을 모조리 먹고, 양민들이 키우던 가축들을 다 잡아먹었습니다. 청명이 놈이 항의를 받다가 고막이 나갔어요! 고막이!”
“멀쩡한 것 같은데…….”
“뭐요?”
“아, 아닙니다.”
맹소가 그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어깨를 움츠렸다. 온화한 사람이 화가 나면 더 무섭다더니 지금이 딱 그 짝이었다.
“그리고!”
귀화를 내뿜는 현종의 시선이 이번엔 임소병에게로 꽂혔다. 하지만 그 순간 임소병이 먼저 선수를 쳤다.
“잠시만요!”
“……음?”
그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부채를 쫙 펼쳤다.
“저희를 타박하시려는 모양입니다만, 따져 보면 이건 저희가 억울한 일 아닙니까?”
“지금 억울이라 하셨소?”
“예! 이번에는 저 당가 놈들이 먼저 시비를 걸었단 말입니다. 아무리 저희가 천한 사파 새끼들이지만, 시비 걸고 먼저 침 날려 대는 놈들이 잘못한 것 아닙니까! 그럼 때리는데 맞고만 있습니까!”
“그게…….”
현종이 순간 말문이 막힌 듯 멈칫하자 임소병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몰아붙였다.
“맹주님도 그러시는 것 아닙니다. 저희 손 씻고 깨끗하게 살기로 한 놈들 아닙니까! 그럼 온정으로 보듬어 주셔야지, 자꾸 이렇게 당가와 차별을 하시면…….”
“그게 아니라!”
“……예?”
“관청에서 사람이 왔다 갔습니다!”
“……관청이요?”
임소병이 이건 무슨 뜬금없는 말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만만하게 활짝 펼쳐졌던 그의 부채가 살짝 아래로 처졌다.
현종이 대놓고 못마땅한 티를 팍팍 내며 말을 이어 갔다.
“예. 최근 구강 뒷골목의 도박장에서 패싸움이 벌어졌다고 하던데, 거기서 도박을 하던 이들이 도박장의 사람들을 모조리 패 버리고 금고까지 털어 달아났다고 합니다.”
“……아, 아니!”
임소병의 세상 억울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거랑 저희가 뭔 상관입니까?”
“……오른쪽 가슴에 나무 모양이 새겨진 녹색 옷을 입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와, 그걸 입고 가네. 미친놈들이…….”
쾅!
현종이 다탁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
“양민들을 돕겠다고 와 놓고는 도박을 해? 도박을? 그리고! 도박을 한 건 좋다 이겁니다! 왜 멀쩡한 도박장을 텁니까! 왜!”
임소병이 겸연쩍은 미소를 흘렸다.
“그…… 아니, 저희가 죄 없는 양민을 턴 것도 아니고. 도박장을 운영하는 놈들이면 양민들 피 빨아먹는 거머리 같은 놈들인데, 그런 놈들은 좀 털어도…….”
“그럼 돈을 나눠 줬어야지! 그 돈이 다 양민들에게서 나온 건데! 그 돈은 어쨌습니까?”
“……찾아보겠습니다.”
“에라!”
현종이 손을 들어 올리자 임소병이 뭐가 날아오는 줄 알고 몸을 획 숙였다. 그러더니 이내 멋쩍게 고개를 들어 올린다.
현종이 내리친 건 제 가슴이었다. 속이 타 죽겠다는 듯 쾅쾅 치는 손길에 한이 맺혀 있었다.
“빙궁!”
“죄, 죄송합니다.”
이미 반쯤 쫄아 버린 한이명은 빙궁이라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아니, 왜 궁주님이 안 오시고?”
“……사정이 조금…….”
“끄응.”
현종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다시 한이명을 노려보았다.
“다른 곳은 다 그렇다 칩시다. 대련 중이 아니면 싸우지 말라고 그렇게 부탁을 했다는데, 어떻게 빙궁까지 싸움박질을 할 수 있습니까? 앞에서는 그렇게 말을 들어줄 것처럼 하셔 놓고는, 심지어 빙궁이 먼저 야수궁을 공격했다고 들었습니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그, 그게 사연이 있습니다.”
“무슨 사연이요?”
한이명이 땀을 뻘뻘 흘리며 답했다.
“사실 저희 궁주님께서는 청명 도장의 부탁대로 사적인 싸움이 벌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어제도 야수궁과 빙궁 사이에 시비가 붙었다는 말을 듣자마자 달려가 상황을 중재하셨지요.”
“궁주님이 말리셨다고요?”
“예! 아시잖습니까. 저희 궁주님이 어디 화산검협의 부탁을 어길 사람입니까? 당연히 말렸지요!”
“……그런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저는 분명 빙궁이 먼저 야수궁을 공격했다고 들었는데.”
“그, 그게…… 저희 궁주님께서는 ‘청명 도장이 싸우지 말라고 하셨다.’라고 말씀하시며 양쪽을 말리셨습니다. 한데 생각 없는 야수궁도 하나가 궁주님 앞에서 ‘그 도사 놈이 뭐라 지껄였든 내가 알게 뭐냐?’라는 말을 해 버리는 바람에…….”
“……바람에?”
한이명이 눈을 질끈 감았다.
“뭐……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도사 놈이라는 말에 눈이 돌아가 버린 저희 궁주님께서 그 말을 한 야수궁도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냅다 패 버리셔서…….”
그 말을 들은 오검이 박수를 쳐 댔다.
“크으. 우리 소백이 다 컸네.”
“심지어 야수궁도를 팼네. 이야, 실력이 엄청 늘었나 보…….”
“닥쳐라, 이놈들!”
현종의 호통이 떨어지자 오검이 찔끔 어깨를 움츠렸다. 길게 숨을 내쉬며 간신히 화를 조금 누른 현종이 물었다.
“그래서 여기에 안 오신 겁니까?”
“아, 아니요. 그게, 너무 날뛰다가 많이 맞기도 하셔서 앓아누우셨습니다.”
“구, 궁주를 패?”
현종이 눈을 끔뻑이며 맹소를 바라보자 맹소가 어색하게 눈을 굴리며 콧잔등을 긁어 댔다.
“워낙 어려서 궁주인 줄 몰랐다고…….”
“전에 봤잖습니까?”
“그…… 잠깐 본 거라…….”
잘도 못 알아봤겠다. 저 미친 야수궁 놈들.
“그래서? 어쨌든 한 문파도 빠짐없이 다들 싸움박질하셨다?”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그 와중에 짐승들은 민가를 털어 대고, 짐승들이 안 들어간 뒷골목은 산적들이 털어 대고?”
“크흠.”
“에헤엠…….”
“사패련의 본단이 여기에 있어도 이 난리는 안 나겠다! 야, 이…….”
“에헤이! 장문인! 장문인!”
“체통! 체통을 지키셔야 합니다!”
현상과 현영이 양쪽에서 현종의 입을 황급히 틀어막았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짓이지만 차마 천우맹주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오게 둘 수는 없었다.
현종을 말리면서 현영이 대신 매섭게 입을 열었다.
“얼마나 난장을 피워 댔으면 청명이가 넋이 나갑니까! 내 살다 살다 저놈이 앓아눕는 모습은 처음 봤습니다! 대체 생각들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모두가 슬쩍 고개를 돌려 청명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을 놓아 버린 듯한 그 모습을 보니 미묘한 죄책감이 일어 다들 쓰게 입맛을 다셨다.
“빨리 사과하지 못하시겠습니까?”
“크, 크흠. 미안하네, 화산검협.”
“죄송합니다, 도장.”
“……미안하게 됐수다.”
그 사과를 들은 청명이 배실배실 웃어 댔다. 다 죽어 가는 얼굴로 환하게 웃는 모습이 뭔가 섬뜩한 느낌을 주었지만, 그래도 웃음은 웃음…….
“그냥 다 죽어, 이 새끼들아!”
“으아! 청명아!”
“참아라, 청명아!”
“문주님들이시다! 이 미친놈아!”
청명이 돌연 눈을 까뒤집고 날뛰기 시작하자, 기다리던 오검이 즉시 달려들어 찍어 눌렀다.
“놔! 문주? 문주는 얼어 뒈질! 저것들이 뭔 문주야!”
“지, 진정하라니까!”
청명은 급기야 입에 거품을 물고 발작해 댔다.
“나 안 해! 나 안 해, 이 새끼들아! 천우맹이고 나발이고 그냥 내가 다 할 거야! 안 해애애애애애애!”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린 이의 처절한 비명이 장원에 구슬프게…… 참으로 구슬프게도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