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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128화 (1,129/1,567)

1128화. 여기가 지옥이오, 여기가. (3)

깊은 새벽.

웬만한 전각은 모두 깜깜해진 시각이지만, 사패련의 군사 독심나찰 호가명의 처소는 여전히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커다란 책상에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던 호가명이 뻑뻑한 눈을 문지르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쉽지 않군.’

그 역시 무인이다. 웬만한 일 따위는 그에게 피로감을 주기 어렵다. 하지만 벌써 열흘 가까이 이어진 철야는 무인인 그마저도 지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아직 갈 길은 멀고, 쉬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한 번씩은 너무 과한 걸 바라신다니까.”

그가 나직이 볼멘소리를 했다.

장일소의 뜻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리고 그 뜻이 더없이 합당하다는 것도 이제는 완벽히 이해한다.

문제는 장일소가 술잔을 기울이다가 ‘이렇게 하면 되겠군.’ 하고 툭 던져 버린 그 원대한 목표를 현실에 맞게 구현해 내는 게 다름 아닌 호가명의 역할이라는 점이다.

말이야 쉽지.

당장 이번에 거의 일천에 가까운 이들을 처형하면서 사패련 내에 어마어마한 인적 공백이 발생했다. 조무래기들이야 죽든 말든 상관없다. 하지만 이번에 처형될 이들 중 각 문파의 핵심에 가까운 이들도 여럿 존재한다는 건 큰일이었다.

그들이 사라지면서 생긴 행정적 공백을 최소화하고, 새로운 인물을 적당한 자리에 임명해야 한다. 동시에, 그동안 각 문파에서 비효율적이고 방만하게 운영되던 것들을 모조리 찾아내 효율적으로 재정비해야 한다.

그뿐일까. 흑귀보와 만인방, 수로채로 제각각 나뉘어 있던 세력들을 하나로 통일하고 조정해야 한다.

이건 문파 하나를 새로 만드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지독한 일이었다.

과거 만인방 때에도 호가명의 업무량을 본 이들은 혀를 내두르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만인방이 아니라 몇 배는 커진 사패련을 과거의 만인방처럼 효율화하면서, 동시에 장일소가 벌이는 기행들의 뒷감당을 해야 한다.

이게 어디 사람이 할 짓이겠는가? 황궁의 유능한 대신들을 데려다 놓아도 며칠 버티지 못해 달아나고 남았으리라.

그러나 호가명은 군말 없이 그 모든 일들을 묵묵히 감내했다.

만약 청명이 이런 사실을 알았다면, 과거 따위는 다 잊고 일 좀 같이 해 보자고 눈물을 뿌리며 호가명에게 매달렸을지도 모른다.

막말로 화산에서 청명과 현영, 현상과 운암, 심지어 은하상단이 대신 해 주는 일까지 호가명이 모조리 도맡아 하는 셈이니 말이다.

어쨌든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적당히 손짓으로 지시를 내린 장일소가 깊은 잠에 빠져든 이 깊은 새벽까지도 호가명은 홀로 남아 업무를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패련은 장일소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곳인 동시에, 호가명이 없으면 움직이지 못하는 곳이었다.

‘보자.’

호가명이 손을 뻗어 조금 전 하오문에서 들어온 보고서를 제 앞으로 끌어다 놓았다.

체제를 정비하는 와중에도 정보를 놓쳐서는 안 된다. 정보란 가장 귀한 것. 그리고 장일소에게 올라가는 정보는 그중에서도 더욱 중요하다.

다른 이들에게 맡길 수 없는 이런 정보를 먼저 받아 분류하고, 핵심만을 장일소에게 올리는 것도 호가명이 맡은 업무 중 하나였다.

“야수궁에 빙궁이라…….”

게다가 지금 올라온 보고는 다름 아닌 저 천우맹에 관한 일이다. 최근 천우맹의 동태와 관련된 정보는 사패련 내에서도 특상으로 분류된다.

“이놈들을 모조리 불러다 대체 뭘 하려는 거지?”

호가명이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이건 영 효율적이지 않은 짓이다. 당장 전쟁이 일어날 것도 아니잖은가? 그런데 저 많은 인원을 장강으로 불러 버리면 그들을 먹이고 재우는 데만 해도 막대한 금전이 들어간다.

더구나 서로 다른 성향을 지닌 이들을 한데 모아 놓으면 필연적으로 갈등과 사고가 발생한다. 지금 사패련 역시 그 문제에 허덕이며 무수한 피를 흘리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저질러서 분쟁을 유발한다? 이건 누가 봐도 어리석은 짓이다.

“빌어먹을…….”

호가명의 입에서 허탈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럼에도 이 정보를 멍청한 짓거리쯤으로 치부하고 넘겨 버릴 수 없는 이유는 하나. 이 일을 벌이고 있는 이가 그 청명이기 때문이다.

‘화산검협.’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화산검협은 호가명의 머리로 감당할 수 없는 이였다.

물론 호가명은 안다. 자신이 책사로서는 그리 뛰어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물론 평범한 이가 보기엔 호가명 역시 굉장히 뛰어난 군사일지 모르나, 천하를 제 마음대로 뒤틀어 놓는 괴물들의 전장에서는 호가명조차 평범하다 못해 우둔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만큼이나 저들이 겨루는 전장은 범인이 발을 들일 수 없는 영역인 것이다.

호가명은 관자놀이를 습관적으로 꾹꾹 눌렀다.

‘딱히 그 사실이 억울했던 적은 없지만.’

그의 강점이 발휘되는 부분은 따로 있으니까.

그의 가치는 계책이 아니라, 행정력과 운영 능력, 그리고 장일소의 말을 어떻게든 실현해 내는 실행력에 있다. 천하에는 수많은 이들이 있지만, 저 장일소를 만족시킬 만한 일 처리를 보여 줄 수 있는 사람은 호가명 하나밖에 없을 테니까.

호가명은 그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럴 때만은…… 저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싸움의 뒷면을 바라볼 능력이 없다는 게 답답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이럴 때만은 말이다.

“……짜증 나는군.”

호가명이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들고 있던 보고서를 좌측으로 옮겼다. 좌측에 놓인 건 그의 선에서 처리할 수 없기에 장일소에게 올려야 하는 보고서들이었다.

최근 들어, 특히 항주의 마화를 겪은 이후로 천우맹에 관련된 보고서들이 좌측으로 옮겨지는 일이 잦아졌다.

‘그만큼이나…… 인상적이었던 거겠지.’

호가명의 두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냉정하게 말해 항주의 마화를 해결한 것은, 특히 저 마교의 주교를 죽인 것은 장일소나 사패련이 아니라 바로 그 화산검협이다.

그날 그가 보여 주었던 모습과 그가 실행했던 계책은 호가명의 뇌리에 지워지지 않을 화인을 남겼다.

호가명은 냉정한 사람이고, 그건 자기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결코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머리로는 청명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럼에도 이해가 가지 않는군.’

저항의 기미를 보인 이들은 남겨 놓지 말고 참하라는 장일소의 무리한 명령을 호가명이 군말 없이 이행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지금 저들 모두를 받아들여 교화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전쟁은 그리 멀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상처가 곪기 전에 차라리 상처 부위를 도려내 버리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반면에 천우맹은 어떤가? 지금 청명이 하는 행위는 몸 이곳저곳에 스스로 상처를 더 새기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짓이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설마 문제가 커지기 전에 선제공격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호가명이 피식 웃어 버렸다. 지나가는 생각으로라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이유는 있다. 반드시 이유는 있다. 하지만 그 이유는 내가 짐작하기 어려운 것이라…….”

호가명이 나직이 쿡쿡대며 웃었다.

그는 사람이다. 사람은 괴물과 괴물이 서로 싸우는 이유나 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 그저 수박 겉을 핥듯 짐작하는 게 전부다.

장일소와 청명의 싸움은 호가명에게 있어서 그런 종류의 일이었다. 그는 그저 자신이 장일소에게 누가 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장일소가 그 큰 뜻을 이뤄 내길 바랄 뿐이다.

“잡생각이 길었군.”

미련 없이 손에 쥔 보고서를 옆쪽으로 던져 놓은 호가명이 새로운 보고서를 잡았다. 날이 밝기 전에 처리해야 할 일들을 시간 내에 끝내려면 잡생각조차 사치다.

하지만 마음이 급함에도 그의 생각은 선뜻 새로 들어 올린 보고서로 향하지 못했다.

‘화산검협…….’

최근에는 그를 떠올리면 가슴이 갑갑해져 왔다.

그 화산검협이라는 자는……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놀랍도록 장일소와 닮아 있었다. 완전히 다르면서도 닮은 존재. 그 말은 곧 화산검협이 그만큼 대단한 이라는 의미였다.

‘감당할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호가명의 입에서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어쨌거나 저들의 행위에는 반드시 의도가 있을 것이고, 그 의도는 화산검협의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일 터.

‘하지만 마지막에 옳은 것은 우리가 될 것이다, 화산검협.’

강북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준 호가명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리고 이내 다시 서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장일소와 자신의 의지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한시도 쉴 틈이 없었다.

* * *

그 호가명이 해석하려 애쓰며 경계하는 청명의 처소.

마찬가지로 커다란 책상에 앉은 청명이 푸석푸석한 얼굴을 벅벅 쓸고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그때 문이 다급하게 벌컥 열렸다.

“청명아아아아아아!”

청명이 영혼 반쯤 빠져나간 얼굴로 뛰쳐 들어온 이를 바라보았다. 백천의 얼굴을 확인한 청명이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또…….”

“또 싸움 났다!”

“…….”

“당가랑 남궁이 싸운다!”

“……왜?”

아니, 그건 또 무슨 조합이냐고.

“몰라! 밥 먹다 말고 갑자기 툭탁대더니 싸우던데?”

“……적당히 말려.”

“칼 뽑았는데?”

“…….”

“어떻게 좀 해 봐라! 건물 다 날아가게 생겼다.”

“그…….”

청명이 뭔가 말하려는 순간, 백천을 밀치며 조걸이 안으로 고개를 불쑥 들이밀었다.

“청명아! 녹림이랑 우리 애들이랑 싸움 났는데?”

“……그럼 말려.”

“아니, 사숙들도 같이 싸우고 있어서 내가 말린다고 안 들어! ……어? 백천 사숙! 왜 여기 계십니까?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 사숙들 말려야 합니다.”

“네가 해라! 나 지금 남궁이랑 당가 말려야 해!”

“아니, 그것들은 남이잖아요! 우리 애들이 녹림 애들을 쥐 잡듯이 패고 있다니까?”

“우리 애들이 패는 거면 상관없잖아. 맞는 것도 아니고.”

“어?”

조걸이 아차 하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듣고 보니 그러네? 나 왜 뛰어왔지?”

“…….”

반쯤 남아 있던 청명의 영혼이 또다시 절반쯤 빠져나갔다.

그게 왜 괜찮은 건데. 이 미친 놈들아.

하지만 그의 고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혀어어어어엉!”

조걸의 옆으로 얼굴을 들이민 당소소를 보며 청명이 멍하게 중얼거렸다.

“……왜? 빙궁이랑 야수궁이랑 싸워?”

“아뇨! 사형, 그게 아니라!”

“그럼 뭐?”

“야수궁에서 데려온 짐승들이 창고를 뛰쳐나가서 민가를 덮쳤어요!”

“……그걸 왜 보고만 있어? 잡아 와야지!”

“손이 모자라요! 다른 사형들은 지금 녹림이랑 패싸움한다고.”

“야수궁은?”

“지금 빙궁이랑 싸우고 있어요.”

“어?”

청명이 멍한 눈으로 당소소를 바라보았다.

“안 싸운다며……?”

“그건 제 용건이 아니라는 뜻이었죠. 지들끼리 싸우든 말든 내가 알게 뭐예요.”

“…….”

“싸움박질하느라 정신없어서 밥을 제때 안 주는 바람에 탈출한 모양인데요? 남은 사람들만으로 제압은 어려울 것 같은데, 본보기 삼아 두어 마리 때려잡아도 돼요?”

녹아내린 청명이 의자에 스르륵 늘어졌다.

“야, 이거 어떻게 하냐?”

“지금 싸움이 계속 나는데?”

“야. 쉬게 해 준 게 잘못 같은데? 공식적으로 대련 안 붙이니까 자기들끼리 힘이 남아 싸움질인데?”

귀를 연신 찔러 오는 목소리에 허허 웃어 버린 청명이 천장을 멍하니 보며 중얼거렸다.

“있잖아.”

“응. 어떻게 할까?”

“다…….”

“다?”

“다 뒈졌으면 좋겠다.”

“…….”

“개새끼들아…….”

청명의 눈가를 타고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화합? 화합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아이고, 장문사형.

여기가 지옥이오, 여기가. 아이고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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