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7화. 여기가 지옥이오, 여기가. (2)
“과하다?”
“예.”
호가명이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오늘 처형된 이들만 해도 조무래기라고는 부를 수 없는 이들입니다. 다들 흑귀보와 수로채에서 나름 요직에 앉았던 이들이 아닙니까.”
“그래?”
장일소는 그런 것에는 딱히 관심이 없다는 듯 심드렁했다.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고는 호가명도 익히 예상은 했다. 하지만 할 말은 해야 하는 게 또 그의 일이었다.
“그런 이들을 이리 쳐 내면…… 결국 전력의 약화를 피할 수 없게 됩니다.”
“흐음.”
장일소는 슬쩍 문 쪽을 바라보더니 뜬금없는 소리를 중얼거렸다.
“천천히 오라고 하긴 했지만, 일단 술을 가져다주고 쉬면 좋겠는데 말이지.”
“……련주님.”
호가명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련주님께서 생각하시는 바를 모르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저희의 상황이 그리 여유롭진 않습니다. 처형될 이들이 가진 힘도 아쉽지만, 더 아쉬운 것은 저들이 없어지면서 생길 행정상의 공백들입니다. 그걸 대체하는 데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릴 겁니다.”
그제야 장일소가 호가명을 똑바로 보았다. 색 옅은 눈동자는 여전히 무심했다. 호가명은 마른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련주님의 뜻을 꺾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저…… 련주님과 사패련을 위해서 처형할 이들의 수를 조금쯤 줄이시는 게 어떨지 여쭙고자 함입니다.”
“흐음.”
“저들은 이미 공포에 질려 있습니다. 련주님께서 자비를 베푸신다면 감히 다시는 련주님께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입니다.”
“가명아, 가명아.”
“예, 련주님.”
“항상 느끼는 것인데 말이다.”
“예.”
장일소가 묘한 웃음을 지으며 호가명을 바라보았다.
“너는 사파가 어울리지 않는 것 같구나.”
“……예?”
그 어처구니없는 말에 호가명이 눈을 크게 떴다. 독심나찰 호가명이 사파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을 듣는다면 사람들이 뭐라 반응하겠는가?
천하의 장일소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에 반박하기 어려울 뿐, 다른 이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면 누구라도 듣자마자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어찌…….”
“그렇잖으냐.”
장일소가 쿡쿡대며 웃었다.
“사파라는 놈이 자비를 베풀라는 말을 하질 않나, 그럼 다시는 대항하지 못할 거란 말을 하질 않나.”
“하지만 그건…….”
“알고 있단다.”
장일소가 한숨처럼 피식 웃고는 말했다.
“한번 무서운 게 뭔지 봤으니, 앞으로는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할 거란 생각이겠지.”
“예, 저는…….”
“그런데 말이다.”
말허리를 뚝 끊은 장일소가 두 눈을 차게 빛냈다.
“사람이라는 건 네 생각처럼 현명하지 않단다. 대부분은 한번 교훈을 얻으면 그 교훈을 되새기는 게 아니라, 얼마 지나지 않아 잊어버리지.”
“…….”
“그리고는 제 좋은 쪽으로 생각해 버린단다. 장일소 그놈에게 대항했던 놈들도 결국은 풀려나고 살아났으니, 한 번쯤 더 해봐도 되지 않을까?”
호가명이 입술을 꾹 닫았다.
“그래. 인간이란 그런 것이지. 특히나 사파라는 족속들은 말이야.”
장일소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신물이 나는 듯했다.
“인간은 은혜를 쉽사리 잊어버리고, 원한은 결코 잊지 않지. 하지만 원한보다 더 잊지 못하는 것도 있단다. 그게 뭔 줄 아느냐?”
“…….”
“바로 두려움이지.”
장일소의 두 눈이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뼛속 깊이 각인된 공포. 저항하는 것만으로도 죽는 게 나은 꼴이 될 거라는 공포. 나는 절대 저자를 이길 수 없다는 공포.”
“…….”
“사람을 움직이는 건 바로 그런 극심한 공포란다.”
“련주님.”
호가명이 장일소를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묻는 게 의미가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이건 그저 장일소에 대한 그의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수하들은 믿지 않으십니까?”
“재미있는 말을 하는구나.”
장일소가 낄낄대며 웃었다.
“세상에 믿을 놈들이 따로 있지. 저런 버러지 같은 놈들을 믿는단 말이냐? 저놈들을 믿느니 차라리 저 정파 놈들을 믿겠다. 적어도 그들은 변덕스럽지는 않거든. 소처럼 우직하지.”
호가명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온다. 저 대답이 새삼스럽지도 않게 느껴져서 오히려 속이 답답했다.
“하지만, 련주님. 저는 저들에게 온정을 베풀라 고언 드린 것이 아닙니다. 저런 버러지 같은 놈들도 필요하면 써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물론 그 말도 맞다. 사람 같은 놈들만 남겨 두었다가는 이 사패련에 남는 이는 오로지 너밖에 없겠지.”
장일소가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떠냐? 예전처럼 다시 둘이서 해 볼 테냐? 가진 것 없고 지독했던 그 시절처럼?”
장일소의 입에서 예전 이야기가 나오니 호가명의 입가에 보기 드문 미소가 걸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리 나쁠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돌아갈 수는 없겠지요.”
“그래, 그렇구나. 아쉬운 일이야. 가명아, 우리는 너무 멀리 와 버렸으니까.”
“하지만 그게 련주님께서 바라시던 바 아닙니까?”
“물론이지.”
장일소는 회한에 빠져들지 않는다. 과거를 그리워하지 않는다. 그의 시선이 향해 있는 곳은 언제나 과거가 아닌 내일이고, 이곳이 아닌 더 높은 곳이다.
괴이한 일이다.
장일소는 수많은 것을 손에 넣었다. 한때는 꿈처럼…… 아니, 차라리 망상처럼 느껴지던 수많은 것들은 현실로 이루어 냈고 강제로 짓밟아 제 발아래로 밀어 넣었다.
하지만 장일소의 삶은 과거와 딱히 다를 것이 없다.
보잘것없는 낭인에서 만인방의 방주가 되고, 이윽고 사패련의 련주가 되었음에도 장일소에게 달라진 부분이라고는 기거하는 방이 조금 더 화려해진 것과 마시는 술이 조금 더 비싸진 것뿐이다. 이런 건 굳이 사패련의 련주씩이나 되지 않아도 얼마든지 이룰 수 있었던 것들이다.
그럼에도 장일소는 모든 것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고 있었다. 마치 욕망 그 자체를 탐하는 아귀처럼.
“그러니 저런 이들이라도 활용할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녹슨 칼일지언정 없는 것보다는 나은 법이지요.”
장일소는 흰 술잔을 눈높이에 두고 가만히 보다 말했다.
“가명아.”
“예, 련주님.”
“세력이라는 것은 칼과도 같지 않니.”
“……칼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그렇지. 너는 명검을 만들 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좋은 철을 쓰는 것이지요.”
“그래, 맞다.”
“하지만 가진 것이 잡철밖에 없다면, 그 잡철이라도 활용하는 것이 기본이 아닙니까?”
“물론이지. 그런데 놀랍게도 명검을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재료를 따지는 것이 아니야.”
“하면?”
“욕심을 내지 않는 것이지.”
“…….”
호가명이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장일소가 하는 말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게 검을 만들 한 덩이의 한철과 여분의 한철이 조금쯤 더 있다고 하자꾸나. 그걸로 검을 만들려면 어찌 해야겠느냐?”
“그야…….”
호가명이 지극히 상식적으로 대답했다.
“한 덩이의 한철로 검신을 만들고, 남은 한철로 손잡이를 만들겠습니다. 그게 아니면 검집에 섞든가…….”
“그래, 그렇겠지.”
장일소 역시 그 말이 틀리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뒤이어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호가명의 예상과 다소 달랐다.
“그러면 검을 망치게 된단다.”
“……예?”
장일소가 재미있다는 듯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손잡이까지 한철이 들어가게 되면 검의 무게가 달라진다. 이상적인 무게에서 벗어나게 돼. 검을 보호하는 용도인 검집에 한철을 섞으면 필요 이상으로 단단해지게 된다. 그럼 날이 상하고 말지.”
“…….”
“가장 좋은 방법은 한 덩이의 한철로 검을 만들고 남의 여분은 버리는 거란다. 뭐, 팔아먹어도 괜찮겠고.”
장일소가 술병을 거꾸로 뒤집었다. 떨어지는 한 방울의 술을 보며 눈살을 찌푸린 그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것들은 대부분 그 여분의 한철을 버리지 못한단다. 네 말처럼 검집에 쓰거나 손잡이에 쓰는 이들은 그나마 낫지. 그런데 대부분은 어떻게 하는 줄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검신에 가진 한철을 모조리 넣어 버린단다.”
“…….”
“그건 값만 비쌀 뿐, 싸구려 철검보다 못한 쓰레기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걸 대단한 명검인 양 휘둘러 대지. 그 검을 쓰는 게 본신의 실력을 깎아 먹는다는 걸 모르고. 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지.”
호가명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저들이 여분의 철입니까?”
“그래, 아는구나.”
장일소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욕심이란 그래. 별 쓸모가 없고, 있어 봐야 팔아먹기도 어렵다는 것을 알면 곧장 버려야 한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지. 그런 철이라도 언젠가는 쓸 수 있을 것 같으니까.”
“…….”
“세력이란 건 여분의 철처럼 품 안에 지닌 채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나를 휘두르게 되는 것이지. 이해하겠느냐?”
“련주님.”
“나는 나를 무디게 만들 여분 따위는 필요 없다. 세력이란 명검처럼 내 손에 완벽하게 맞아떨어져야 해. 불순물이 덕지덕지 섞여 제대로 날도 제대로 안 선 검을 쥐고 흔드는 건 광대나 하는 짓이다. 비대하기만 하고 제멋대로 움직여 대는 것들은…… 목을 베든, 불을 지르든 해서 모조리 없애야 한단다.”
장일소의 입가에 문득 장난스럽고도 요사스런 미소가 맺혔다.
“그 와중에 남을 이들에게는 좋은 교훈 하나를 주고 가는 셈이니, 더없이 비싼 값을 받아 내는 게 되겠지. 그렇지 않더냐?”
호가명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적은 더없이 강대하다. 그렇기에 호가명은 어떻게든 사패련을 좀 더 키우려 했다. 하지만 장일소는 생각이 그와 다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장일소의 뜻을 따라야 한다. 이 세력을 움직이는 이는 그가 아니라 바로 장일소니까.
“가명아.”
“예, 련주님.”
“앞으로 우리가 겪어야 할 전쟁은 지금까지와는 양상이 다를 것이다. 하나가 아닌 적을 여러 곳에서 상대해야 하겠지.”
“…….”
“그럴 때마다 저 멍청한 것들이 제 마음대로 움직여 댄다면 이길 수 있는 전쟁에서도 패할 수밖에 없다.”
호가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 역시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니 우선은 저들은 사람이 아닌 개로 만들어야지. 짖으라면 짖고, 꼬리 치라면 꼬리 치는 개로 말이다. 개가 되지 않으려는 것들은 사람으로 죽게 해 주면 될 일. 그게…… 진짜 자비라는 거란다. 알겠니?”
“……저들이 정말 련주님의 개가 될 수 있겠습니까?”
장일소의 얼굴에 귀기가 어렸다.
“그럼. 따르지 않는 것들을 모조리 쳐 죽이고, 내 명을 따르지 않는 것이 적의 손에 죽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인간은 사라진다.”
“…….”
“오래 걸리겠지. 귀찮은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마무리만 된다면…….”
장일소의 두 눈이 천장을 응시했다. 아니, 천장을 넘어 존재할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해야 옳을 것이다.
“비로소 나는 천하를 손에 쥘 자격을 얻게 되겠지.”
호가명의 손이 살짝 떨렸다. 장일소가 저런 말을 입에 담았던 적이 과거에 있었던가?
“그러하시다면 그저 따르겠습니다.”
그렇다면 해야 한다. 사패련이 아닌 강남 전체를 피로 물들이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그래.”
장일소의 두 눈에 가열한 욕망이 들어찼다. 덩달아 호가명의 가슴도 뜨겁게 들끓었다.
그때 장일소가 무언가 떠오른 듯 아, 하며 말했다.
“그 전에, 가서 술 좀 가져오너라.”
“…….”
“시비를 바꿔야겠어…….”
“…….”
호가명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