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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126화 (1,127/1,567)

1126화. 여기가 지옥이오, 여기가. (1)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아니, 숨을 쉬기가 무섭다.

넓다는 표현보다 광활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은 거대한 광장에 수많은 이들이 도열해 있다.

괴이한 것은, 한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은 기운을 가진 이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하얗게 질려 있다는 것이었다. 눈에 띄게 덜덜 떨리는 손에는 위협적인 기다란 창이 잡혀 있었다.

물론 누구나 살다 보면 공포에 떠는 일이 종종 생긴다. 그럼에도 이 광경을 당연하게 여길 수 없는 이유는, 아이처럼 떨고 있는 이들이 그 이름만으로도 강남을 공포로 몰아넣는다는 사패련의 마두들이기 때문이었다.

“려, 련주님! 제, 제발! 제발 살려…….”

파아아아앗!

하늘 위로 치솟았던 도가 맹렬하게 떨어져 사람의 목을 쳐 냈다. 단숨에 베어진 목이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털썩.

짚단처럼 쓰러진 몸뚱이에서 붉은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 나온다.

그 광경을 본 이들의 얼굴이 더욱 창백하게 질려 갔다.

모두 사파에 적을 둔 이들이다. 당연히 사람이 죽는 모습 따위는 수도 없이 봐 왔다. 이제 와 누군가 죽는 것을 본다 해서 딱히 감흥이랄 게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지금껏 그들이 봐 오던 ‘죽음’과는 명백히 그 결이 달랐다.

“다음.”

호가명의 싸늘한 음성과 함께 아직 채 온기가 식지도 않은 시신이 썩은 나무처럼 질질 끌려 나간다. 그리고 그 자리로 또 다른 이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끌려왔다.

공포로 완전히 질려 버린 이의 눈엔 핏발이 가득 서 있었다. 처절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발작처럼 터져 나왔다.

“려, 련주! 련주님! 저는 아닙니다! 저는 련주님께 저항하는 머저리가 아닙니다! 련주님! 믿어 주십시오, 제발! 제바아아아아알!”

그 울부짖음은 차마 듣고 있기 버거울 정도였다.

아마 지금 끌려오고 있는 이 역시 그 손으로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 온 악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조차도 자신의 죽음에 대면하는 순간엔 평범한 이들과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

“련주니이이이이임!”

드넓은 광장으로 끌려온 그는 벌벌 떨리는 고개를 들어 대전 앞을 바라보았다.

“흐……. 흐으…….”

그 순간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절로 새어 나왔다. 겁에 질린 모습이 그가 쌓아 올린 명성과 직위와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누구도 그 초라한 모습을 두고 힐난하지 못했다. 어느 누구라 해도 지금 이 광경을 보면 그와 똑같이 반응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사패련이 만들어진 뒤 새로 지어진 본단. 그 본단의 중앙은 장일소의 취향을 한껏 반영하여 고급스러운 백색 대리석이 드넓게 깔려 있었다.

햇살이 내리쬐면 마치 눈이 온 것처럼 빛나는 광장의 모습은 그 자체로 사패련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 눈부신 대리석은 지금 온통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곳에서 죽어 간 이들이 흘린 피가 흐르고 또 흘렀다.

이런 광경 앞에 누가 평정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으으…….”

지독한 피비린내가 코를 찔러 왔다. 사내의 바지춤이 순식간에 축축이 젖어 들었다.

“려, 련주님! 련주님 살려 주십시오! 살려만 주신다면 무엇이든!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다 모함입니다! 저는 단 한 번도 련주님께 대항한 적이 없습니다! 제발! 제발 살려 주십시오! 련주니이이이임!”

고함인지 비명인지 모를 절규를 짜낸 그가 절박한 눈으로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붉게 물든 땅을 넘어 광장과 이어진 드높은 계단으로 향했다.

아래쪽이 완전히 피로 물들어 있는 것에 반해, 계단 위쪽으로 갈수록 점차 흰빛이 드러났다. 그리하여 마침내 계단의 정상은 신성하리만치 희게 빛나고 있었다.

그 극명한 대비가 지금 이곳에 끌려온 그와 저 높은 계단 정상에 위치한 이의 차이를 말해 주는 것만 같았다.

계단 꼭대기에 놓인 화려하고 거대한 옥좌, 그리고 그곳에 비스듬히 앉은 한 사내가 보였다.

“려, 련주…….”

화려한 용이 금실로 수놓인 붉은 장포. 그 아래로 드러난 새하얀 손이 옆에 놓인 술잔을 가볍게 잡았다.

“흐음.”

술잔을 들어 올린 사내, 장일소가 나른한 눈빛으로 절규하는 이를 내려다보았다.

“려, 련주님!”

절벽 아래서 마지막 동아줄을 본 이처럼 사내가 소리쳤다. 하지만 장일소는 곧 흥미를 잃은 듯 옥좌의 등받이에 한껏 등을 기대며 뒤로 늘어졌다.

그 대신 입을 연 것은 다름 아닌 호가명이었다.

“처형해라.”

싸늘한 목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에 반응하며 살짝 움찔한 이들이 곧장 움직였다. 그리고 절규하는 이를 질질 끌고 가 형대에 대고 짓눌렀다.

“히…… 히이이이익!”

파아아앗!

단숨에 내리쳐진 서슬 퍼런 도가 사내의 목을 단숨에 잘라 냈다. 솟구친 머리가 사방으로 피를 뿌리고는 허망하게 바닥을 굴렀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들은 가까스로 마른침을 삼켰다.

방금 목이 잘린 이의 이름은 조표(趙慓). 흑귀보의 대주 중 하나로, 복건에서는 악귀와도 같은 명성을 날리던 이다.

하지만 그런 이가 제대로 저항조차 해 보지 못하고, 벌레처럼 목이 잘려 나갔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누가 이런 광경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이곳에 있는 이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이다. 사파에 몸을 담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어느 들판의 전장에서 파리 꼬인 시체가 되는 운명을 각오했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한 자신의 마지막 모습 중 이런 광경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죄인처럼 끌려와 저항도 해 보지 못하고 목이 잘려 나가는 마지막을 상상하는 이는 없는 게 당연했다.

죽음이라 해서 다 같은 죽음이 아니다.

이 가치 없는 죽음의 향연은, 들판에서 거름이 되기를 각오한 이들마저 공포에 떨게 하기에 충분했다.

“지루하군.”

그리고, 이 기묘한 분위기가 감도는 공간에서 공포와 관련이 없는 이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장일소가 술잔에 든 미주를 살짝 들이켜고는 입을 열었다.

“몇이나 남았지?”

“금일 예정되어 있는 이는 총 삼백하고도 예순둘. 조금 전 조표가 일백일흔여덟 번째입니다.”

“반이나 남았군.”

장일소가 한숨을 쉬며 옥좌에 등을 기댔다.

“지루하시면 남은 처형은 제가 마무리하겠습니다.”

“아니, 아니야.”

호가명의 말에, 장일소는 미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한때는 한솥밥을 먹던 이들인데, 마지막 가는 모습 정도는 지켜봐 주는 게 예의 아니겠니? 나도 그 정도 배려는 있는 사람이란다.”

“…….”

“그리고…….”

장일소가 천천히 고개를 내려 광장을 가득 채운 이들을 바라보았다. 공포에 질린 모습들을 확인한 장일소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본디 이런 행사에는 윗사람이 함께해 줘야지. 그래야 더욱 뜻깊어지지 않겠니?”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호가명이 슬쩍 장일소의 안색을 살피고는 물었다.

“하면 처형을 조금 빨리 하는 것은…….”

“쯧쯧쯧. 가명아.”

“예, 련주님.”

“버러지처럼 산 놈들이고, 살려 놓기 어려운 죄인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사람 아니더냐?”

“…….”

“귀찮다고 빨리 죽이는 것은 도리가 아니란다. 예정대로 시행하거라.”

“예, 련주님.”

호가명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글쎄. 잘 모르겠다.

오늘 내로 처형이 예정된 이들의 운명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 역시 자신이 오늘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느긋하게 처형을 이어 가는 것은 얼핏 그들이 살아 숨 쉴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려 주는 걸로 보인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자면 절망 속에서 죽음만을 기다리며 공포에 떨 시간을 늘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가엾군.’

호가명은 딱히 누군가에게 연민을 가지는 이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차례만을 기다리며 두려움에 떨고 있을 이들에게만은 동정을 금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뿐, 사실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감히 패군께 불온한 마음을 먹은 순간부터 그들의 운명은 정해져 있는 것이었으니까.

“처형을 계속하라.”

“예!”

호가명의 외침에 집행을 맡은 이들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또 다른 죄인이 끌려 나왔다.

장일소는 그 광경을 무심하게 내려다보며 술잔을 들어 올렸다.

“좋은 광경이로군.”

하나의 목숨이 사라지고, 한 잔의 술이 다시 비워진다.

하나의 목숨, 그리고 또 하나의 목숨.

피와 피로 이어진 처형은 해가 서산에 걸려 온 세상을 노을로 물들일 때까지 계속되었다.

오늘따라 유독 붉은 노을빛이 장일소가 자리한 곳의 새하얀 대리석마저 핏빛으로 물들였다.

* * *

“흐음.”

새하얀 침의를 걸친 장일소가 술잔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 점 흔들림 없이 고요한 잔 속을 보고 있으니 살짝 들떴던 마음이 가라앉는 듯했다.

고개를 든 장일소의 시선이 침상 옆에 선 시비에게로 향했다.

문득 장일소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저런. 왜 그리 떨고 있느냐?”

“려, 련주님…….”

가뜩이나 새하얗게 질려 있던 시비의 얼굴이 이젠 거의 파래졌다.

“몸이 좋지 않으냐? 어서 가서 쉬려무나.”

“아, 아닙니다, 련주님! 제가 어찌 감히…….”

“쯧쯧.”

장일소는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조금 전 계단 아래의 무사들을 바라보던 것과는 달리 그 시선이 퍽 부드러웠다.

“그럼 가서 조금 더 독한 술로 내어 오거라. 몸에 밴 피비린내가 심해 주향이 느껴지지 않는구나.”

“그, 그리하겠습니다.”

“급할 것 없다. 천천히 다녀오거라.”

“예.”

시비가 새하얗게 질린 채 황급히 밖으로 달려 나가자 장일소가 쿡쿡대며 웃었다.

“저 아이들은 왜 저리 나를 무서워하는지 모르겠구나.”

사실 그리 의문을 가질 법은 했다.

천한 시비들쯤이야 쉽사리 죽여 대거나 괴롭히는 폭군들이 수두룩하지 않은가. 하지만 장일소는 무학을 익히지 않은 시비를 단 한 번도 죽여 본 적이 없다. 그 몸을 탐한 적도 없고, 변덕을 부려 괴롭힌 적도 없다. 되레 시비들이 일을 그만두게 되면 큰돈을 내어 주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여전히 공포에 젖어 있으니 참 재미있는 일이었다.

“천한 것들이 무엇을 알겠습니까? 그저 바라보기 어려울 뿐이겠지요.”

“쯧쯧. 또 그러는구나.”

장일소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천한 것이 아니다. 제 맡은 일 잘하고 있는 아이들을 왜 자꾸 천하다고 그러느냐.”

“…….”

“천하다는 말은 저런 아이들에게 쓰는 말이 아니란다. 주제에 맞지도 않는 일을 해 대고, 분수에 넘치는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돼지 같은 놈들에게나 쓸 말이지.”

“명심하겠습니다.”

“말로만 그러지 말고 이해를 좀 하려무나, 가명아.”

장일소가 핀잔을 주었다. 그러나 호가명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그런 그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련주님.”

“말하렴.”

“……내일도 처형을 계속할 생각이십니까?”

“아직 이틀 정도 남지 않았니?”

“예정은 그렇습니다.”

“그럼 그래야지. 끙. 종일 앉아 있으려니 나도 답답하긴 하다마는……. 련주라는 자리가 이런 거겠지.”

“손실이 너무 과합니다, 련주님.”

그 말을 들은 장일소가 문득 짙은 미소를 흘렸다.

흔들리는 등불에 비친 얼굴이 더없이 요사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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