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5화. 친구가 부르면 당연히 와야지. (5)
화기애애(?)하기 짝이 없는 화산, 빙궁과는 달리 야수궁도들의 분위기는 그리 좋지 못했다.
결국 북해빙궁주라는 권위를 무시할 수 없어 물러나기는 했지만, 냉정하게 봐서 그들의 아들뻘에 불과한 이에게 밀린 것이니 기분이 좋을 리가 만무했다.
게다가 저 청년이 그들에게 보이는 태도와 화산에 보이는 태도가 너무도 다르다는 것 역시 그들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보기에 따라서는 이 모든 행동이 남만야수궁을 무시하는 행위로 비칠 여지가 충분했던 것이다.
새외오궁이라는 명칭으로 한데 엮여 있다고 해서 빙궁과 야수궁 사이에 서로 얼마나 유대관계가 있었겠는가? 그들을 한데 엮어 주는 요소는 오직 중원인들에게서 받는 차별적인 취급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천우맹이 그런 문제들을 어느 정도 해결해 버리자, 지금껏 드러나지 않았던 서로의 문화적 차이가 수면 위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말이 좀 심하지 않나?”
“조금 전에 우리더러 적이라고 한 것 같은데?”
“죄도 없는 짐승을 필요도 없는 가죽 때문에 죽이는 놈들이 선인일 수 있겠는가? 상종 못 할 자들이지.”
“최악이군.”
야수궁도들이 저들끼리 작게 의견을 교환했다. 빙궁에 대한 적대감은 점점 높아져만 갔다.
“아직 나이도 어리면서 너무 건방지기도 하고.”
“말이 빙궁주지. 야수궁이었으면 소궁주도 되지 못할 나이이거늘.”
“능력도 부족해 보이고.”
“마음에 안 드는군.”
특히나 그들이 꼴사납게 여기는 부분은 아무리 봐도 빙궁주가 그리 강해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가 보여 주는 기세가 그 나이에 비해서는 훌륭하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빙궁주보다는 그 뒤에 서 있는 이들이 좀 더 강해 보인다.
강자가 우두머리가 되는 것이 자연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이치다. 아직 연륜도, 힘도 갖추지 못한 이가 신분 하나만으로 윗자리를 떡하고 차지하고 앉은 것이 그들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감투 하나 썼다고 하늘 높은 줄은 모르는군.”
그 순간 그들의 귓가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뭐라고 지껄였나?”
“음?”
왁자지껄 떠들어 대는 화산과는 달리, 뒤쪽에서 조용히 상황을 주시하던 빙궁도들에게는 그들이 나눈 대화가 들린 모양이었다. 선두에 선 빙궁도 중 몇몇이 차가운 눈빛을 쏘아 대며 야수궁도들을 향해 다가왔다.
“지금 뭐라고 지껄였냐고 했다.”
“……근데 이놈들이, 우리가 만만한가?”
“옷도 제대로 걸칠 줄 모르는 야만인 놈들이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는군. 뭐? 능력이 부족해?”
그리고 당연하게도 야수궁의 시선 역시 빙궁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야수궁이 약육강식의 법칙을 따른다면 빙궁은 대자연과 싸우는 곳이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현명한 자가 살아남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
그리고 설소백은 빙궁의 장로들조차 인정한 궁주다. 빙궁주인 설소백에 대한 부정은 빙궁도들의 삶의 방식을 통째로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지금 야만인이라고 했나?”
두 집단 사이에 살기가 치밀어 올랐다.
이전 천우맹의 개파식까지만 해도 서로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아니, 오히려 좋은 쪽에 속했던 두 문파지만 지금은 서로 이를 드러내고 있다.
두 무리 사이의 긴장감이 극도로 높아지던 바로 그때.
“거기까지.”
지금껏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야수궁주 맹소가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사태를 정리했다.
야수궁주가 나서자마자 야수궁도들이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빙궁도들 역시 마음에 들지는 않는 눈치였지만, 별수 없이 뒤로 물러났다. 지금 그들이 맹소의 말을 무시해 버린다면, 조금 전 설소백을 압박했던 야수궁도들의 행위에 면죄부를 주는 거나 마찬가지란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흠.”
맹소가 제 수하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번에는 너희가 잘못했다. 빙궁주께 사과드려라.”
“구, 궁주님! 저희는…….”
“그만.”
맹소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중원인들이 우리더러 뭐라 하더냐?”
“…….”
“예의를 모르고, 살아가는 법을 모르는 야만스러운 이들이라 하지 않더냐? 그럴 때마다 너희가 뭐라 했느냐?”
“…….”
“대답해라.”
야수궁도 하나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그들 역시 운남의 끝이나, 남만에 들어와 살게 되면 저희처럼 살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사람의 삶이란 어디에서 살아가느냐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시선을 그토록 불쾌해하던 너희가 빙궁을 상대로 똑같은 짓을 하고 있구나. 이해해 볼 생각 없이 그저 제 기준에 맞춰 비난만 하는군.”
“…….”
“조금만 더 무례했다면 내가 직접 네놈들의 허리를 분질러 놨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사과할 대상은 내가 아니겠지.”
그 말에 야수궁도들이 설소백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빙궁주님.”
“저희가 무례했습니다.”
설소백이 슬쩍 야수궁도들을 보았다. 예전이었으면 바로 그 사과를 받아들였을 설소백이건만, 이번만은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그가 기분이 나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북해가 무시당했다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도 사과하지, 빙궁주. 이해해 주게.”
“아, 아닙니다. 궁주님. 당연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도 맹소가 직접 고개를 살짝 숙이자 눈 녹듯 녹았다. 야수궁주 정도 되는 이가 타인에게 고개를 숙인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설소백 역시 잘 알기 때문이었다.
설소백이 무안한 듯 제 코를 긁적였다.
“애초에 음…… 저도 조금 예민했습니다.”
“이해하지. 자네 역시 우리와 비슷한 말들을 들어 왔을 테니까.”
설소백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중원과 다르게 살아간다는 이유로 무시당한 건 그들 역시 그리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이런 발언들에 대해 민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중원 놈들이 문제지.”
“그렇긴 합니다.”
“우리끼리 싸울 이유는 없잖은가.”
“예. 궁주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청명이 뚱한 얼굴로 귀를 후볐다.
“중원 놈 앞에서 나눌 말은 아니신 것 같은데.”
“하하하. 자네는 별개지. 자네는 중원과 새외를 가리는 인간이 아니니까.”
“예. 맞습니다. 저도 완전히 동의합니다.”
“……그거 욕이죠?”
“아하하하핫. 그럴 리가 있겠는가? 목숨 아까운 줄 아는 이라면 감히 천하의 화산검협을 욕할 수 있을 리 없지.”
“맞습니다! 누가 감히 도장님을 욕합니까! 제가 직접 북해 호수 밑바닥에 처박아 버리겠습니다.”
장문사형.
나 얘들 싫어……. 불편해…….
청명이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쉬었다. 뭘 어쩌겠는가? 이런 양반들을 모조리 품고 가는 게 그가 제 손으로 선택한 길인 것을.
“그럼 이제 뭘 할까요?”
“응?”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저희는 준비가 됐습니다.”
다가오는 설소백이 부담스러워진 청명이 식은땀을 흘리며 뒤로 한 발 물러났다.
“그…… 의욕은 좋은데, 먼 길 오느라 고생했으니 일단은 여독부터 푸는 게 좋지 않을까? 장문인부터 뵈어야겠지?”
“예! 그러겠습니다!”
설소백이 과히 부담스러울 정도로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재빨리 빙궁도들을 장원 안으로 통솔하기 시작했다.
“선물 수레가 안 상하게 조심하고!”
“예!”
청명이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 냈다. 곁에 서 있던 맹소가 나직이 말했다.
“……뭔가 이상한 방향으로 자란 것 같군.”
“그, 그렇죠?”
“나쁜 건 아닌 것 같은데……. 하여튼 조금 묘해.”
맹소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청명의 입에서 한숨이 푹푹 새어 나왔다.
어찌어찌 상황이 정리되기는 했지만, 빙궁도들과 야수궁도들은 물러서는 그 순간까지도 앙금이 사라지질 않아 서로를 향해 좋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청명이 작게 혀를 찼다. 그리고 이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뭐가 말인가?”
“궁주님께서도 기분이 좋지는 않으셨을 텐데.”
맹소가 피식 웃었다.
“기분 나쁠 게 뭐가 있나?”
물론 말은 이렇게 하지만, 기분이 좋았을 리 없다. 애초에 야수궁도들의 사고방식과 맹소의 사고방식이 크게 다를 순 없으니까. 궁도들이 언짢게 여기는 것은 맹소 역시 언짢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아니, 어쩌면 일반적인 궁도들보다 더 기분이 나빴을지도 모른다. 맹소는 다름 아닌 야수궁의 궁주이니까.
하지만 그는 그런 기분을 꾹 참고 제 궁도들을 먼저 나무랐다.
같은 새외오궁의 궁주라고는 하지만, 아직 자신과는 비교조차 불가능한 이가 설소백이다. 힘과 권위로 찍어누르려 했다면 어려울 것도 없었을 텐데, 먼저 사과하고 고개를 숙여 준 것이다. 그렇기에 청명도 드물게 감사하다는 말을 입에 담았다.
“자네가 하는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예?”
“자네처럼 폭급한 사람도 제 성질을 죽여 가며 참고 있지 않은가?”
“아니……. 제가 생각하시는 것처럼 성격이 더럽지는…….”
“예전의 자네였다면 궁도들이 서로 날을 세우는 순간, 생각할 것도 없이 둘 다 패 버렸겠지.”
어? 듣고 보니…….
“그런데 내가 나서 화를 내는 것도 우스운 일 아닌가.”
“…….”
“그보다…… 생각보다 쉽지 않겠군.”
“뭐가요?”
맹소가 뭘 뻔히 알면서 다시 묻느냐는 듯 청명을 빤히 보았다.
“일이 터질 때마다 나나 설 궁주가 매번 달려가 중재를 할 수는 없는 일일세. 그게 가능했다면, 과거 자네가 운남에 왔을 때 내가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겠지.”
“……하긴.”
“궁도들은 강자를 인정하고 숭상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참기만 해야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네. 특히나 자신들이 납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참아 내기를 어려워하지.”
“워낙 자유분방하니까요.”
맹소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설마 마주치자마자 이런 문제가 발생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도움이 되기 위해 왔는데 골치 썩힐 일만 넘겨준 것 같아서 괜히 미안한 기분이었다.
“문제가 조금 생길 수도 있겠는데, 괜찮겠는가?”
“에이, 문제는 무슨.”
“응?”
청명의 반응이 영 심드렁하자 맹소가 의아한 낯으로 물었다.
“무슨 의미인가?”
“뭐, 곧 아시게 될 거예요.”
대답 대신, 청명은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
“그보다, 야수궁은 깔끔하게 정리하고 오신 거죠?”
“자네 말대로 몇 년은 돌아가지 않아도 되도록 조치해 뒀네. 그래서 이리 오래 걸린 거지.”
“좋네요.”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현존하는 천우맹의 전력이 온전히 이곳에 모였다.
‘모아 놓고 보니 정말 장난이 아니긴 하네.’
화산에 당가, 남궁과 녹림, 거기에 빙궁과 야수궁까지.
천하를 호령하는 문파 중 무려 여섯이 이곳에 모여 있다. 저 구파일방이 단 열 개의 문파만으로 강호의 지배자 취급을 받았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절대 적지 않은 전력이다.
‘그래도 여전히 모자라긴 하지만…….’
우득. 우득.
청명이 목을 좌우로 꺾어 댔다.
“뭐, 그건 이제부터 채우면 될 일이고.”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화산이 큰 것처럼 이들도 키워 내면 될 일이 아닌가? 물론 느긋하게 키워 낼 시간이 없으니 조금 과격할 테고, 당하는 이들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겠지만…….
“다 지들 잘되라고 하는 거니까 이해해야지. 이해 안 한들 지들이 뭘 어쩔 건데?”
“응?”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청명이 생각만 해도 즐겁다는 듯 낄낄 웃어 댔다.
그 모습이 어쩐지 재미있는 장난감을 손에 넣은 아이 같아 보여서 괜스레 불안해지는 맹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