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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124화 (1,125/1,567)

1124화. 친구가 부르면 당연히 와야지. (4)

“무슨 문제라도 있냐고 물었소.”

차가운 설소백의 목소리에 야수궁도들이 움찔했다.

그들 역시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 못 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 이 젊은 청년이 야수궁과 함께 새외오궁에 속해 있는 북해빙궁주라는 걸 모를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동물 가죽이 겹겹이 쌓인 수레를 힐끔 바라본 야수궁도들의 낯빛은 여전히 어두웠다. 상대가 북해빙궁주라 해도 할 말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굳이…….”

살짝 눌린 듯 흘러나오던 음성이 점차 제 색을 되찾았다.

“죄 없는 짐승을 저리 죽여 댈 필요가 있습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설소백이 대화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잘라 말했다.

“짐승이 죄가 있고 없음을 따지는 것도 무의미하거니와 설사 그게 의미가 있다고 한들, 내가 그 행위에 대한 평가를 그대들에게 받아야 할 이유가 있소?”

“오…….”

청명이 신기하다는 듯 설소백을 바라보고, 설소백을 기억하는 오검 역시 일제히 입을 쩍 벌렸다.

‘쟤가 소백이야?’

‘사숙. 아무래도 아닌 것 같은데요?’

‘내가 아는 소백이가 맞나?’

‘세상에, 옛날에는 쪼그만 게 진짜 귀여웠는데.’

청명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설소백을 보았다.

겉모습이야 못 알아볼 만큼 자랐지만, 청명의 머릿속에서 설소백은 여전히 어린아이다. 북해빙궁의 적통이면서도 제대로 적통다운 대접은 받아 보지 못한 아이.

하지만 지금 설소백이 보여 주는 모습은 그가 기억하는, 오두막에 살던 순박한 아이와는 분명 거리가 있었다.

차가운 눈으로 야수궁도들을 노려보는 설소백에게는 북해를 이끄는 북해빙궁주다운 위엄이 가득 어려 있었다.

‘신기하네?’

사 년이면 작은 아이가 헌앙한 청년이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하지만 순진하기 짝이 없던 어린아이가 제대로 된 위엄을 보여 주기에는 부족하기 짝이 없는 시간일 텐데.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일까? 아니면 북해 설가의 피가 청명의 생각 이상으로 진했던 것일까?

“그럼 죄 없는 짐승들을 죽인 게 잘한 짓이라는 겁니까?”

하지만 야수궁도들은 그런 설소백의 기세를 받고도 쉽사리 물러나지 않았다.

모든 이들에게는 결코 물러설 수 없는 부분이라는 게 존재한다. 짐승들을 친구처럼 대하는 야수궁도들은, 선물이랍시고 짐승의 가죽을 가득 벗겨 온 빙궁의 행위를 용납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대들이 걸치고 있는 건 짐승의 가죽이 아닌가?”

“이건 죽여 얻은 것이 아닙니다. 자연의 흐름에 따라 죽은 짐승들에게서 벗겨 낸 것이지요. 우리는 적어도 가죽을 얻기 위해서 멀쩡한 짐승의 목숨을 끊지는 않습니다.”

“하하.”

그 순간 설소백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어 버렸다.

“사람을 죽이는 무학을 익히는 이들이 짐승은 함부로 죽이지 말라는 건가? 황당한 소리로군.”

“사람은 죄를 짓지만, 짐승은 죄를 짓지 않죠.”

그 순간 설소백의 눈이 스산해졌다.

“그대들이 사는 곳은 아무래도 꽤 풍요로운 모양이군.”

“……예?”

“그런 배부른 소리나 늘어놓고 있는 것을 보니 말이야. 하지만 어떻게 하지?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북해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해야 하는 곳이라 말이지. 한낱 짐승의 사정까지 헤아려 줄 여유가 없는데?”

설소백의 목소리는 지독하게 싸늘했다.

사실 빙궁은 북해에서 꽤 부유한 생활을 누리는 곳이지만, 설소백은 일반적인 빙궁도가 아니다. 더욱이 그는 철이 들 무렵까지 빙궁과는 관련 없는 생활을 하며 북해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그 몸으로 체험한 이다.

그러니 그는 알 수밖에 없다. 곡식 하나 제대로 키워 낼 수 없는 그 차디찬 대지에 뿌리내리고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겨운지.

그런 설소백이니 죄 없는 짐승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야수궁의 말이 얼마나 배부른 소리로 들리겠는가?

“지금 저희가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글쎄. 그런 건 아니겠지. 다만…….”

설소백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창고 문틈으로 커다란 짐승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대들이 끌고 온 것인가?”

“그렇습니다만?”

“재미있네.”

설소백이 조소했다.

“저만큼 커다란 짐승들을 기르는 데 들이는 품이 적지 않을 터. 내가 알기로는 운남 역시 얼마 전까지는 그리 사정이 좋지 않았던 걸로 아는데 말이야.”

“……무슨 의미입니까?”

“저런 짐승들을 먹이는 데 쓸 식량이 있다면 굶주리는 이들에게나 나눠줄 것이지. 그 어려운 와중에도 짐승은 꼬박꼬박 챙기셨군. 그대들에게는 짐승이 사람보다 중요한 모양이지?”

“지금 말씀 다 하셨…….”

“다 했으면 어쩌겠다는 건가?”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설소백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야수궁이 자유분방한 곳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이건 자유분방한 게 아니라 방종한 것 같은데. 설사 이쪽에 문제가 있다고 한들, 한낱 문도에 불과한 그대들이 빙궁주인 내게 직접 따져 묻는 것은 옳은 처사인가?”

“그, 그건…….”

“방약무인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로군. 덕분에 야수궁이 어떤 곳인지 잘 알았네.”

“그, 그 말씀은 지나치십니다!”

“지나쳐?”

설소백이 이를 드러냈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 차디찬 한기가 흘러나왔다.

“그대들이 북해빙궁을 무시한 것은 괜찮은 일이고, 내가 야수궁에 대해 함부로 말한 것은 지나친 일이다? 내가 야수궁이 이렇게 대단한 곳인지는 미처 몰랐군. 궁금해. 대체 얼마나 빙궁을 더 무시할 수 있는지 말이야.”

“…….”

“이쯤 되면 나도 빙궁이 그렇게 무시당할 만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줘야 할 것 같은데?”

스산한 살기가 쏟아졌다. 눈빛을 북해의 빙벽처럼 차게 굳힌 설소백이 양손을 늘어뜨리며 앞으로 한 발 나선 바로 그때였다.

“아니, 뭐 보자마자 싸우고 그러냐? 사이좋게 지내지.”

“……싸우다니요!”

등 뒤에서 청명의 말이 들려온 순간, 설소백이 뿜어내던 한기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분위기를 바꿔 버린 설소백이 청명을 획 돌아보며 겸연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 그냥 잠깐 대화를 한 거지요. 도장님이 앞에 계시는데 제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

“에이, 설마요. 헤헤.”

부쩍 자란 어린 궁주를 보며 감격하던 빙궁도들의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힘없이 고개 숙인 그들의 눈가가 촉촉이 젖었다.

‘화산병이 또 도지셨네.’

‘아니, 왜 화산과 관련된 일만 생기면…….’

‘대체 왜 저러시는 거야, 대체!’

빙궁도들의 심정을 누가 알겠는가?

설소백은 그들이 보아도 정말 훌륭하게 성장했다. 처음에는 빙궁을 제대로 겪어 보지 못한 어린아이가 단순히 전전대 궁주의 피를 이었다는 이유만으로 궁주 자리에 오르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이들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북해의 누구도 설소백이 훌륭한 궁주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의심을 품기에는 그간 설소백이 보여 준 모습이 워낙 훌륭했기 때문이다.

북해빙궁이라는 안락한 곳에서 성장하여 실제 북해를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했던 전대 궁주들과는 달리, 설소백은 북해인들의 힘겨움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이였다. 그렇기에 이전의 어떤 궁주들보다 북해인들을 보살피는 이가 되어 가고 있다.

그들이 지켜 내야 할 이에서, 그들을 지켜 내는 이로 커 가는 것이다.

지금 당장은 완벽하다고 할 수 없겠지만, 언젠가는 그 누구보다 완벽한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평가를 받는 이가 바로 당대의 빙궁주 설소백이었다.

딱 하나.

‘화산만 빼면 말이지.’

왜 그런 냉철하고 이성적이면서도 마음 따뜻한 이가 화산이라는 두 글자만 얽히면 정신이 나가 버리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저 짐승 가죽들만 해도 그렇다.

- 구, 궁주님. 그 화산 분들은 따뜻한 중원에 사시는데 이…런 가죽들이 필요하겠습니까?

- 음. 그래서요?

- 아, 아뇨. 이게 잡기가 힘들기도 하고, 다들 지쳐서……. 워낙 희귀하다 보니…….

- 그래서요?

- 그…… 하기 싫다는 게 아니라 이걸 꼭 해야 하는 일인가…….

- 그래서?

- …….

- 그래서?

- ……하겠습니다.

저건 그냥 귀하다는 말로 퉁칠 만한 물건이 아니다.

저 가죽들을 마련하기 위해서 북해빙궁도들이 얼마나 숱한 밤을 꼬박 지새웠던가! 애초에 저런 가죽을 가진 짐승들은 거진 야행성이라 낮에는 보이지도 않는단 말이다!

안 그래도 추운 북해에서, 눈보라가 몰아치는 야밤에 짐승 사냥을 다니는 게 얼마나 정신 나간 짓인지 상상이 가는가?

평소에는 빙궁도들이 눕는 자리가 불편하지는 않은지, 먹는 것이 부실하지는 않은지 어떻게든 보살피려 애쓰는 사람이 화산이라는 두 글자만 얽히면 눈보라가 몰아치는 혹한의 밤에 사냥해 오라고 궁도들을 내모는 미친 인간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 아무리 그래도 말이 너무 과격한 것 같은데.”

“아, 그렇죠?”

넌지시 타이르는 듯한 청명의 말을 들은 설소백이 오히려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그 이해할 수 없는 반응에 청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웃어?”

“잘한 것 같아서요.”

“응?”

“노력했습니다. 평소에는 따뜻해야 하지만, 적이거나 대적하는 이에게는 한 치의 온기도 베풀어서는 안 되는 게 무인 아니겠습니까?”

“……으응?”

어……. 그게 맞는 말이긴 한데…… 야수궁이 적은 아니잖니?

하지만 설소백은 그런 청명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더욱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꾸준히 노력했더니 도장님께 이런 말을 듣는 날도 오는군요. 역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도장님의 말씀이 옳았습니다.”

“무, 무슨 노력?”

“당연히 도장님이지요.”

“……어? 그게 무슨…….”

“도장님께서 보여 주신 모습을 닮으려 노력했습니다. 도장님께서 싸우실 때 딱 이러했거든요. 그때 마교 놈들을 막 이렇게! 막!”

“…….”

“아직은 많이 부족하지만, 저도 더 노력하면 언젠가는 도장님처럼 될 수 있겠죠?”

청명이 멍한 눈으로 환하게 웃는 설소백을 보았다.

시선을 조금 옮기니 차마 이 모습을 보고 있기 힘든지 땅에 파고 들어갈 기세로 고개를 숙인 빙궁도들의 모습도 보였다. 빨갛게 달아오른 그들의 얼굴과 새하얀 무복이 확연히 대비되었다.

“내가?”

“예!”

“……내가 이랬다고?”

청명이 제 등 뒤에 선 오검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오검은 설명하기 힘들다는 듯 시선을 슬쩍 피하며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뭐, 그, 완전히 같지는 않은데.”

“조금…… 어, 조금 비슷하지.”

“뭘 닮으려 했는지는……. 그래, 뭘 닮으려 했는진 알겠다.”

“하필…….”

청명은 오검을 망연히 바라보다 다시 설소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웃고 있는 그를 보니 맹렬하게 꼬리를 치는 커다란 강아지가 절로 떠올랐다.

청명의 입에서 영혼 빠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진짜?”

- 이젠 하다 하다 북해까지…….

……아니, 이 양반아. 나는 저런 적이 없다니까?

와…….

와아……. 돌겠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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