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3화. 친구가 부르면 당연히 와야지. (3)
새하얀 모피를 걸친 이들이 마치 자로 잰 듯한 걸음걸이로 다가온다.
야수궁도들이 뜨거운 태양 아래 울창하게 자란 밀림처럼 뜨겁다면, 북해빙궁도들은 그야말로 북풍한설을 몰고 온 듯 매서웠다.
사람의 기질이 어디 자라나는 곳에 따라 달라지기야 하겠냐마는, 적어도 저들만큼은 북해의 차가운 바람을 싣고 왔단 말이 이상하지 않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렇게나 다르다니.’
남궁도위는 어쩐지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남궁 역시 검을 쓰는 곳이지만, 북해빙궁의 검수들이 풍기는 기질은 어딘가 남달랐다. 칼날 같은 기세라는 건 이런 것을 두고 이야기하는구나, 하는 감상이 절로 들었다.
야수궁과는 그 기세가 완전히 상극을 이루니 흥미가 일 정도였다. 야수궁이 한없이 자유롭고 어딘가에 얽매이지 않는 곳인 데 비하여, 빙궁도들은 마치 절도라는 단어를 빚어서 만들어 놓은 것 같다.
그래서인지 야수궁과는 다르게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느낌이 들…….
“도장니이이이이임!”
……었는데.
칼날 같은 기세를 풍기는 이들 사이에서 돌연 한 사내가 뛰쳐나왔다. 그러고는 청명의 앞으로 맹렬히 돌진했다.
“어?”
“도장님!”
사내는 반가워하는 기색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청명의 손을 제 양손으로 덥석 움켜잡았다. 거의 잡아채는 움직임에 가까웠다.
“대체 이게 얼마 만입니까! 잘 지내셨죠?”
“……어?”
“도장님은 정말 변한 게 없으시네요! 안심했습니다!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거라서 어색할까 싶었는데!”
“……어어?”
“그래도 이리 다시 뵙게 되니 먼 길을 온 보람이 있습니다! 세상에, 중원은 왜 이렇게 더운지! 북해의 한여름보다 여기가 더 더운 것 같습니다!”
“아, 아니, 잠시만.”
“네?”
“저…….”
청명이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뉘신지?”
“…….”
사내, 아니. 청년이라 불러야 마땅할 이의 표정이 일순간 멍해졌다. 그러나 그도 잠시, 그는 이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하! 역시 도장님이시네요. 자주 이렇게 농을 하셨죠.”
“아니, 그 말이 아니라…….”
“저도 하루빨리 도장님의 이런 여유를 배워야 하는데 말입니다. 왜 이렇게 쉽지 않은지.”
“아니…….”
“그래도 하루하루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야! 나도 말 좀 하자! 너 누구냐고, 인마!”
그 말에 청년은 덜컥 몸을 굳혔다. 그러더니 정말 충격을 받은 얼굴로 청명을 보았다.
“도, 도장님. 정말로 제가 기억이 안 나십니까?”
“아니, 머리털 나고 처음 뵙는 것 같은데, 왜 자꾸 아는 척이쇼?”
“저 소백입니다!”
“어?”
“설소백이요.”
“누구? 설소백? 빙궁주?”
“예! 저요!”
이젠 청명이 멍한 눈으로 눈앞의 청년을 보았다. 멀끔하고 하얀 피부에 오 척을 훌쩍 넘는 키…….
“내가 아는 소백이는 요만했는데?”
“네! 그게 저예요.”
“……네가?”
“예!”
그 말에 반응한 것은 비단 청명만은 아니었다.
“에엑!”
“설 소궁주라고?”
“진짜?”
청명의 뒤쪽에 있던 오검도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격하게 반응했다.
청명은 눈앞의 청년을 아래위로 몇 번이나 훑어보았다. 이 멀끔한 청년이 설소백이라는 게 도무지 믿기지는 않지만…….
“그러고 보면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맞다니까요.”
“자, 자세히 보면 눈매랑 입매가 똑같아요.”
“어딜 봐서?”
“조걸 사형 눈썰미에는 기대도 안 했으니까 모르겠어도 그냥 그런 줄 아세요.”
“……아니…….”
백천이 눈을 끔뻑였다. 듣고 보니 정말 설소백이 맞는 것도 같고…….
“허……. 허허허허.”
청명이 황당함을 숨기지 못하고 눈앞의 장성한 청년을 바라보았다.
“진짜 소백이?”
“예, 도장님.”
“목소리도 완전히 다른데.”
“저는 똑같은 것 같은데, 그렇게 이상한가요.”
“그런 게 아니라……. 그…… 어, 그래. 많이 컸네.”
아니. 이 정도면 많이 컸다기보다는 거의 인간이 바뀌어 버린 수준이 아닌가?
그새 키는 거의 두 배는 자란 것 같았고, 젖살 가득 통통했던 얼굴이 어느새 꽤 늘씬하고 훤칠한 청년의 얼굴로 변해 있었다. 북해 특유의 강퍅한 인상이라기보다는 뭐랄까, 조금 선이 얇은 미남 같은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어디 보자…… 거의 네 해 전이었나?”
“그렇죠. 벌써 사 년이나 지났네요.”
“……그럼 달라질 만도 하네.”
한창 클 나이였으니까……. 물론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의 괴리가 큰 게 문제지만.
청명의 시선이 청년……. 아니, 설소백의 허리춤에 대롱대롱 매달린 검으로 향했다. 새하얀 무복에 떡하니 검까지 차고 있으니 이제는 정말 무인이라는 느낌이 확연하게 들었다.
“오랜만이군, 설 궁주.”
“정말 격조했습니다, 야수궁주님!”
놀란 청명이 고개를 획 돌려 맹소를 바라보며 물었다.
“알아보시겠어요?”
“딱 봐도 똑같은데 왜 그런 반응인가?”
“또, 똑같다고요?”
“조금 위로 자란 것뿐이지 않은가?”
하기야, 맹소는 누가 봐도 똑같이 생긴 범 새끼 열 마리를 구별해 부르는 사람이다. 짐승도 다 알아보는 양반이 사람을 못 알아볼 이유가 없겠지.
그런 그가 이리 말하는 걸 보니 설소백이 맞긴 한 모양이었다.
청명은 미묘하게 차오르는 어색함을 애써 밀어 내고는 웃는 낯으로 인사를 건넸다.
“여하튼 오느라 고생했다. 정말 먼 길이었을 텐데.”
“별말씀을요. 당연히 와야지요.”
설소백이 해맑게 웃으며 조금 쑥스러운 듯 말했다.
“사실 그동안 조금 걱정했습니다.”
“응? 걱정?”
“빙궁 내에 그런 의견이 조금 있었거든요. 천우맹이니 어쩌니 하고 말만 번지르르하게 늘어놓더니, 결국은 그냥 친한 척해서 빙정을 비롯한 북해의 물건들을 싸게 가져다 돈을 벌자고 하는 수작질이 아니었냐고.”
푸욱.
설소백의 말이 비수가 되어 청명의 가슴을 사정없이 찔렀다.
“……그, 그래?”
“하하하하. 죄송합니다, 도장님. 저야 도장님을 직접 뵙고 아는 사람이니 그런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았지만, 도장님을 잘 모르는 이들이 보기에는 영 미덥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생각 없는 이들은 도장님을 도사인 척하는 말코라고 욕도 하더군요. 하하하하.”
푸우욱!
“아, 걱정 마세요. 그런 이들은 제가 따끔하게 혼쭐을 내 주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게 참 간사한 게,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도장님께서 워낙에 찾아 주질 않으시니, 혹시 북해를 까맣게 잊고 계신 건 아닌가 의구심이 들기도 했거든요. 하하하하핫!”
푸우우우욱!
“설마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죠. 도장님께서 북해를 얼마나 끔찍이 여기는지 제가 어떻게 모르겠습니까? 저 깊은 산속에서 사는 도사 분들께서 무슨 돈에 관심이 있어서 그 먼 북해까지 오셨겠습니까? 하하.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죠.”
“…….”
“그래도 혹여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저희를 잊으셨으면 어떻게 하나 했는데 이렇게 찾아 주시니 제가 다 부끄럽습니다. 도장님께서는 저희를 이리 생각해 주시는데, 은혜를 입은 입장에서 그런 파렴치한 생각을 했다니. 제가 너무 죄스럽지 뭡니까.”
“자, 잘못했습니다.”
“예? 도장님, 방금 뭐라고……?”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청명의 뒷머리가 땀으로 축축이 젖어 들었다.
물론 까맣게 잊고 있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당히 뒤로 젖혀 두고 있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닌가?
차라리 그 사실을 원망하기라도 하면 청명도 되레 뻔뻔하게 나갈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한결같은 믿음을 보여 주니 사람이 점점 더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아, 그리고!”
“응?”
“여기! 여기로 가져와라!”
설소백이 소리치자 빙궁도들이 우렁찬 대답과 함께 뒤쪽에서 뭔가를 끌고 나왔다. 화산의 제자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무언가를.
“수레?”
“엄청 크네?”
“하하하. 저거 쇠로 만들었으면 화산에서 쓰는 거랑 똑같겠……. 저거 쇠야?”
빙궁도들이 별달리 힘든 기색도 없이 거대한 수레를 끌고 왔다. 문제는 그런 수레가 한 대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쿠르르릉! 쿠르르르르릉!
적어도 다섯 대는 넘는 수레가 먼지구름을 만들며 옮겨졌다.
“이, 이게 뭐야?”
“오랜만에 도장님을 뵙는데 빈손으로 올 수는 없잖습니까? 북해에서 가져온 선물입니다.”
“서, 선물? 북해 물건은 은하상단을 통해서도 받는데…….”
“그건 파는 물건이지요. 이건 그것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귀한 선물입니다. 도장님께 드릴 것이니까요.”
“……응?”
“자, 이건…….”
설소백이 첫 번째 수레에 덮인 천을 벗겼다.
“히익? 이, 이게 뭐야?”
“북해에서 가져온 귀한 동물 가죽들입니다. 북해에 사는 물범 가죽과 회색 늑대 가죽, 그리고 보기 드문 곰 가죽까지 준비했습니다.”
“…….”
“값으로 치기 어려운 물건들입니다. 일전에 들러 보니 화산의 겨울이 무척 추울 것 같아서 도사님들을 위해 준비해 봤습니다.”
“……너한테도 화산이 추웠어?”
“저는 딱히 그런 걸 못 느꼈지만, 도사님들은 추우실 것 아닙니까? 이 가죽들이면 따뜻하게 겨울을 나실 수 있을 겁니다.”
청명이 눈물을 왈칵 쏟았다.
‘내가 죽일 놈이지, 내가.’
살면서 누군가에게 이런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있던가? 세상에, 그 추운 북해에 사는 놈이 고작 산 위의 추위가 걱정된다고 가죽을 날라 오는데…… 그런 애들을 버려두고…….
- 청명아. 솔직히 이건 내가 봐도 네가 좀 심했다.
아, 안다고. 지금 극심한 죄책감 느끼는 중이라고!
“그리고 이 수레에 담긴 것은 북해에서도 보기 드문 식재들이고, 이쪽은 한철을 좀 모아 봤습니다. 그리고 이건…….”
“……뭐 이런 걸 다 가져왔어. 부담스럽게…….”
“에이, 부담이라니요. 도장께서 북해에 해 주신 걸 생각하면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
“아, 물론 보은을 위해 가져온 건 아닙니다. 이건 그저 제 작은 성의 표시라고 생각해 주세요.”
설소백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거리가 이리 멀지 않았더라면 배는 더 가져왔을 텐데.”
“그, 그만…….”
아무리 공짜면 양잿물도 마시는 청명이라지만, 이걸 다 받아 처먹었다가는 배가 터져 죽고 말 것이다. 요즘 들어 청명은 자신에게 양심이라는 게 존재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자꾸 깨닫고 있었다.
그때 설소백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다만…….”
“응?”
“도장께서 말씀하신 빙정은 많이 구하지 못했습니다. 워낙 산출량이 줄어들어서……. 죄송합니다.”
“죄송은 무슨!”
청명은 얼른 격정적으로 고개를 젓고 손사래를 쳤다.
그거 예전에 내가 몇십 년치를 싹 긁어 왔는데, 거기서 더 내놓으라고 하면 내가 날강도지.
“양은 어찌어찌 채워 왔는데 질이 많이 좋지 않습니다. 예전이었다면 차마 빙정이라고 내어 놓기도 민망한 것들인데…….”
“아, 괜찮아. 진짜 괜찮아.”
내가 먹을 것도 아닌데, 뭐.
청명이 부쩍 자란 설소백을 보며 잘 키운 북해빙궁주 하나, 열 동룡이 안 부럽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하던 바로 그때였다.
어디선가 날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그럼 쓸데없이 짐승을 잡아서 가죽을 벗겨 왔다는 말이오? 이거 완전 상종 못 할 자들이구먼!”
“응?”
남만야수궁의 궁도들이 흉흉한 눈으로 설소백과 그 앞에 놓인 동물 가죽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소?”
그와 동시에 설소백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그가 북해빙궁의 적통이란 사실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차가운 위압감이 그의 전신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