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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122화 (1,123/1,567)

1122화. 친구가 부르면 당연히 와야지. (2)

“아, 자목초는 챙겨 오셨죠?”

청명의 말에 맹소가 쓰게 웃었다.

“아아. 신령초(神靈草) 말이군. 챙겨 왔지. 하지만 문제가 좀 생겼네.”

“응? 문제요?”

“아무래도 우리가 신령초를 공급하는 것도 한동안은 어려울 것 같군.”

그 말에 청명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맹소가 한숨을 쉬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말게나. 우리가 귀찮거나 다른 요구 조건이 있어서 이리 말하는 게 아니니까. 운남을 모조리 다 뒤졌지만, 더는 신령초가 보이지 않는다네. 저번 신담(神潭)에 심어 둔 신령초가 자라려면 아직은 시간이 좀 걸리는 데다가…….”

맹소가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 신령초도 온전히 다 자라는 것 같지는 않아서, 아무래도 조금 지켜봐야 할 것 같네.”

말을 마친 맹소는 슬쩍 청명의 눈치를 살폈다. 이놈이 얼마나 자목초를 귀하게 여기는지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 자목초를 얻기 위해서 그 먼 운남까지 마다하지 않고 달려오지 않았던가? 그런 이에게 더는 줄 수 없다고 했으니…….

“뭐 어쩔 수 없죠.”

“으음?”

하지만 의외로 청명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게 뭐 아무 데서나 막 자라는 잡초도 아니고, 필요한 만큼 쑥쑥 크기야 하겠어요? 감수해야 할 일이죠.”

“흐음……. 그런가?”

“신경 쓰지 마세요. 풀이야 내버려 두면 또 자라겠죠.”

“다음 수확까지 십 년이 더 걸릴지도 모르는데?”

“십 년이고 백 년이고, 그때라도 얻을 수 있으면 다행이고. 그때도 못 얻으면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인 거죠, 뭐.”

청명은 덤덤히 말하다 맹소의 얼굴을 흘끗 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그렇게 험상궂게 인상을 쓰고 계세요?”

“내가? 하하하하핫.”

어쩐지 긴장이 풀린 맹소는 그만 호탕하게 웃어 버렸다.

내심 그런 생각을 했던 게 사실이다. 지금 청명이 운남을 대접해 주는 이유는 자목초를 구하는 일과 차 무역으로 돈을 벌어들이는 데 운남이 필수적이기 때문일 거라고.

만약 그 둘 중 하나라도 원활하지 않게 되면, 운남에 대한 대접 또한 과거와 달라질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아무리 다르다고 해도 청명 역시 중원인이니까.

하지만 청명의 태도는 소식을 듣기 전과 전혀 다름이 없었다. 마치 선물을 가져오지 못했다고 무안해하는 친구에게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고 타박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자네가 그렇게 말하니 내가 좀생이라도 된 것처럼 느껴지는군.”

“사실 덩치에 안 맞는 면이 있으시긴 했죠.”

“하하. 살다 살다 그런 말은 처음 듣는데.”

“그럼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이 궁주님을 잘 모르는 거고요.”

맹소가 껄껄대며 웃었다. 청명의 말이 그리 틀리지 않은 듯해서였다.

“여하튼 자네는 참 신기한 사람일세.”

“어? 그새 받아치시는 거예요?”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맹소가 미소를 지었다. 농담처럼 넘겼으나, 신기한 사람이란 말은 그의 숨김없는 본심이었다.

청명이 맹소의 내심을 짐작하고 그의 마음을 편케 해 주려 한 말인지, 가감 없는 본심에서 한 말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느 쪽이건, 별것 아닌 그 한마디가 맹소를 안심하게 했다.

천우맹이 단순히 이득으로 묶인 관계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어떤 이득도 따지지 않고 운남을 구해 준 매화검존처럼, 화산 역시 아무런 이유 없이 그들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걱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중원인과 새외인들 사이에 박힌 차별 의식이 그만큼 뿌리 깊었기 때문이리라.

“아, 그러고 보니 이쪽은 처음 보시죠?”

“음?”

“어이, 남궁.”

“예?”

청명이 손짓으로 남궁도위를 불렀다. 그러자 남궁도위가 조금 어색하고 어정쩡한 걸음으로 둘의 앞으로 다가왔다. 청명이 그를 적당히 소개했다.

“남궁세가의 소가주예요. 음…… 직위가 아직은 소가주인데, 곧 남궁세가의 가주가 될 사람이죠.”

“아, 그런가?”

맹소가 살짝 가늘어진 눈으로 남궁도위를 바라보았다.

‘과연.’

남궁세가의 명성을 모르는 이가 세상에 있을까?

명문 중의 명문. 중원의 수많은 세가 중에서도 명문으로 따지자면 그 수위를 놓지 않는 곳이 바로 남궁세가다. 그런 곳의 소가주여서 그런지, 그 기도가 한눈에 보기에도 남달랐다.

“만나서 반갑네. 나는 남만야수궁의 궁주인 맹소라고 하네.”

“아, 저는…….”

그때 청명이 피식 웃더니 맹소를 만류했다.

“그렇게 딱딱하게 대하실 거 없어요. 거꾸로 생각하면 아직 가주도 아닌 사람이니까요. 아직 애송이니까 적당히 보고 도와주세요.”

“……그게 무슨 말인가? 남궁세가의 소가주면…….”

황당한 얼굴로 맹소가 반박하려는 순간 남궁도위가 황급히 말을 꺼냈다.

“아닙니다, 궁주님.”

“으응?”

남궁도위는 조금 얼이 빠진 맹소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 했다.

“청명 도장의 말이 맞습니다. 아직 부족함이 많으니 모쪼록 많은 지도와 편달을 부탁드립니다.”

맹소가 그 커다란 눈을 끔벅거렸다.

평소 거대한 사자같이 위압적인 맹소지만, 당황한 얼굴로 눈만 끔뻑이고 있으니 사납기는커녕 순박한 소처럼 보였다.

“자네…… 나를 잘 아는가?”

“잘 모릅니다.”

“그런데 무슨 지도며 편달을 하라는 건가?”

그 말에 남궁도위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저는 궁주님에 대해 잘 모르지만, 이제 청명 도장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합니다.”

“…….”

“저 사람은 항상 말을 반쯤 농담처럼 흘립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놓쳐서는 안 되는 진의가 있기 마련이지요. 저는 청명 도장이 제게 궁주님께 여러 가지를 배워야 한다는 말을 해 준 거라 생각합니다.”

맹소가 남궁도위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슬쩍 돌려 청명에게 시선을 주었다. 청명은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 당연히 가르침을 청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보게……. 나는 새외인일세. 중원을 상징하는 명문가, 남궁세가에게 줄 수 있는 게 없다네.”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뭐가 중요하냐고 했는가?”

“예.”

남궁도위는 슬쩍 시선을 틀어 누군가를 바라보더니 얼굴을 구겼다.

“하다못해 사파 놈들과도 한솥밥을 먹고 있는 마당에.”

“거, 눈깔 관리를 너무 못하시는 것 같은데? 그러다 찔리면 안 아프신가?”

임소병이 너스레를 떨었다. 남궁도위의 얼굴이 더더욱 일그러졌다.

“……보셨습니까?”

“…….”

“이제는 사파 놈들과 밥도 같이 먹습니다. 그런 마당에 새외니 어쩌니 하는 구분을 새삼스레 하는 것도 어이없는 일이죠.”

남궁도위는 실소를 흘렸다. 자신이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적어도 천우맹 내에서는 그런 구분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자네는 천하의 남궁세가를 이끌 사람이 아니던가?”

“그런 허울 따위는 진즉에 다 버렸습니다.”

“버렸다고?”

남궁도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남궁세가라 해서 대단할 것도, 다를 것도 없습니다. 그저 말학의 청이라 생각하시고, 부탁드리겠습니다.”

맹소는 허허 웃고 말았다.

물론 그도 야수궁에 자부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그가 스스로 자부심을 가지는 것과 세상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건 전혀 다른 문제 아니던가?

중원을 상징하는 명문가와 새외라 천대받는 야수궁 사이에는 좁히려야 좁힐 수 없는 거대한 간극이 있다. 그런데 지금 이 청년의 눈엔 그 간극이 조금도 보이질 않는 모양이었다.

“부탁드립니다.”

남궁도위가 다시 한번 깊이 포권 했다.

맹소는 고개를 숙인 남궁도위, 정확히는 그 뒤에 선 이들을 보았다. 소가주가 직접 고개를 숙이고 있음에도 그 사실을 딱히 새삼스레 생각하지 않는 이들을 말이다.

‘이들은 이게 이상하다는 걸 느끼지 못하는 건가?’

불과 십 년만 전이었어도 남궁세가의 직계가 새외의 야만인에게 고개를 숙이는 일 따위는 하늘이 쪼개져도 있을 수 없다고 여겼을 이들이다. 그런 이들이 이제는 이 광경을 그저 무덤덤히 바라보고 있다.

당사자들은 느끼지 못하겠으나, 밖에 있다 합류한 맹소에게는 이 거대한 변화가 너무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거, 애 목 빠지겠네.”

“어…….”

청명이 슬쩍 눈치를 주자 맹소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나라도 도움이 된다면 최선을 다해 봄세.”

“감사합니다!”

남궁도위가 환히 미소를 지었다. 가식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웃음이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맹소는 이 모든 것이 그냥 적당히 둘러대는 게 아니라는 걸 확연히 느낄 수밖에 없었다.

괜스레 어색해진 맹소는 고개를 돌려 청명을 바라보았다.

“……자네.”

“네?”

“대체 뭘 만들고 있는 건가?”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아니…….”

맹소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웃어 버렸다.

한두 사람이 새외인들에게 호의 비슷한 걸 가지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중원과 새외의 사이가 극단으로 치달았을 때도 새외인들에게 호의를 보이는 이들은 존재했으니까.

하지만 이토록 많은 이들이 모인 자리에서 모두가 새외인들에게 별다른 적의를 보이지 않는 것은 확실히 드물다 못해 처음 보는 일이었다. 심지어 야수궁도들을 오늘 처음 본 이들마저 말이다.

낯선 복식이나 야수들을 데리고 다니는 행위 등은 이들의 입장에서 눈살 찌푸려질 만도 할 텐데…….

“근데 저 양반들은 왜 웃통을 까고 다니는 거야?”

“더운 데서 왔잖아.”

“아. 그걸 생각 못 했네.”

“웃통 벗어젖히는 게 뭐가 문제냐? 사람 살가죽 벗기는 놈들이랑도 같이 지내는데.”

“……네 살가죽부터 벗겨 줄까?”

“그럼 그 목은 무사하시고?”

금세 야수궁에게 관심을 잃은 듯 툭탁거리기 시작하는 이들을 보며 맹소가 고개를 내저었다. 살면서 이토록 관심 밖으로 밀려난 경험은 맹세코 이번이 처음이었다.

‘……천우맹이라.’

꿈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맹소가 청명의 뜻에 동참한 것은 그저 그것이 야수궁에 이득이 되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지, 딱히 뭔가 큰 것을 바꿀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품어서는 아니었다.

새외인들이 느끼는 현실과 중원인들이 느끼는 현실은 너무도 다르니까. 중원인들이 먼저 나서서 그 현실을 바꿀 이유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 맹소는 변화를 몸소 확실하게 느끼고 있다. 어쩌면…… 정말 언젠가는 천우맹이라는 울타리 안에 든 이들은 서로를 편견 없는 눈으로 바라보게 될지도 모른다.

맹소는 쓰게 웃었다. 어느새 마음속에 기대가 넘실거리는 걸 알아서였다. 큰 기대는 큰 실망을 부를 뿐이다. 맹소는 이 정도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그러나 기대를 접는다 해도, 천우맹과 함께하는 마음만은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이들이 세상을 주도하는 날이 온다면 세상이 어떻게 바뀌어 나갈지.

“……대체 뭘 어떻게 한 건가?”

“뭐가 말이에요?”

“다들 서로에게 격의가 없군.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말이야.”

“아, 뭐 그거야 당연한 거죠.”

“응?”

청명이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남궁이니 녹림이니 해 봐야 어차피 다 써먹지도 못할 애새끼들인데, 개중에 더 낫고 모자란 놈이 어딨어요? 차별 없이 후려 까야죠.”

“…….”

그거…… 좀 이상하긴 하지만…….

납득과 혼란이 동시에 몰아쳤다. 어쩌면 공허하기만 하고, 실현될 리 없는 이상에 비한다면 이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맹소가 할 때였다.

“어? 저기도 오네요.”

“응?”

청명의 말에 맹소가 고개를 돌렸다. 청명이 가리킨 곳을 보자마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짠 듯이 도착하는군. 그건 그렇고, 저들은 덥지도 않은가? 이곳까지 저 두터운 털옷을 입고 오다니.”

“여기서 웃통 벗고 다니는 야수궁도 똑같거든요?”

“……할 말 없군.”

두 사람은 나란히 웃었다. 이 와중에도 눈처럼 하얀 옷을 입은 이들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운남보다 더욱 먼 곳에서 출발하여 세상을 가로지른 끝에 마침내 도착한, 북해빙궁의 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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