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0화. 그건 다 준비해 놨죠! (5)
독에 중독되어 휘청이던 준수한 미남이 마침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질렸다는 듯 그를 바라보던 수많은 시선이 그 순간 저열한 쾌감으로 물들었다.
“이…….”
부들부들 떨던 사내는 결국 고개를 들지 못하고 앞으로 엎어졌다.
“쓰레기…들…….”
풀썩.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백천이 쓰러지는 순간, 그를 둘러싸고 있던 모두가 환호성을 내질렀다.
“악적 놈들을 무찔렀다!”
“이겼다!”
“어떠냐! 화산 놈들아! 이게 정의다!”
바닥에 엎어진 화산 제자들의 입에선 억울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정의는 심했지…….’
‘그럼 우리가 악이냐, 이 새끼들아!’
심지어 저기 같이 소리치는 이들 중에 썩을 산적 놈들까지 섞여 있다는 사실이 그들을 더욱 억울하게 했다.
아니, 그것 좀 이겼다고 사람을 이렇게까지 몰아가네. 알 만한 양반들이…….
‘해도 해도 너무하네.’
‘진짜 이러긴가?’
하지만 그 순간 당가와 남궁은 아예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가를 촉촉이 적셨다.
“내가 이 한을 푸는 순간이 오는구나.”
“크흑. 남궁 형. 고생하셨습니다.”
“저 새끼들이 저번에 우릴 눕혀 놓고, ‘별것 없네.’ 할 때는 정말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그 말에 쓰러져 있던 화산파 제자들이 슬쩍 시선을 교환했다.
‘그랬냐?’
‘……들었던 것도 같고.’
“말도 마십시오. 저는 ‘에이. 명가라더니 영 비리비리하구만.’ 소리 들었을 때, 조상님 무덤에 찾아가 울고 싶었습니다.”
화산파 제자……. 아니, 화산 놈들이 움찔하고는 다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저렇게까지 했다고?’
‘조걸 사형입니다. 제가 들었어요.’
‘하여튼 저 새끼는…….’
그러자 차마 같이 부둥켜안지는 못하던 녹채의 산적이 울컥하여 소리쳤다.
“우리는 ‘신주오패라더니 다 같지는 않군.’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와, 그건 심했네.”
“그게 제일 심했다. 안 그래도 만인방이랑 사이도 안 좋은데.”
화산파 놈들……. 아니, 화산의 악적 놈들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이건 다들 똑똑히 들은 기억이 난…….
‘사숙이었나?’
‘백천 사형이었지.’
‘그 인간도 한 번씩 취하면 조걸보다 더해.’
물론 백천만 취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한두 사람만 그런 짓을 했으면 바로 티가 났을 텐데, 지금껏 알지 못했다는 것은 다들 비슷한 짓을 했다는 의미다.
“정의는 승리한다, 쓰레기들!”
“어떠냐! 이제 우리의 울분을 알겠지!”
“으하하하하핫!”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 삼파 연합을 보며 화산의 제자들은 이를 갈았다. 특히나 이 상황을 버틸 수 없었던 조걸이 눈에 불을 켜고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이…… 이 더러운 놈들……. 자존심도 없냐! 합공이라니!”
“후후후. 그럴 수 있지요, 조걸 도장.”
임소병이 부채를 살랑살랑 부쳐 댔다. 물론 한쪽 눈이 시퍼렇게 물이 들어 있어서 영 모양은 살지 않았지만 말이다.
“조걸 도장이 전략을 이해할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애초에 안 했습니다. 후후후후. 뭐 어쩌겠습니까? 사는 세계가 다른 것을.”
“끄으…….”
울화통이 터진 조걸이 피를 토하고 픽 꼬꾸라졌다.
연무장에는 처음으로 화산 놈들을 완전히 박살 낸 이들의 환호성이 한참 동안 울려 퍼졌다.
* * *
“크흐흐흐.”
“…….”
“형님. 조걸 도장 그 새끼……. 아니, 그 인간 얼굴 보셨습니까?”
“…….”
“십 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는 것 같습니다. 아이고, 오늘은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네.”
“그리도 좋으냐?”
“형님이 무슨 말씀을 하실 줄 알고 있습니다.”
당잔이 양손을 제 허리에 얹고는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세 문파가 달려들어 겨우 한 문파를 쓰러뜨린 게 그리 기뻐할 일이냐!”
“…….”
“이 말씀 하시려고 그러죠?”
“하핫.”
당패가 웃으며 고개를 내저어 버렸다. 당잔은 웃음을 거두지 못한 얼굴로 말했다.
“창피한 일인 줄은 알고 있지마는, 오늘은 그냥 대놓고 기뻐하렵니다. 말리지 마십시오.”
“안 말릴 테니 충분히 기뻐해라.”
당패가 큭큭거리며 웃었다. 하지만 당잔은 이내 엉거주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실 온종일 기뻐하고 싶은데, 그럴 힘도 안 남았습니다…….”
당잔이 물먹은 솜처럼 노곤해진 몸으로 고개를 뒤로 젖혔다.
“……이기면 하나도 안 피곤할 줄 알았는데…… 이긴다는 건 결국 마지막까지 싸운다는 뜻이더라고요. 차라리 일찍 쓰러지면 힘이라도 덜 빼는데.”
“그렇더구나.”
“화산 놈들이…… 대단하긴 대단합니다. 매번 이걸 어떻게…….”
당잔은 말을 다 끝맺지 않고 그냥 말아 버렸다. 당패가 고개를 돌려 그런 그를 보았다. 어느새 기절이라도 한 듯 잠들어 있었다.
“……힘들었겠지.”
사실 이미 몸은 예전에 한계였다. 대련은 수련과 또 다르다. 술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체력이 순식간에 증발하는 것이 바로 대련이다.
보통 대련도 아니고, 피아를 구분하기 힘든 난전을 며칠 동안 밤낮없이 치렀으니, 완전히 탈진해 버리는 것도 당연했다.
‘수련도 이 정도란 말이지.’
그렇다면 과거 마교와 싸우면서 수십 일을 제대로 잠조차 자지 못하고 전쟁을 거듭한 이들은 대체 얼마나 힘이 들었겠는가?
그때 분명 당가의 선조들도 그 전장에서 최선을 다해 싸웠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있는 이들이 과연 그때 그들의 노고를 기리고 있었던가?
‘어쩌면 우리가 너무 과거에 무심했는지도 모르겠구나.’
찬란한 영광에 심취하다 보면 그 영광을 이룩하기 위해 흘린 피는 묻힌다더니, 그 말이 딱 맞다. 그들이 진정으로 주목해야 했던 것은 마교를 이겨 낸 이들이 거머쥔 성과가 아니라, 그 성과를 이루기 위해 희생했던 이들이었을 텐데…….
가문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가문 내에 남아 있는 백 년 전의 기록들을 다시 살펴봐야겠단 생각을 하던 당패도 어느새 까무룩 잠에 빠져들었다.
두 사람이 잠든 방에선 등잔불만이 고요하게 타올랐다.
* * *
인간은 때때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경험을 한다.
체력적으로는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졌던 이들이 지금껏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은 오직 하나. 저 얄밉고 더러운 화산 놈들의 면상에 죽빵을 꽂아 버리겠다는 의지 하나였다.
그 강렬한 의지가 이들의 정신력을 불살라 몸을 움직이게 한 것이다.
물론 그건 이 연무장을 피와 비명으로 물들였던 이들에게 귀한 경험이 될 것이다. 누군가는 그 과정에서 더 높은 경지에 오를 길을 찾았을 것이고, 누군가는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이 옳은 것인지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을 테니까.
설사 그런 발전을 이루지 못한 이라 해도, 한계까지 싸우고 또 싸웠던 경험은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이다. 어쩌면 훗날 백척간두에 섰을 때, 이 경험 덕에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래,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이다.
……먼 훗날에는 말이다.
“어으…….”
“뒈질 것 같다…….”
“주, 죽여 줘…….”
하지만 이들에게 중요한 건 먼 훗날이 아니라 지금 당장이었다. 제 몸을 초 삼아 힘껏 불타오른 이들에게 남은 것은 녹아 버린 촛농……. 아니, 반쯤 아작 나 버린 몸뚱이와 스치기만 해도 불에 타는 듯한 강렬한 둔통뿐이었다.
입술이 쩍쩍 갈라지고, 눈이 퀭하게 파였다. 얼핏 본다면 ‘개방 거지들인가?’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망가져 버린 이들이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버티고 서 있었다.
“……죽을 것 같습니다, 소가주.”
“……매화도보다 더 힘든 것 같아요.”
“그건 좀 너무 나간 것 아닌가?”
“아니. 정말 그런 것도 같고…….”
이미 매화도에서 한계를 경험했던 남궁세가조차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그때는 목숨에 대한 위기감이 그들을 버티게 해 주었지만, 지금은 그런 비빌 언덕도 없는 상황이다. 박살이 난 몸뚱이를 온전히 정신력으로만 지탱해야 하는 상황 아닌가?
그나마 어떻게든 서서 버티려고 하는 사천당가나 남궁세가는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눈치 볼 것 없고, 체면 차릴 것 없는 녹림도들은 그냥 대놓고 연무장에 철푸덕 주저앉아 곡소리를 내는 중이었다.
“아이고……. 허, 허리가…….”
“거, 형님. 그래도 드러눕는 건 좀 심한 것 아니오?”
“너도 누워 봐. 편해.”
“……그럴까요?”
“저기 두목 봐. 벌써 드러누워 있잖아.”
“……진짜네.”
임소병도 항상 들고 다니던 부채를 내팽개친 채, 반쯤 드러누워 있었다. 원래도 창백하던 얼굴이, 이제는 거의 강시처럼 변해 있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녹림왕. 말씀 적당히 하십쇼. 그러다 금방 뒈지실까 겁납니다.”
“끄으…….”
화산에 대한 호승심에 눈이 돌아가 자신이 병자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이의 말로는 이토록 참혹했다.
평소라면 그런 녹림을 보며 혀를 찼을 당가와 남궁이지만, 지금만큼은 한없이 부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편하겠다.’
‘나도 눕고 싶다.’
‘사파가 낫네. 내가 왜 당가에서 태어나 가지고.’
체면이니 나발이니 하는 것도 최소한의 여유가 있어야 챙길 수 있단 사실을, 두 문파는 새삼 깨달았다.
그때 한 무리가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아이고, 찌뿌드드하다.”
“어제 맞은 데가 너무 아픈데?”
“오늘 복수해야지!”
“한 번은 질 수 있다. 그런데 두 번은 안 돼!”
연무장으로 들어서는 화산의 제자들이었다. 남궁도위와 당패는 어안이 벙벙하여 그 광경을 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쌩쌩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어제 분명 그들이 저 말코……. 아니, 도사 놈들을 늘씬하게 패 버리지 않았던가? 그런데 팬 사람들이 다 죽어 가는데, 얻어맞은 이들은 왜 저리 활기차단 말인가?
수련을 해도 다 같이 했고, 싸워도 다 같이 싸웠는데.
“자, 오늘……. 응?”
선두에서 우렁차게 소리치려던 백천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 양반들 상태가 왜 이래?”
“…….”
“혹시 어제 댁들끼리 또 싸우셨소?”
남궁도위의 입에서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사람인가?’
이건 애초에 근성이나 경험의 차이 같은 걸로 설명이 될 문제가 아니었다. 이 정도면 종자가 다르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은가?
“……저분들 안 때려도 죽겠는데요?”
“음……. 그래 보이지?”
“오늘은 그냥 돌아갈까요?”
“윤종아.”
“예?”
“내 너에게 실망을 금할 수가 없구나.”
“……어째서입니까?”
백천이 근엄한 얼굴로 일갈했다.
“지쳤다 한들, 저들은 명문의 자제! 그런 배려가 오히려 무시이고 결례임을 모르는 것이더냐?”
“아…….”
“이럴 때일수록 최선을 다해 때려잡……. 아니, 상대하는 것이 예의다!”
백천 도장……. 그런 예의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사숙. 그래도 저희가 정파인데…….”
“응? 우리가?”
“……예?”
“어제 저분들이 우릴 악적이라 부르시던데?”
“…….”
백천이 히죽히죽 웃으며 다 죽어 가는 이들에게로 다가갔다.
“악당 취급을 받았으면 제대로 악당 짓을 해 줘야지? 안 그러냐?”
“낄낄낄. 맞는 말입니다.”
“죽인다.”
“잔이 너 이리 와라. 좋은 말 할 때. 이리 와라. 안 그러면 죽인다. 와도 죽이고, 안 와도 죽인다.”
슬금슬금 앞으로 나가는 백천, 조걸, 유이설, 당소소를 보며 윤종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래서야 진짜 악당이지 않은가?
“피의 복수!”
“복수!”
백천이 눈을 까뒤집고 앞으로 달려드는 순간, 갑자기 뒤에서 나타난 이가 그런 그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철 좀 들어라, 이 인간아!”
“아악!”
앞으로 엎어진 백천을 보며 청명이 혀를 찼다.
“내가 이런 걸 믿고…….”
“청명아. 사숙이다…….”
“사숙이니까 이러는 거 아냐! 철 좀 들라고!”
“확실히 그 말도 일리가 있구나.”
백천이 납득하며 몸을 일으켰다. 청명은 혀를 한차례 차고는 강시 같은 몰골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 남궁, 당가, 녹림을 훑어보았다. 그나마 직계들은 상태가 조금 나아 보였지만, 나머지는 거의 숨이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생각 같아서는 한참 더 굴리고 싶지만…… 뭐, 그것도 상황 봐 가면서 해야겠지.”
“……설마 오늘은 쉬는 겁니까?”
“쉬어?”
청명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세상에 그런 말이 있어?”
“……개…….”
“오늘은 대련 대신에 다른 걸 좀 해야겠다.”
“네? 어떤…….”
“일단 손님부터 맞자.”
뜬금없는 말에 남궁도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청명이 한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기 오네.”
그 순간 남궁도위의 귓가에 우렁찬 소리가 들려왔다. 살면서 처음 듣는 짐승의 울음소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