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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119화 (1,120/1,567)

1119화. 그건 다 준비해 놨죠! (4)

“흐으으음.”

청명이 길게 탄식하며 당군악을 마주 보았다. 어쩐지 시름이 깊어 보이는 모습에 당군악이 물었다.

“생각이 조금은 바뀌었는가?”

“아니, 그런 게 아니라요.”

당군악이 의아한 낯으로 보았다. 그러자 청명이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런 사람이 가주가 되는 거구나 싶어서요.”

“……갑자기 그게 무슨…….”

청명이 주먹으로 턱을 괴었다.

“음, 현영 장로님은 그렇게 생각하시는 모양이더라고요. 지금이야 싫다 싫다 하지만, 나중에는 제가 결국 장문이 될 거라고.”

“…….”

“장문인께서도 한 번씩 그런 생각을 하시는 모양인데.”

당군악이 쓰게 웃었다.

사실 그가 보기에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쪽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 화산에서 청명의 영향력은 현종마저 뛰어넘었으니까. 백천이나 윤종이 장문이 된다고 한들, 청명이 마음만 먹는다면 그들을 허수아비로 만드는 건 일도 아닐 테지.

청명에게 그럴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청명이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그 사실이 문파에 있어서 얼마나 큰 문제가 될 수 있는지를 고려한다면 말이다.

당장 당군악만 해도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원로원 때문에 골치를 썩지 않았던가?

“뭘 생각하시는지 알 것 같군.”

그렇게 권력을 둘로 나눌 바에는 차라리 청명 하나에게 몰아 주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과거의 청명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청명은 은근히 사람들을 챙기는 편이기도 하고.

“그런데 그거 쓸데없는 생각이거든요.”

“으음? 어째선가?”

“저는 장문인이 될 일이 없으니까요.”

당군악이 도무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청명은 자신이 권력욕이 없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군악이 본 청명은 세상일이 제 뜻대로 흘러가지 않으면 발작을 일으키고, 어떻게든 물꼬를 돌려놓기 위해 가로막는 산을 터뜨려 버리는 인간이다.

직접 주도하여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사람을 두고 권력욕이 없다고 할 수 있는가? 지금이야 용인할 수 있다고 착각할지 모르겠지만…….

생각에 잠겨 있던 당군악이 담담히 물었다.

“만일 훗날 장문인이 된 윤종 도장이 자네의 생각과 완전히 반대되는 행동을 하게 된다면 어찌할 셈인가?”

“네……?”

당군악이 조금 당황한 듯한 청명을 조금 더 구석으로 몰아붙였다.

“자네가 보기에는 아무리 봐도 손해인 일을 장문인의 권한으로 집행하겠다고 한다면?”

“…….”

“그때 자네는 어쩔 셈인가?”

“설득하겠죠?”

“설득에 응하지 않으면?”

당군악의 목소리에는 고저가 없었다. 이렇다 할 감정이란 게 묻어 있질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 확연하게 들려왔다.

“힘으로라도 굴복시키겠는가? 아니면 틀린 길을 가도록 그냥 방조하겠는가?”

청명은 선뜻 대답을 꺼내 놓지 못했다. 당군악이 이번엔 살짝 질책 어린 어조로 말했다.

“뒤로 물러날 것이라면 권력도 내려놓아야 하네. 내려놓지 않을 거라면 물러나서는 안 되는 것이지. 자네가 의뭉스럽게 굴면 다른 모두가 힘들어질 뿐이네.”

“흠.”

청명이 턱으로 제 손을 꾹꾹 눌렀다.

‘모르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사람이란 안다고 해서 반드시 행하지는 않는다. 지금 당장 코앞에 닥치지 않은 일은 뒤로 미뤄 두기 마련이다. 언젠가는 그 미뤄 둔 일이 더 큰 화가 되어 돌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해도 말이다.

“그러니 차라리…….”

“아니,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요.”

“응?”

청명이 당군악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이 심각한 대화와 어울리지 않게 심드렁했다.

“만약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저는 그냥 내버려 둘 거예요.”

“……자네가?”

“네. 뭐가 이상한가요?”

“당연하지 않은가? 내가 아는 자네는 잘못된 길을 가는 문도들을 보고 참을 사람이 아니네.”

“그건 맞죠.”

“그럼 모순이지.”

“아니에요. 가주님의 질문은 전제부터 잘못됐거든요.”

그 말에 당군악이 의아한 기색을 띠었다.

“전제가 잘못되었다고?”

“네.”

청명이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얼굴로 말했다.

“만약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고민할 필요가 없죠. 내가 틀리고 윤종 사형이 맞을 테니까요.”

“…….”

“내가 설득할 만큼 설득했는데도 마음을 돌리지 않는다는 건 그냥 내가 틀린 거예요. 윤종 사형은 틀린 길을 갈 사람도 아니고, 남의 말에서 자신의 틀린 부분을 발견 못 할 사람도 아니니까요.”

당군악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린가? 사람은 누구나 오판을 하고 잘못을 저지르네.”

“네. 그렇겠죠. 하지만…… 그때의 사형은 사람이 아니라 도사고, 제자가 아니라 장문인이죠.”

“…….”

“사람은 오판하지만, 장문은 오판하지 않죠. 제가 그렇게 만들 거예요.”

당군악이 할 말을 잃었다.

‘이 대체 뭔…….’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사람을 신뢰할 수 있다는 말인가?

“백천 도장도 동일한가?”

“아…… 사숙은 좀 달라요. 그 인간은 전시에는 믿을 만한데, 평소에는 허세가 좀 있어서.”

“…….”

“허튼짓하면 바로 끌어내리고 윤종 사형으로 바꿔 버릴 거예요. 물론 그 전에 이설 사고가 칼로 찔러서 끌어내리겠지만.”

“허…….”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는 당군악을 보며 청명이 히죽 웃었다.

“아시겠죠? 제가 왜 장문인이 되면 안 되는지.”

“…….”

“제가 오늘 가주님이 말씀하시는 걸 보고 느꼈어요. 아, 가주는 이런 사람이 하는 거고, 장문인은 이런 것까지 생각해야 하는구나. 그럼 나는 더더욱 장문인이 되면 안 되겠다.”

“자네도 그러면 되지 않는가?”

“저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거든요.”

청명이 낄낄 소리 내어 웃었다.

“아깝지 않냐고 하셨죠?”

“그랬지.”

이 대화의 시작은 바로 그것이었다. 자소단을 화산의 후대가 아닌 다른 문파에 주는 것이 아깝지 않은가? 그 말에 대한 대답이 지금 나온다.

“하나도 안 아까워요.”

“……정말인가?”

“네.”

청명이 어깨를 으쓱한다.

“그러니까 말씀드리는 거잖아요. 저는 화산의 미래 같은 건 몰라요. 이해해 보려고 애는 썼는데,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아무리 이해한다고 해도 내가 진심으로 그걸 챙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거든요?”

“하면 되지 않는가?”

“머리로 되는 게 있고, 가슴으로 되는 게 있잖아요.”

당군악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청명이 손사래를 쳤다.

“그러니까 얼굴도 모르고, 언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후예들을 챙기겠답시고 지금 당장 있는 걸 안 써먹느니, 그냥 자소단을 풀어서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릴래요. 그게 제 입장에서는 백배 나은 일이거든요.”

“……알 수 없는 말이로군. 아무리 지금의 제자들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그게 대대로 이어질 화산의 광영과…….”

“비교할 가치도 없어요.”

순간 당군악이 움찔했다. 말허리를 끊고 들어온 청명의 목소리에서 알 수 없는 섬뜩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살펴본 청명은 여전히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아니면, 뭐 그렇게 만들면 되죠. 그 대가로 살아남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제자가 자소단 백 개보다 더 가치 있는 사람이 되도록. 그 이상의 것을 후예들에게 전해 줄 수 있는 이가 되도록.”

“…….”

“그거면 충분한 거 아닐까요?”

당군악은 결국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모르겠군, 도통.”

“그래서 말씀드리는 거잖아요. 그런 건 내가 잘하는 게 아니라니까요. 제가 이번에 느낀 게 뭔 줄 아세요?”

“무엇인가?”

“모든 걸 다 내가 할 필요는 없다는 거죠. 각자 잘할 수 있는 걸 하면 돼요.”

청명이 고개를 돌려 연무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백천 사숙은 화산을 이끌고 발전시키겠죠. 저 사람보다 그걸 잘 해낼 사람은 없을 거예요. 윤종 사형은 지금 화산에 부족한 도(道)를 이룩해 낼 사람이죠. 명성이 더 높을 사람은 사숙이겠지만, 후대에 더 큰 영향을 줄 사람은 윤종 사형일 거예요.”

“…….”

“이설 사고는 화산의 검의 교본이 될 사람이죠. 저 사람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후예들이 검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질 거예요. 조걸 사형은…… 저 인간이야 뭐 딴죽이나 걸어 대겠지만, 문파에는 그런 사람도 꼭 필요하거든요?”

“음…….”

“그리고 가주님 딸내미는 화산에는 부족한 여제자들을 육성할 사람이죠. 그건 사고도 사제만큼 잘하진 못할 거예요. 그리고 소통도 잘하니 사숙이나 사형에게는 직접 못 할 말을 대신 전달해 주는 통로가 되어 주겠죠.”

청명이 어깨를 으쓱한다.

“나머지도 마찬가지예요. 백상 사숙은 화산의 재정을 풍족하게 해 줄 거고, 다른 청자 배 놈들은 지금의 경험을 후대에 생생하게 이어 주겠죠. 모두가 각자 해 줘야 할 일이 있어요. 잃어도 되는 사람 따위는 한 명도 없죠.”

당군악은 어쩐지 새삼스런 심정으로 청명을 다시 보았다.

청명이 화산의 제자 하나하나를 이토록 세심하게 바라보고 있다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또 하나의 의문이 생겨났다.

“그럼, 자네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인가?”

“저요? 저야 뻔하죠.”

청명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화산의 적을 베는 검이요.”

“…….”

“지금 화산을 위협하는 놈들을 베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거예요. 자소단? 그까짓 건 하나도 아깝지 않아요. 지금 화산에 몸을 담은 제자 하나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자소단 백 개가 아니라 천 개도 안 아까워요. 그깟 게 뭐 대단하다고요.”

당군악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나는 자네를 나름 잘 안다고 생각했건만…… 여전히 잘 모르겠군.”

“하나만 아시면 돼요.”

“……무얼 말인가?”

“제가 그만큼 진심으로 사천당가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걸요.”

당군악이 조금 뚱한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히히 웃는 낯을 보고 있자니 그냥 저도 모르게 웃게 되었다.

“……부려 먹을 거라면 자소단이나 잘 챙겨 주게나.”

“그럼요. 당연하죠.”

청명을 묘한 눈으로 보던 당군악이 몸을 일으켜 걸음을 뗐다.

“가시게요?”

“뻔한 승부는 보는 맛이 없으니까.”

“나름 재밌는데. 뭐, 이따 봬요.”

당군악이 몸을 돌린 채 입을 열었다.

“그리고…… 한 가지는 정정해 주겠네.”

“네?”

“자네가 화산의 적을 베는 검이라 했지?”

“예.”

“……그 귀한 영단 천 개를 쓰는 한이 있어도 제자 하나와도 바꿀 수 없다고 말하는 이를 베어 내는 검이라 하지는 않네.”

“…….”

“그건 지키는 검이라 하지. 화산을 지키는 검.”

그 말을 끝으로, 당군악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등에 꽂혀 오는 청명의 시선을 느끼며 말이다.

‘묻지 못했군.’

당군악이 느리게 눈을 감았다.

한 가지, 정말 묻고 싶은 게 있었다. 하지만 당군악조차도 차마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는 질문이었다.

‘모두가 그렇게 완벽히 성장하여 각자의 자리에서 화산을 이끈다. 그게 이상적이라는 건 알겠네.’

분명 그리된 화산은 더없이 위대한 문파가 될 것이다. 어쩌면 역사를 통틀어도 다시없을 만큼 위대한 문파가 되겠지.

하지만 청명의 역할이 화산을 지키는 검이라면, 화산의 적을 베어 내는 검이라면…… 화산의 적이 사라진 세상에서 청명의 자리는 대체 어디인가?

검이 더는 필요하지 않은 세상에서 그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할까?

‘정말 장문인의 자리가 제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당군악이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너무 먼 훗날의 이야기다. 그래, 아직은 너무 멀다. 넘어야 할 산이 아직도 까마득하게 많은 그들이 입에 올릴 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당군악은 휘적휘적 걸음을 옮겨 멀어졌다.

그리고 그 뒷모습을, 청명은 내도록 주시했다. 한없이 어둑하게 가라앉은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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