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8화. 그건 다 준비해 놨죠! (3)
“으랴아아아아앗!”
백천이 날아드는 비도를 단숨에 쳐 냈다.
스치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혼수상태에 빠뜨릴 만큼 강한 독이 듬뿍듬뿍 발린 비도가 검에 담긴 힘을 이기지 못하고 하늘 높이 튕겨 올라갔다.
“……대충 알겠군.”
“그러게요.”
백천이 검을 꽉 움켜잡으며 눈앞에 선 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이 수련은…… 단순히 적응하는 게 다가 아니라는 거로군?”
당가와 남궁, 그리고 녹림과 싸우면서 알게 됐다. 그토록 싸웠음에도 그들의 실전 경험이 여전히 부족하다는 것을 말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대인전에선 경험이 차고 넘치지만, 집단전 경험은 극도로 부족하다. 특히 서로 성향이 다른 여러 집단이 한데 어우러져 싸우기 시작하면 제 실력을 반도 발휘하지 못하게 되어 버린다.
아마 청명이 놈의 눈에는 이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수련을 시켰겠지.
그리고 이번에도 청명이 놈의 수작은 확실한 효과를 발휘했다. 싸우면 싸울수록 이 난전을 어떤식으로 치러야 하는지 급속도로 이해하게 되었다. 머리가 알기 전에 몸이 먼저 이해하고 움직인다는 건 이런 경우를 두고 말하는 것이리라.
그래, 좋다. 다 좋다. 문제는…….
‘그걸 우리만 겪는 게 아니라는 거지.’
저 양반들은 집단전에 대한 경험은 물론이고, 실전 경험마저 이 수련 하나로 모조리 흡수하는 중이다.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고, 하루가 다르게 날카로워진다.
상대하는 백천이 깜짝깜짝 놀랄 만큼 말이다.
‘그동안 우리를 보는 사람들의 기분이 이랬을까?’
바로 앞에서 눈에 보이도록 성장하는 이들을 지켜본다는 것은 굉장히 색다른 경험이었다. 특히나 검을 맞대며 그 성장을 몸으로 느껴 보기까지 하면 감정은 배가 된다.
성장하는 이를 지켜보는 건, 뿌듯한 일인 동시에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절대 따라잡히지 않겠다는 의지가 절로 불타올랐다.
이건 분명 좋은 일이었다.
……단순히 저들의 ‘실력’만 성장하는 거라면 말이다.
“근데…… 이건 조금…….”
백천은 그를 향해 슬금슬금 다가오는 이들을 떨떠름하게 바라보았다.
양손에 비도를 든 채 비릿한 미소를 흘리는 당패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애초에 당가에게 있어 이 수련은 화산을 이기기 위해 시작된 것이니까.
하지만…….
“흐으음.”
뭔가 조금 껄끄럽지만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슬금슬금 조여 오는 남궁도위나…….
“흐흐흐흐…….”
대놓고 ‘너 이 새끼 잘 걸렸다’ 하는 얼굴로 다가오는 임소병은 경우가 조금 다르지 않은가?
“저기…….”
백천이 슬그머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다가오는 이들을 향해 넌지시 말을 건넸다.
“뭔가…… 수련의 의미가 조금 퇴색되는 것 같습니다……?”
“아?”
“……이거 난전 아니었습니까?”
“하하하.”
그 말을 받은 것은 다름 아닌 임소병이었다.
“아이고, 우리 백천 도장께서 뭔가 착각을 하고 계신 모양인데.”
“예?”
“……이게 아직도 수련 같아 보이시는 모양이지? 응?”
대놓고 으르렁대는 임소병을 보며 백천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니, 뭐…… 생각해 보면 수련은 맞지 않소?”
하지만 당패는 과연 저 저열한 사파 놈과 의견이 다른 모양이었다. 과연 명문 사천당문의 소가…….
“수련은 수련이지. 화산만 혼자 재미 보는 수련.”
“…….”
아니, 아니다. 당패가 좀 더 차갑다. 하기야…… 생각해 보면 악감정은 당가가 더 쌓였겠지.
“그 재미 우리도 좀 같이 보자는데…… 영 속이 좁으시군요. 백천 도장.”
“……그래서 어제 저희가 먹는 밥에 독을 타셨습니까?”
“하하하. 적을 상대함에 있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알려 주신 건 바로 화산이 아닙니까?”
“그래도 그건 경우가…….”
잠자코 듣고 있던 남궁도위가 입을 열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백천 도장. 악감정은 조금도 없습니다.”
“…….”
“이건 그저 전략적인 판단일 뿐입니다. 그냥 뒤섞여서 마구 싸워 대니 화산만 계속 이기잖습니까? 패하는 전쟁을 반복하는 것처럼 멍청한 일도 없지요. 안 그렇습니까?”
그렇죠, 남궁 소가주.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말이 설득력 있게 들리려면 그 들썩이는 검을 조금 옆으로 옮긴 뒤에 말씀하셔야 할 것 같은데……. 검이 자꾸만 움찔대는 게, 제 목을 찔러 대고 싶어서 못 참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이는 건…… 착각입니까?
“지금까지는 재미 좋았겠지.”
“이기고 돌아가는 기분이 아주 상쾌하셨겠지요.”
“슬슬 패배의 쓰디쓴 맛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저희는 충분히 맛볼 만큼 맛봐서 강해졌거든요. 이건 다 화산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하는 일입니다.”
“입에 침이나 바르고…….”
“하하하. 농담도.”
남궁도위가 너스레를 떨며 백천의 말허리를 잘랐다.
“화산 정도면 우리 셋을 동시에 상대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을 겁니다.”
“문제 있는데요?”
“아암. 그렇겠지요. 다름 아닌 화산이니까.”
“……문제 있다니까요? 저기요?”
백천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에 따라 그의 주위를 지키던 다른 화산 제자들도 검을 꼬옥 움켜쥔 채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삼면이 포위되었고, 뒤쪽은 전각이 가로막고 있는데 어디로 갈 수 있겠는가? 애초에 이곳은 전략적인 후퇴가 존재하지 않는 전장이 아니던가?
“청명 도장의 깊은 가르침을 이제야 이해합니다.”
“일단 이기려면 대가리부터 쳐야 한다 이 말씀이시죠?”
“여기서 대가리는 화산이고?”
각 문파를 이끄는 세 사람의 눈에 광기가 어렸다. 말로야 적당히 체면을 차리고 있지만, 저 눈빛에는 자비가 없다. 당장에라도 화산을 때려잡아 버리겠다는 각오가 들불처럼 타고 있을 뿐이다.
백천이 헛헛한 웃음을 터트렸다.
‘……개새끼들.’
저들의 실력이 느는 건 참 좋은 일이다. 화산 역시 이들을 보며 의욕을 불태울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더럽고 치사하게 구는 건 선 넘었지!”
“조져!”
“뭉개 버려!”
“오늘 잘 걸렸다! 화산 새끼들아!”
순식간에 결성된 당가, 남궁, 녹림의 연합 세력이 화산을 덮쳐 왔다. 그 물밀듯 밀려오는 이들을 본 화산 제자들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온다!”
“망할 새끼들!”
“야! 막아, 막아!”
“아악! 독부터 뿌리지 말라고!”
화산은 격렬히 저항했지만, 이번 기회에 화산을 완전히 밟아 놓겠다고 각오한 세 문파는 앞뒤를 돌아보지 않고 달려들었다.
“밟아!”
“네놈들의 검에 죽어 간 동료들의 복수다!”
“안 죽였어, 이 새끼야!”
“알 게 뭐야!”
그 혼란 속에서 백천의 가슴엔 한 줄기 비애가 어렸다.
청명아……. 전 중원의 화산화라더니, 이건 전 중원의 청명화 아니냐. 나는 이게 정말 괜찮은 건지 잘 모르겠다. 응? 청명아…….
한편, 수련장의 한쪽.
비정한 강호의 현실을 그야말로 극명하게 보여 주는 수련장을 지켜보던 청명이 손에 든 콩을 입 안에 톡 던져 넣었다.
“재밌게들 노네.”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지 뭐.
“괜찮겠는가?”
“뭐가요?”
“화산이 얻어맞고 있는 것 같은데?”
당군악의 말에 청명이 피식 웃었다.
“저 새끼들도 요즘에 허파에 바람이 좀 찼는데, 이 기회에 좀 빼 주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하하.”
당군악이 크게 웃고는 청명을 바라보았다.
“하하. 재미있는 농담…….”
하지만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청명이 전혀 웃고 있지 않아서였다.
“……농담이 아닌가?”
“…….”
“크흠.”
당군악이 작게 헛기침을 했다. 잠깐이지만 청명을 조금 얕봤다.
청명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애송이들 주제에 요즘 지들이 센 줄 안다니까요.”
“센 줄 안다라…….”
당군악이 고소를 머금었다.
지금 화산은 당가와 남궁, 그리고 녹림을 동시에 상대하고 있다. 물론 밀리고 있고, 그 세 세력이 각 문파의 온전한 전력인 것도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상대하고 있단 것이 중요한 것이다.
저들마저 애송이라 해 버리면 대체 이 중원에서 애송이 아닌 이들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자네는 평가 기준이 과도하게 높은 것 같네.”
“중원의 평가 기준이 과도하게 낮은 거예요.”
“그럴지도 모르지.”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다시 연무장을 바라보던 당군악이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넌지시 입을 열었다.
“괜찮겠는가?”
같은 질문이지만 이번에는 그 뜻이 달랐다. 그리고 청명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낄 일은 아니에요.”
“하지만 자소단은 그리 쉬이 낭비할 만한 영단이 아닐세. 화산에서 쓴다면 더 큰 효과를 낼지도 모르지.”
“영단 퍼먹는다고 다 강해지면 황제가 세상에서 가장 강하겠죠. 아니면 상인 놈들이 제일 강하든가.”
“그도 맞는 말이네만…….”
중요한 건 조화다.
영단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엔 한계가 있다. 일반적으로는 영단을 복용하지 않았을 경우, 내력보다 무학의 경지가 더 높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영단을 복용하면 무위가 비약적으로 상승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정 이상의 내력을 보유한 이후부터는 영단이라는 게 딱히 쓸모가 없다. 만일 이렇지 않았다면 각 문파는 영단을 후기지수가 아닌 문파의 최고수에게 몰아 주었을 것이다.
“화산 놈들은 워낙 퍼먹어 대서 이제 별 의미가 없어요.”
“물론 그도 맞는 말이지. 그래, 맞는 말이야. 하지만…….”
당군악이 시선을 돌려 청명을 똑바로 보았다.
“화산의 제자가 될 이들이 저들이 마지막은 아니잖은가?”
그 말에는 청명도 입을 다물었다. 나직이 탄식한 당군악은 작정했다는 듯 말을 늘어놓았다.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빙정과 자목초는 무한히 나는 게 아닐세. 이미 북해에서는 빙정의 산출량이 극단적으로 떨어졌지. 그리고 그동안 지독히도 파냈을 테니, 앞으로는 극소량만 얻을 수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걸세. 그게 아니면 질이 낮은 빙정을 쓰거나.”
“으음…….”
“자목초 역시 마찬가지일세. 과거의 자목초는 그리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 아니었지. 하지만 이제는 운남에서도 특정한 곳에서만 자생하지 않는가? 재배조차 불가능한 물건이 날이 갈수록 자생지까지 줄어들고 있지.”
“으으음.”
청명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 말도 사실 틀리지 않다. 북해와 운남의 상황을 본다면 자소단이란 무기는 곧 효용이 다할 게 분명하다.
“어쩌면 이번에 자네가 만들 자소단이 마지막일지도 모르네. 그런데 그 귀하디귀한 자소단을 저들에게 주겠다는 건가? 화산의 후대가 아니라?”
“…….”
“장문인께서 이 사실을 모르실 리가 없네. 그리고 제자들도 곧 알게 되겠지. 이건 그리 쉽게 판단할 문제가 아니야.”
당군악이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자소단을 잘 활용하기만 한다면 화산은 다음 대는 물론이고, 어쩌면 그 후대에도 천하제일검문의 자리를 확고히 할 수 있게 될지도 몰라. 하지만 그 자소단을 이리 써 버리면 대대로 화산의 광영을 이룰 영약은 더 이상 남지 않을 걸세. 자네는 정말 그 결정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이야기를 듣는 동안, 청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도무지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운 표정만을 짓고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