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4화. 나 잘할 수 있을까? (4)
“……끄응. 몸이 성한 데가 없네.”
당잔이 제 얼얼한 턱을 주물렀다. 망할 조걸 놈이 후려친 턱이 아직까지 욱신거렸다.
“망할 새끼…….”
살기로 번들대던 조걸의 눈빛까지도 아직 생생하다. 그건 분명 감정이 있는 대로 실린 주먹질이었다.
이를 뿌득뿌득 갈던 당잔이 비명을 지르며 턱을 부여잡았다. 이를 갈아붙이니 턱이 더 아파 오기 시작한 것이다.
“다음엔 기필코 죽인다, 그 새끼!”
악감정을 날것 그대로 드러낸 당잔이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한때나마 동향 사람이라고 좋은 감정을 가졌던 게 어리석게만 느껴졌다.
“형님. 화산 새끼들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 형님?”
무심코 당패에게 말을 건네던 당잔이 고개를 갸웃했다. 당패가 딱 봐도 심각해 보이는 표정으로 침상에 걸터앉아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으음.”
고민에 잠긴 당패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많이 아프시죠?”
“…….”
“그분이 독하긴 하더라고요.”
그 말에 당패가 저도 모르게 제 눈두덩을 문질렀다. 유이설의 정권이 틀어박혔던 눈이 어느새 시커멓게 멍들어 있었다.
“소소 누나가 사고, 사고 하면서 따르길래 왜 저러나 했더니…… 과연 보통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그런 표정 짓지 마십시오. 살다 보면 좀 맞을 수도 있지.”
“그게 아니다.”
“……예?”
당패가 와락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당잔은 그가 여자에게 얻어맞아 마음이 상한 줄 아는 모양이다. 물론 사천당가는 기본적으로 가문의 여인들에게 무학을 전하지 않는 곳이니만큼, 웬만해서는 여자들에게 얻어맞아 볼 일이 없다. 그러니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충격이 될 수도 있는 일이긴 하다.
하지만 지금 당패가 심각해진 이유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잔아.”
“예, 형님.”
“……너는 괜찮으냐?”
“저요? 저는 괜찮습니다. 이가 좀 흔들리는 것 같기는 한데 이 정도는 뭐…….”
“아니, 그 말이 아니다.”
당패가 고개를 내저었다.
“또 지지 않았느냐?”
“아, 그거 말씀이시군요.”
당잔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뭐…… 지긴 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진 것도 아니잖습니까? 독과 암기를 실전용으로 사용했으면 당연히 이겼을 것 같은데.”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하려 했던 당잔은 순간 당패의 표정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당패의 표정이 생각 이상으로 심각해서였다.
“물론 네 말대로 우리가 극독을 사용하고, 상대의 피해를 생각지 않는 실전용 암기를 사용했다면 상황이 좀 나아질 수야 있었겠지. 하지만 그건 화산도 마찬가지가 아니냐?”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대련이기에 네 턱이 아픈 것이고, 내 눈이 멍든 것이지. 실전이었다면 네 목이 잘리고, 내 눈이 날아갔을 것이다.”
그제야 당잔의 얼굴이 덩달아 심각해졌다. 당패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들은 검수다. 특히나 화산의 검술은 사파 이상으로 독랄하다는 평을 받지 않더냐? 저들이 실전에서 한 사람에게 두 번의 칼질을 할 일이 있을 것 같더냐?”
“…….”
“내가 매화도에서 본 저들의 검은 그 어느 문파의 검보다 간결하고, 또한 잔혹했다. 만약 그 검이 우리에게 휘둘러졌다면…… 저들이 우리를 쓰러뜨리느라 시간을 끌 필요도 없었겠지. 검격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가는 순간 목숨이 끊어졌을 테니까.”
당잔은 이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만약 오늘 벌어진 대련이 실전이었다면 그가 본 것은 두 눈을 희번덕대며 그의 턱을 돌려 대던 조걸의 얼굴이 아니라 그의 목을 베고 지나가는 싸늘한 조걸의 뒷모습뿐이었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새삼 등골이 서늘해져 왔다.
“물론 실전이었다면 저들도 성치는 못했겠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결과가 바뀌지 않았을 것 같구나.”
“……형님.”
“부정할 수 없는 걸 부정하려고 애쓰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다. 중요한 건, 있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겠지. 너는 지금 당가의 문제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당패의 물음에 당잔은 고민에 빠졌다. 막상 문제점을 찾으려고 하면 한둘이 아니었다.
“생각나는 건 너무 많지만…… 결정적인 건 하나라고 봅니다.”
“무엇이냐?”
“실전 경험.”
당패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내 생각도 같다.”
두 사람이 생각하는 문제가 같은 이유가 있었다. 이번 대련을 겪고 나서야 두 사람은 사천당문이라는 문파가 특정한 다른 문파와 제대로 싸워 본 경험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 것이다.
“……매화도에서는 이런 문제가 없었는데…….”
“착각한 거지.”
당잔의 볼멘소리에 당패가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그때 우리는 당가의 위엄을 만천하에 떨쳤다고 기뻐했지만…… 돌이켜 보면 그건 당가가 잘한 것이 아니라 화산이 대단했던 것이다. 그들이 당가에 쏟아질 모든 공격을 막아 주며 길까지 뚫어 내지 않았더냐?”
“심지어는 물속에서 우리를 노리는 수적들까지 상대해 줬습니다.”
“그래. 하지만 우린 그게 당가의 실력이라 생각했다. 동료가 목숨을 걸고 방패를 들어 보호해 주는 와중에 편안하게 화살만 쏘아 댄 궁수가 제 치적을 자랑하는 꼴이었지.”
그 신랄한 평가에 당잔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과히 냉정한 평가이지만,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이 말을 하며 속이 쓰릴 사람은 그보다는 당패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된 실전을 겪어 보지 않으면 문제를 발견할 수가 없다. 이번 대련을 겪고 나서야 나는 당가가 가진 문제들이 보이더구나.”
당잔이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느껴지는 점이 많았다.
당가는 거리를 두고 싸울 때는 천하제일의 문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거리가 가까워지는 순간부터는 그 실력의 반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
문제는, 지금부터 그들이 겪어야 할 전투가 사방에서 적이 몰아치는 난전이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 보호 없이 적에게 노출된다면 무슨 꼴을 당할지 너무도 쉬이 짐작되지 않는가?
굳은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던 당잔이 문득 고개를 번쩍 들어 당패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형님.”
“음?”
“그럼…… 화산검협은 이 모든 걸 예상하고 이런 상황을 만든 것입니까?”
“아마도.”
당패가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직접 겪고 느껴 보라는 의미였겠지. 화산검협은 실전에 있어서 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니, 당가가 가진 문제도 명확하게 보이지 않았겠느냐?”
“가주님께서도 모르셨던…… 아니, 가주님께서는 알고 계셨을지도 모르지만…… 여하튼 그런 부분을 화산검협이 먼저 지적한다고요?”
“착각하지 말거라.”
그 순간 당패의 목소리가 살짝 가라앉았다.
“가주님께서 화산검협보다 더 강한 고수일 수는 있겠지만, 그것과 실전에 대한 경험은 별개의 문제다.”
“…….”
“다른 문파들이 목숨을 건 싸움에 노출될 동안, 당가는 언제나 한 발 물러서 있었다. 심지어 구파일방조차 목숨을 걸어야 했던 장강참변 때나, 이번 항주마화 때도 당가는 참가하지 않았잖느냐?”
“……그건 그렇습니다만.”
“근 십여 년간 우리가 겪은 실전이라고는 매화도뿐이다. 하지만 저 화산검협은 몇 해 전부터 제 목숨을 위협하는 적과 끊임없이 싸워 왔다. 만인방에 본산이 습격당하기도 했고, 북해에서는 저 마교와 싸웠지. 흑룡채 전장의 한중간에서 장일소와 싸웠고, 이번에는 또 어떠냐?”
당잔은 순간 머릿속이 아뜩해지는 기분에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우리가 그동안 화산을 친근하게 여겨 온 것은 사실이지만, 어쩌면 그 친근함 때문에 화산이라는 문파와 화산검협이라는 무인을 너무 쉽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구나. 저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대단한 이들이다.”
당잔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냥 말로 해 줬어도 될 텐데.”
“그럼 이해했겠느냐?”
“…….”
“이해하는 척은 했겠지. 하지만 뼛속 깊이 새기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람이란 직접 겪지 않은 일은 언제나 대충 받아들이는 법이니까.”
당패가 욱신거리는 제 눈 주변을 매만졌다.
“그만한 교훈을 얻는 대가라면…… 이 정도 상처쯤은 싸게 먹힌 것이지.”
당잔은 순간 멍하니 당패를 보았다. 당패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러느냐?”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잔은 답하지 않고 고개를 내저었다.
이럴 때면 실감하게 되었다. 왜 당패가 사천당가의 소가주고 그는 그저 당군악의 아들일 뿐인지 말이다. 그저 나이 때문이라고 보기에도 어렵다. 그릇이 다르고, 받아들이는 시각이 다르다.
한때나마 당패가 실각하고 그가 소가주가 될지도 모른다는 꿈을 가졌던 게, 이제 와선 우습기만 했다.
“형님. 그럼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겪어야지.”
당패의 얼굴에 결연한 의지가 스쳤다.
“화산검협이 저리 정성스레 판을 깔아 주지 않았느냐? 부족한 실전을 최대한 보완하라고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화산의 제자들을 아낌없이 내어 주지 않았느냐? 그럼 감사하게 이용하는 게 우리가 해야 할 도리 아니겠느냐?”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다만.”
“예?”
당패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고 해서 계속 지금처럼 무작정 깨질 수는 없지. 아이들을 모아 오너라.”
“무엇을 하시려고…….”
“가주님이나 화산검협이 우리에게 바라는 일이 그저 부딪쳐서 깨지라는 건 아닐 것이다. 필사적으로 고민하고, 또 보완해서 화산과 대등하게 맞설 방법을 찾아내라는 것이겠지.”
“…….”
“그건 너와 내가 둘이서 고민한다고 결론이 나올 만한 문제가 아니다. 조금 더 많은 이들의 말을 듣고, 조금 더 많은 이들이 생각해야 할 문제지.”
“하지만 형님……. 그렇게 하면 형님의 권위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구나. 화산 내에서 화산검협의 권위는 누구보다 강하다. 그렇다 해서 어디 화산검협이 귀를 막고 제 말만 따르라고 소리치는 이더냐?”
“그런 것 같은데요?”
“…….”
말문이 막힌 당패가 순간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 어……. 아니. 그……. 그래, 그렇긴 한데. 그게…… 크흠!”
당패가 재빨리 헛기침해 분위기를 환기했다.
“여하튼 내가 보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권위를 내세우는 게 아니다. 어쩌면 화산의 힘은 윗대부터 아랫대까지 배분을 내려 두고 격의 없이 대화하고 소통하는 것에서 나오는 걸지도 모른다. 바로 앞에 가장 훌륭한 예시가 있는데 눈과 귀를 막고 하던 방식만 고수하는 것은 멍청한 짓일 뿐이다.”
당패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조금 더 열어 보자꾸나. 화산검협이 지금 우리에게 이런 일을 시키는 건, 우리에게 조금 더 다가오고 제 마음을 조금 더 열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저만큼 가진 이도 자신을 여는데, 우리가 뭐라고 꽉 닫은 채 가진 것만 지키겠느냐?”
그 말에 당잔이 고개를 내저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형님의 말씀이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화산은 그래 봐야 신흥 문파에 불과하고, 우리 당가는 이미 수백 년을 사천의 패자로서 실력을 증명해 온 문파 아닙니까. 당연히 모두의 반발이 있을 겁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당잔이 단호해진 눈으로 당패를 마주 보았다.
“형님의 말씀은 따르겠습니다. 단, 제 눈에 화산이 대단해 보여서가 아니라, 그 명을 내리시는 분이 다름 아닌 형님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잠시 말문이 막힌 듯 침묵하던 당패가 고개를 한 번 푹 숙이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구나.”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당잔이 서둘러 방을 나선 후, 당패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구나.’
모두가 한뜻으로 모인다면 모든 것이 쉬이 풀릴 줄 알았다. 하지만 서로 다른 이들이 한곳에 모이는 순간, 보이는 것은 서로가 가진 차이와 자신의 부족한 점이었다.
“그렇다 한들 외면할 수는 없겠지.”
당패가 가볍게 주먹을 그러쥐었다.
화산이 천우맹을 이끈다 한들, 그들의 옆에 조역으로만 남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당가는 결코 화산을 보좌하는 이들이 되지 않을 것이다. 때로는 화산을 이끌기도 하고, 언제든 화산이 기댈 수 있는, 그런 문파가 되어야 한다.
그게 당가인의 자존심이고, 당가 소가주인 당패의 자존심이었다.
“그 전에 일단은…… 저 화산의 마귀들에게도 패배가 무엇인지 한 번은 알려 줘야지. 우리가 느낀 것을 고스란히 느껴 보도록.”
당패가 뿌득뿌득 이를 갈았다.
안타깝게도 그는 모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이 어느새 화산 마귀들과 닮아 가고 있음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