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1113화 (1,114/1,567)

1113화. 나 잘할 수 있을까? (3)

“똑바로 안 박아?”

“끄으으응…….”

“끄으읍…….”

돌덩이를 주렁주렁 매단 채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는 수백의 인원을 바라보며 청명이 눈을 희번덕댔다. 그 서슬 퍼런 눈빛이 천우맹도들의 등을 사정없이 찔렀다.

“사람이 안 하던 배려라는 걸 해서 좀 쉬게 해 줬더니! 그새를 못 참고 싸움박질을 해 대?”

“…….”

“이거 나한테 시위하는 거지? 힘이 남아돌아 죽겠는데, 괜히 쉬게 했다고 반항하는 거지? 어?”

그 순간 머리를 박고 있던 조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을 들었다.

“뭐?”

“오해하는 모양인데. 우리가 힘이 남아돌아서 싸운 게 아니다.”

“그럼?”

조걸이 어깨를 으쓱했다.

“힘이 진짜로 없었는데, 사람이 너무 빡이 치니까 힘이 나더라고.”

“아.”

“신기하지? 하하.”

청명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알 것 같아, 사형.”

“그렇지?”

“어. 내가 지금 딱 그런 기분이네, 이 새끼야!”

땅을 박차고 날아든 청명의 발이 조걸의 얼굴에 틀어박혔다.

“꿱!”

조걸이 바닥을 나뒹굴자 청명이 그런 그의 배 위로 올라탔다. 이내 청명의 상체가 오랜만에 활기차게 좌우로 돌아갔다.

“죽어! 죽어! 제발 좀 죽어!”

“악! 아악! 악! 사, 살려…….”

“죽어! 이 새끼야! 죽어!”

낮에는 당가와 싸우고, 저녁에는 식당에서 여기저기 얻어맞고, 이제는 청명에게까지 신나게 맞고 있는 조걸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이곳에 있는 누구도 그를 동정해 주지 않았다.

‘쟤는 맞을 만해.’

‘솔직히 죽어도 할 말 없지.’

‘여태 살려 둔 청명 도장이 참된 도인이지.’

엉망으로 뒤틀렸던 네 문파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한마음이 되는 뜻깊은 순간이었다.

“후욱! 후욱! 후욱! 후욱!”

처참히 널브러진 조걸을 두고 몸을 일으킨 청명이 두 눈알을 번들대며 다른 이들을 노려보았다.

모두가 재빨리 눈을 감고 청명의 시선을 외면했다. 눈 마주치면 그들도 저 꼴이 될 것이다.

“내가…… 어, 그래. 내가…… 생각이 좀 짧았네.”

“…….”

“이렇게나 다들 체력이 좋고 활기찬데. 내가 괜한 걱정을 사서 했어.”

이곳의 모두는 사람의 목소리에도 저토록 귀기가 서릴 수 있단 걸 깨달았다. 무척 색다른 경험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공포스러운 경험이기도 했다.

“다 내 잘못이지! 다!”

“…….”

“이렇게 다들 체력이 좋고 의욕이 있는 줄 알았으면 미리미리 강도를 좀 올렸을 텐데. 어? 댁들이 그 수련 다 하고도 패싸움을 할 정도로 힘이 남아도는 줄 몰랐던 내 잘못이네!”

“자, 잠깐만 청명아!”

백천이 기겁해서 고개를 들었지만, 이미 늦어 버린 뒤였다.

“사람이!”

청명이 바닥을 쾅 밟으면서 소리쳤다.

“같은 잘못을 반복하면 안 되지. 암, 그렇고말고.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 이 새끼들아. 너희들이 죽나 내가 죽나! 일단 사흘만 안 자고 굴러 보…….”

“그, 그러다 죽어!”

“죽으라고 하는 거야, 이 새끼야!”

눈을 까뒤집은 청명이 이번엔 백천에게로 달려들었다.

연무장이 순식간에 난장판으로 돌변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현종이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절망적인 한숨이 쏟아졌다.

‘어떻게…….’

화산에서 천우맹이 됐는데 어떻게 조금도 바뀐 것이 없는가? 어떻게…….

원시천존이시여…….

* * *

“죽을 것…… 같다.”

“전 이미 죽었어요.”

“소, 소소야. 나 허리가 잘못된 것 같은데.”

“……저기 침 있으니까 가져다 적당히 꽂아요…….”

방바닥에 널브러진 화산 제자들의 입에서 죽는소리가 새어 나왔다.

당가와 싸우면서 얻어맞은 곳도 아프고, 그 뒤에 그냥 다 뒤엉켜 싸우면서 얻어맞은 곳도 쑤신다. 하지만 가장 고통스러운 곳은 청명의 화풀이에 혹사당한 허리와 무릎이었다.

아니, 어떻게 무인과 싸우면서 맞은 곳보다 바닥을 구르면서 혹사당한 곳이 더 아플 수가 있단 말인가? 이쯤 되면 청명의 굴리기도 슬슬 예술의 경지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청명이 새끼한테 누가 꼰질렀냐?”

“백아 같던데요? 싸움 나고 얼마 안 지나서 문 쪽으로 달려가는 거 제가 봤어요.”

“더러운 족제비 놈……. 사형제를 배신하다니…….”

“끄응…….”

당소소가 분노에 치를 떠는 와중에 백천이 힘겹게 몸을 일으켜 의자에 앉았다.

“죽겠다…….”

깔끔한 의복을 유지하는 데에는 세상 그 누구보다 뛰어난 백천이지만, 지금 그의 의복은 땀과 흙이 엉겨 엉망진창이었다. 몸을 씻을 엄두도 나지 않을 만큼 힘이 들었다.

조걸이 투덜거렸다.

“아오. 그 당가 놈들 괜한 소리로 시비를…….”

“넌 제발 그 입 좀 닥쳐, 이 새끼야!”

“악!”

윤종이 조걸을 사정없이 걷어찼다. 따지고 보면 쉽게 넘어갈 수 있었던 일이 저놈의 조동아리 때문에 커진 것 아니던가?

“성질 같아서는 확 그냥…….”

윤종이 눈을 까뒤집자 백천이 그런 그를 만류했다.

“그만하거라, 윤종아. 걸이 잘못……. 아니, 저 새끼 잘못이긴 한데. 그래, 저 새끼가 완전히 잘못했는데, 저 새끼가 모든 일의 원흉인 건 명백한데, 저 새끼 잘못만은 아니다.”

“……말에 모순이 있습니다, 사숙.”

“끄응.”

백천이 한숨을 푹 내쉬고 정리했다.

“우리가 욱한 게 잘못이지.”

“……사실 저쪽에서 욱할 만한 말을 하긴 했잖습니까.”

“그렇긴 하지.”

져 놓고 봐줬다고 하는 것보다 사람을 열받게 하는 일도 없는 법이다.

혀를 찬 백천이 조금 태도를 달리하며 모두를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그것 말인데.”

백천의 시선이 당소소에게로 향한다.

“소소야.”

“네, 사숙.”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당가에서 한 말 말이다.”

“무슨 말이요?”

“그…… 독을 제대로 썼으면 우리가 하나도 못 살아남았을 거라는 말.”

“아, 그거요?”

당소소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희 오라버니가 선을 좀 많이 넘기는 했죠. 그런 말을 하면 안 되는 건데. 앞으로는 제 눈치 보지 마시고, 그냥 마음껏 패 버리시면 돼요.”

“아, 아니 그 말이 아니라.”

“네?”

자기가 뭘 잘못했냐는 듯 반문하는 당소소를 보며 백천이 식은땀을 흘렸다.

“당가가 정말 제대로 하독을 했다면 어떻게 됐을 것 같으냐를 묻는 거다.”

“아…… 그 말씀이셨구나.”

당소소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글쎄요. 따지고 보면 사숙 분들이나, 사형들도 제대로 한 건 아니었잖아요. 화산 검술의 정수는…… 제 입으로 말하기는 뭣하지만, 살검(殺劍)에 있다고 봐야 하는데 그건 대련에서는 쓸 수 없으니까요.”

“그렇지.”

“하지만 그 정도 상황이 되면 당가에서도 비장의 절독(絶毒)과 금용암기(禁用暗器: 위험하여 사용이 금지된 암기)를 모조리 퍼부었을 테고…….”

당소소가 고민된다는 듯 턱을 괬다.

“음. 이것 좀 어려운데…….”

그녀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백천이 짐작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가가 이겼겠구나.”

“아, 아니. 꼭 그런 말은 아니고요.”

“아니다. 내 생각도 같았다.”

그러자 조걸이 발끈했다.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사숙! 저희가 지다니요! 그럴 일은 없습니다.”

“내 말을 끝까지 들어라.”

“예?”

백천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당가와 처음 맞붙는다면 우리는 필패한다. 우리는 독에도 암기에도 익숙하지 않지. 당가처럼 싸우는 이들은 처음 상대해 보지 않더냐?”

“그, 그건 그런데…….”

“우리는 당가를 웬만큼 아는 곳이다. 아니, 잘 안다고 자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건 동료로서의 당가지, 적으로서의 당가가 아니다.”

“…….”

“심지어 우리는 자소단으로 독을 웬만큼 버틸 수 있는데도, 처음 기습에 많은 수가 쓰러졌다. 그 말은 미리 대비하지 않는다면 당하지 않을 수에도 당할 수 있다는 의미야.”

오검 중 가장 먼저 독침에 맞아 중독되어 버렸던 조걸은 조용히 입을 닫았다. 이건 뭐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전장에서 갑자기 당가를 적으로 만난다면, 정말 우리가 실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었을 것 같으냐? 아마 더 큰 피해를 보는 쪽은 반드시 우리였을 것이다.”

“끄응.”

반박할 말을 잃은 조걸이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럼 저희가 아직 당가보다는 약하다는 겁니까? 그쪽 장로들도 참전하지 않았는데도요?”

“조금 의미가 다르다.”

“예?”

“처음 맞부딪치면 필패지만, 두 번 싸우면 더 나아질 것이고, 열 번을 싸우면 필승을 할 자신이 있다. 저 당가가 처음부터 끝까지 발전하지 않고 동일하다면 말이다.”

윤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상대를 모르기에 패한다. 하지만 상대에 익숙해지면 능히 상대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때 잠자코 듣고 있던 유이설이 손바닥이 보이게 손을 쫙 펴서 불쑥 내밀었다.

그 의미 모를 행동에 모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섯 번.”

“…….”

“다섯 번이면 충분.”

백천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사매가 그렇게 말한다면, 다섯 번이면 되겠군.”

그 말에 당소소는 복잡하고도 묘한 표정을 지었다. 사천당가의 용독과 암기술에 그리 쉽게 적응한다는 것이 허풍처럼 여겨졌지만, 또 한편으로는 완전히 틀린 말처럼 들리지 않아서였다.

“다들 알다시피 청명이…… 저 썩을 마귀 새끼가…… 저 장작으로도 못 쓸 망둥이,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망할 악귀 같은…….”

“진정하십시오, 사숙.”

“크흠, 그래. 여하튼 그 새끼가 시키는 수련치고 의미가 없는 것은 없었다. 이게 그냥 단순히 싸워서 서열을 가리란 의미는 아닐 것이다. 분명 우리에게 당가의 독과 암기술을 경험해 보라는 의미겠지.”

“……동시에 난전도요.”

“그래, 난전도. 그리고…… 여러 문파가 한곳에서 뒤섞여 있을 때 생길 충돌도 몸으로 느껴 보라는 의미일 것이다.”

백천이 의미심장한 어조로 뒷말을 이었다.

“머지않아 우리는 그걸 조금 더 격한 형태로 경험해야 할 테니까.”

그 말에 본능적으로 사패련과 장일소의 얼굴을 떠올린 화산 제자들의 표정이 더없이 진지해졌다. 그때 조걸이 말했다.

“아니, 너무 좋게만 생각하시는데, 그 새끼 성격이면 그냥 배알 뒤틀려서 괴롭힌 걸 수도 있잖습니까?”

“…….”

“저는 귀찮게 이리저리 지시 안 해도 되고, 다들 죽어 나가니 편했겠죠.”

모두가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조걸이 반사적으로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또 제 말이 틀렸다고 하시게요?”

“……아니. 설득력이 있어서.”

“굉장히 설득력 있지.”

“사실 내 심증은 그쪽에 가깝기는 해.”

모두의 입에서 약속이라도 한 듯 한숨이 새어 나왔다.

물론 상식적으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꼴받는다고 장일소에게 달려들고 소림 방장을 들이받는 놈에게 상식을 바라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닐까.

“여, 여하튼…….”

백천이 헛기침하며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했다.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수련은 명확하니까, 이제는 그쪽을 대비하는…….”

“앞으로요?”

“응?”

조걸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이 짓거리를 앞으로도 계속한다는 겁니까?”

“…….”

“이 미친 짓을?”

“……미친 짓인 건 동의하지만, 사패련을 상대하려면 경험이 필요하지 않으냐.”

“사패련요? 사패련?”

조걸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말한다.

“아니, 사숙. 이 짓거리를 계속하다가는 사패련을 상대하기도 전에 내분으로 천우맹이 망할 판인데요?”

“…….”

“이틀 전만 해도 당가는 우리 동료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요?”

“망할 독쟁이 놈들.”

“비겁한 새끼들.”

“사천 촌놈.”

“죽인다!”

조걸이 코웃음을 쳤다.

“이거 보십쇼. 내 장담하건대, 이렇게 며칠만 더 지나면 이제 눈만 마주쳐도 칼부림이 날 겁니다. 거기에 녹림왕 그 양반이랑, 은근히 쉽게 발끈하는 남궁 소가주까지 섞이면 이제 장강 색이 붉게 물드는 건 일도 아닐걸요?”

“…….”

“천우맹은 이제 망한 겁니다. 꿈도 희망도 없어요.”

걸아, 오늘따라 자꾸 맞는 말만 하는구나.

거참 신기한 날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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